72호 표지

이달의 법문/ 월운 큰스님

불자들의 공동체 생활 ☞▷

정각도량/ 이법산 스님

신행(信行) ☞▷

특집/ 불교와 2002 월드컵

월드컵대회와 한국불교/이학종☞▷

축구에 필요한 불교적 훈련/남수영☞▷

수행의 길/ 이만

한 잔의 차를 마시며☞▷

고승의 향기 / 정유진 스님

희비에도 동요하지 않는 신회☞▷▷

제 4회 연등 축원문(사연)공모

성불사로 올라가는 길/송옥연☞▷

미경 언니에게 보내는 축원문/정희선☞▷

송주하를 축원합니다/김소민☞▷

사랑하는 부모님께/박주현☞▷

일주문/ 진광 스님

나는 누구인가☞▷

세계 문화 유산/ 김미숙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

인터넷의 세계 불교/ 서재영

선(禪)과 호스피스의 만남 ☞▷

詩心佛心/ 이임수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

신간 안내/ 편집부

붓다의 깨달음  ☞▷

교계소식 ☞▷

동국동정 ☞▷

 
성불사로 올라가는 길 (으뜸상)
송옥연/ 문예창작전공 3년

성불사로 올라가는 길, 북한산 자락에는 어디에나 색색의 연등들이 화사하게 매어져 있었어요. 날씨는 또 어쩌면 그렇게 맑고 따뜻한지 모르겠어요.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더운 한여름날이나 길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날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요.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하셔서 눈이 조금만 내려도 밖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셨지요. 날이 더운 것도 못 참으셔서 항상 에어컨을 켜두지 않으면 잠도 이루지 못하셨고요. 먼 길을 가시는데 날이 덥거나 춥지 않고,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인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고운 등까지 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으니 말이에요. 어머니는 이것이 다 부처님이 할머니 가시는 길을 살펴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성불사의 제단에 올라 있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저는 새삼 눈물을 흘리고 말았어요. 할머니의 유골함을 안고 이곳에 처음 찾아왔던 날에도, 제단에 영정 사진을 올리고 향을 피울 때도 이상하게 울지 않던 저였는데 말이에요. 그때는 이상하게 모든 것에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냥 다 장난인 것 같고, 우습고 어처구니 없는 일로만 생각되었지요. 그래서 맑은 하늘에 대고도 짜증이 났었고, 스님의 불경 외우는 소리에도 화가 났었지요. 그런데 이틀이 지나고 다시 찾았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이제 모두 눈물을 흘릴 대로 흘려 더 이상 울지도 않는데 저 혼자 비죽비죽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바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제단 위에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던 참외와 수박과 누룽지맛 사탕을 놓을 때 제일 눈물이 터졌어요. 늘 잡수시던 야채 크래커와 초콜렛도 함께 놓아드렸어야 했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할머니는 어쩌면 그렇게 어린아이같이 값싼 음식들만 좋아하셨어요. 좀 귀하고 고급스러운 음식도 많이 잡수시고 가셨어야 하셨는데, 늘 즐겨 잡수시던 것은 통조림 과일이거나 누룽지맛 사탕이거나 떨이로 묶어 파는 크래커 따위였지요.

음식 뿐 아니라 옷들도 그랬습니다. 발인 다음날 할머니의 옷을 정리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옷도 몇 벌 없으시던가요. 손주들의 결혼식에 입겠다고 아껴두신 분홍색과 옥색의 한복은 어쩌면 그렇게 먼지 하나 없이 곱게 상자에 담겨 있었을까요. 늘 걸치시던 옷 몇 벌을, 사십구제를 위해 싸면서 저는 또 울었더랬습니다.

값싼 것을 사드시고 입을 옷을 안 사시면서, 할머니는 손주들에게는 고기와 외국산 과일들을 사먹이고 철마다 옷을 사주셨지요. 과일을 많이 먹어야 미인이 된다, 옷을 멋있게 차려 입어야 사람이 잘나 보인다, 라시면서요. 손주들은 그렇게 미인에 멋쟁이로 키우고 싶어 하셨으면서 정작 할머니는 그렇게 단촐하게만 살다 가셨네요. 저희는 할머니의 물어다 주신 음식을 먹고 벗어주신 옷을 입고 이만큼 자랐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희 형제를 다 키우시자 할머니는 맡은 일을 다 마치기라도 하신 양 홀연히 떠나가시고 마셨군요. 그렇게 곱게 상자에 담아 놓은 한복을 끝내 입어보지 못하시고요.

