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진광 스님/ 불교문화대학
강사
우리가
참된 삶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주체인 나 -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모든
앎에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모든
앎의 주체요, 행위의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앎으로 해서 모든 행위를 바르게 할 수
있고, 올바로 살아서 참되고 행복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바로 알아 참된 자신의 깨어있는 삶을
가꾸어 가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내가 정말 누구인지 깨닫고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쓰는가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자신으로 삼고, 견문각지하는
분별망상을 자기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의 태어남으로 시작한
삶이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 버린다고 생각하여
죽을 때까지의 삶에 최대의 역점을 두어
쾌락과 물질 위주의 자기(육체)본위의
이기적 삶을 살아간다. 또 어떤 부류는
인간을 죄악적 존재로 규정하고 자기 자신
밖에 따로 절대적 권능자의 뜻에 따라
사는 것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며 자기
위안을 삼기도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이러한 인생을
산다면 진리를 탐구하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부끄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현대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생명이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의 화합에서 발생하는 물리화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인가[기계론], 그렇지
않고 정신의 독자적 존재성이 있는 것인가[생기론]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현 생물학계는
자연과학시대의 추세로 기계론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붓다는
나―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설하는가?
붓다는
인간의 존재를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 쌓임[五蘊]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 존재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물질적인 형체를 색온(色蘊)이라고
부른다. 四大(地水火風)가 화합한 것이
색(rupa: 물질직 형체)이다. 그러나 이
물질적인 색온만이 인간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수·상·행·식의
정신적 기능이 합해져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개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사유와 행동을
하는 정신적인 기능의 존재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잡아함경』
권3 에 나오는 오온설에는 물질적인 색온을
바탕으로 개체를 존속시키는 受蘊[느낌]·想蘊[생각]·行蘊[작용·행위]·識蘊[식별]의
정신적인 기능인 사온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 존재를 물질적 요소인 육체[색온]와
정신적 요소인 마음작용[수온·상온·행온·식온]으로
자세히 나누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은 이 사대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가 정말 진실한 나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인연화합에 의해서 잠시 머물렀다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 떠나는 가아(假我)일
뿐이다. 중생들은 이 인연화합의 오온에
집착하여 진정한 나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괴로움과 집착의 부자유한 삶을 살고 있다.
붓다는 세간의 인연법으로 이루어진 모든
존재는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요,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라고 설하였다. 따라서 나라고
집착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오온은 실로 나라고 집착할
만한 실체가 없다. 따라서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 실제로 텅 비었다는 것을 지혜의
눈으로 분명히 비추어 보면 모든 괴로움과
액난에서 벗어난다고 설하고 있다. 지혜의
눈이 열린 사람은 모든 속박과 괴로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오온으로
화합해서 이루어진 나도 진정한 나가 아니요,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렇듯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하고, 지각하고
있는 나는 분명히 있는데, 이것은 또 누구란
말인가.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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