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호 표지

이달의 법문/ 월운 큰스님

불자들의 공동체 생활 ☞▷

정각도량/ 이법산 스님

신행(信行) ☞▷

특집/ 불교와 2002 월드컵

월드컵대회와 한국불교/이학종☞▷

축구에 필요한 불교적 훈련/남수영☞▷

수행의 길/ 이만

한 잔의 차를 마시며☞▷

고승의 향기 / 정유진 스님

희비에도 동요하지 않는 신회☞▷▷

제 4회 연등 축원문(사연)공모

성불사로 올라가는 길/송옥연☞▷

미경 언니에게 보내는 축원문/정희선☞▷

송주하를 축원합니다/김소민☞▷

사랑하는 부모님께/박주현☞▷

일주문/ 진광 스님

나는 누구인가☞▷

세계 문화 유산/ 김미숙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

인터넷의 세계 불교/ 서재영

선(禪)과 호스피스의 만남 ☞▷

詩心佛心/ 이임수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

신간 안내/ 편집부

붓다의 깨달음  ☞▷

교계소식 ☞▷

동국동정 ☞▷

 
희비에도 동요하지 않는 신회
정유진 스님/ 불교문화대학 선학과 교수

명예와 권력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정법을 펼치기 위하여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고 살아가는 구도자가 그리운 시대이다.

오늘은 정법을 선양하기 위해 한 평생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당대(唐代)의 선승인 하택신회(荷澤神會)선사를 촌지(寸紙)의 주인공으로 모시고자 한다.

선사는 서기 684∼758에 호북성 양양현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고(高)씨이며, 어려서 5경과 노장을 배웠고, 후에 불교에 입문하게 되자 벼슬살이하는 것을 그만두고 출가하기에 이르렀다. 불문(佛門)에 들어 온 신회는 처음 북종의 신수(606∼706)를 3년 간 모셨지만 신수는 그를 혜능(638∼713)에게 가서 수행할 것을 권했다. 신회는 혜능 밑에서 수년간 수행을 한 후 운유(雲遊)의 행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혜능은 입몰하고 없었다. 혜능이 입적한 후 개원 22년(734) 정월 보름날 활대의 대운사에서 대대적으로 보리달마 남종이 정통이고, 북종이 비정통임을 천하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신회의 활약에 의하여 장강에서 아득히 멀리 있었던 혜능의 선법이 황하유역의 화북지방에 법등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제방에서는 신회선사를 좋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좋지 못한 시각의 출발점은 당말 오대의 법안종의 개조인 법안문익(885∼958)이 신회를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 칭한 말을 보조지눌(1158∼1210)이 이어 받아서 『절요』에서 다시 주장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조사선의 입장에서 일부분만을 보고 평가한 것일 뿐 신회의 전체 모습에 대한 평가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문익의 입장은 선이란 실천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지 머리로써 이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지에서 평가한 것이다.

신회의 뛰어난 점은 혜능의 문하에서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면 연대상으로는 맞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조계대사전』에 6조 혜능이 신회에게 “나에게 한 법이 있는데 그것은 이름도 없고, 눈·귀·코·혀·몸·의식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머리도 꼬리도 안과 밖과 중간도 없고, 가고 옴도 없고, 빛깔도 없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며, 원인도 결과도 없는,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라고 질문하자 13살의 어린 사미인 신회가 “제불의 근원인 불성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요설사미(饒舌沙彌)라는 평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그는 변재에도 남달리 뛰어났다.

그리고 돈황본 『단경』에 의하면, 혜능이 선천 2년(713) 8월 3일날 입적하기 전에 문도들을 불러 놓고 이별을 알릴 때 법해(法海) 등 다른 제자들은 대사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으나 오직 신회만은 울지도 않고, 마음에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신회의 모습을 본 혜능이 말하기를, “신회는 어린 사미임에도 불구하고 착함과 착하지 않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또 나무람과 칭찬에도 동요하지 않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여러 해 동안 산중에 있으면서 도대체 무슨 법을 실천해 왔던 것인가? 그대들이 지금 이렇게 울고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근심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나의 갈곳을 알지 못하여 근심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만약 나의 갈 곳을 알지 못한다면 그대들과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 그대들이 울고 있는 것은 그대들이 내가 갈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갈 곳을 알고 있다면 울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혜능이 신회의 경지를 인가하고 있는 일단이다. 신회는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육신은 가고 옴이 있지만 본심(本心)의 세계에는 가고 옴도 없으며, 또 생사도 없음을 체득했기 때문에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선악과 시비 등을 뿌리치고는 단 한시간도 살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좋은 일과 나쁜 일,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이 서로 만나지 않고서는 세상을 살아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괴롭게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괴로운 세상을 즐거운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일한 방법을 하나 제시하면, 연꽃이 진흙탕에서 피지만 그 진흙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것과 같이 괴로운 사바세계에 살면서 그 괴로움에 동요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괴로운 세상을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 괴로움의 세계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 들여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전환하는 길밖에 없다. 전환하는 방법은 생각 생각마다 늘 마음이 대상에 매몰되지 않고 깨어 있으면 된다. 깨어 있는 그 마음은 다름 아닌 지혜로운 마음인 것이다. 지혜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선악과 시비 등 분별망상의 세계는 모두 극복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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