처음 할머니께서 혈액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저는 그것이 먼 세상의 이야기로만 느껴졌지요. 그런 것은 그저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도 저는 그 모든 일을 그저 우스운 장난처럼 여겼나 봅니다. 얼마나 철이 없었던가요. 이제 곧 할머니를 보지 못하게 될 날이 온다는 것도 모르고 자주 찾아뵙지도 않고 제 일에만 바빴지요. 할머니께서 다 키워놓으셨는데, 저는 저 혼자 자란 줄 알고 제 일 제 몸뚱이만 귀하게 여겼던가 봅니다. 이제 생각하면 어쩌면 그렇게 철없고 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만, 이라는 말을 몇 번을 곱씹었던가요. 할머니의 입관 때 어머니도, 저희 형제들도 모두 오열하며 한 번만 눈을 떠달라고, 한 마디만 하고 가달라고 할머니께 애원했었습니다. 후회는 언제나 되돌릴 수 없을 때 하는 것인가봐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엄히 가르쳐주기나 하시려는 듯 할머니는 끝내 눈을 뜨지 않으시고, 수의로 옷을 갈아입으시고 얼굴을 덮어버리셨지요. 수의, 어머니가 해드린 최고급 진견수의입니다. 돌아가실 때에나 비로소 값진 옷을 입게 되신 할머니. 다시 한 번만을 아무리 곱 씹어도 다시 뵐 수는 없겠지요.

지금은 어디만큼 가시고 계실까요. 사십구제를 지내기 전에는 아직도 구천을 맴돌고 있는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맑고 포근한 날씨만 계속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찬비를 맞을까, 매서운 바람을 맞을까 걱정되는 걸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다음에서야 비로소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금쪽 같은 손주들이 비를 맞을까 바람 맞을까 길에서 넘어지기라도 할까 늘 노심초사 하셨던 마음을요. 할머니의 잔소리를 얼마나 귀찮게 여겼던가요. 이제는 잔소리를 해줄 할머니가 안 계십니다. 아, 잔소리보다 더한 것이라도 좋으니 할머니의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다 부질없는 미련이겠지요.

산 사람이 이승에서 너무 많이 울면 죽은 사람이 편하게 하늘로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목구멍 위로 자꾸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것을 애써 눌러 삼킵니다. 혈액암 판정 이후 한달, 할머니는 급속도로 나빠져 가는 상태 속에서 너무 많이 고생하셨어요. 의식불명 이후에도 수십 가지 의료기와 독한 항생제들이 할머니를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지요. 이제야 이렇게 후련하게 떨쳐버리게 되셨는데 더 이상 눈물과 한숨으로 할머니의 가시는 길을 방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발인 날, 유골함을 성불사에 모시고 스님이 불경을 욀 때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불경이 끝나고 제를 다 드리고 나니 거짓말 같이 비가 그쳐 있더군요. 어머니께서 그러셨습니다. 할머니가 떠나기 전에 한 번 시원하게 울고 가신 모양이라구요. 이제 다 우셨지요? 그 날 우신 것으로 더 이상 울지 않으시겠지요? 남은 사람 걱정에 가실 길을 못 가고 서성이지도 않으시겠지요?

할머니, 할머니는 어버이날 밤에 떠나셨습니다. 자정을 사십 분 남겨놓고 떠나신 것이라서 다음날이 벌써 돌아가신지 이틀째. 그래서 너무나 금방 발인을 해야 했지요. 어머니는 할머니가 우리 고생하지 말라고 자정 전에 돌아가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러신 거겠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과 손주들, 고생하지 말라고 그러신 거겠지요. 그런데 그게 왜 하필 어버이날이었을까요…….

성탄절에 아버지를 여읜 어느 시인이 쓴 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 남은 생의 모든 성탄절을 동봉해드려요.’ 라는 싯구가 그렇게 가슴에 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제 이야기가 되었네요. 제 남은 생의 모든 어버이날을 동봉해 드립니다. 입관 때 드렸던 만 석의 쌀과 만 냥의 재물보다, 제가 죽을 날까지 동봉해드릴 모든 어버이날을 더 가슴에 안고 가세요. 해마다 달아드리던 카네이션 한 송이, 올해는 달아드리지 못하고 대신 흰 국화만을 곁에 모셨습니다. 서운하지는 않으실런지요. 내년 1주기에는 성불사에 카네이션 다발을 들고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또 예전처럼 하루 종일 카네이션을 달고 여기 저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느라 바쁘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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