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호 표지

이달의 법문/ 월운 큰스님

불자들의 공동체 생활 ☞▷

정각도량/ 이법산 스님

신행(信行) ☞▷

특집/ 불교와 2002 월드컵

월드컵대회와 한국불교/이학종☞▷

축구에 필요한 불교적 훈련/남수영☞▷

수행의 길/ 이만

한 잔의 차를 마시며☞▷

고승의 향기 / 정유진 스님

희비에도 동요하지 않는 신회☞▷▷

제 4회 연등 축원문(사연)공모

성불사로 올라가는 길/송옥연☞▷

미경 언니에게 보내는 축원문/정희선☞▷

송주하를 축원합니다/김소민☞▷

사랑하는 부모님께/박주현☞▷

일주문/ 진광 스님

나는 누구인가☞▷

세계 문화 유산/ 김미숙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

인터넷의 세계 불교/ 서재영

선(禪)과 호스피스의 만남 ☞▷

詩心佛心/ 이임수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

신간 안내/ 편집부

붓다의 깨달음  ☞▷

교계소식 ☞▷

동국동정 ☞▷

 
불자들의 공동체 생활
월운 큰스님/ 동국역경원장

어느 측면으로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면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어린 시절 석가모니께서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얘기에서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이 가진 자들에게 착취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듣고 보니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어쨌든 그분들 논리도 부처님이 사회개혁을 도모했었다는 얘기에서 일단 공감이 가더라구요.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브라흐마신에 의해서 창조되고, 브라흐마신에 의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사회 관념 속에서 “그게 아니다! 내가 달라지면, 달라지는 만큼 조용히 달라진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고난도 너에게 있고 책임도 너에게 있다. 너에게 있는 책임과 권한이 어떤 영향을 가지고 있음을 아느냐? 미래에 행복과 불행을 엮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무언가에 예속되고 시달리고 고통받는 침울한 사회를 힘차고 밝은 사회로 만들겠다는 사회개혁이 있게 됩니다.

사회개혁이라는 것을 공동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일단 그 공동체는 단순히 작은 모임의 형태가 있을 것이고, 아주 큰 형태의 집단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공동체 속에서 나 자신을 유지해 나가고 변화해 나가는 데에는 선한 일이 되든지 악한 일이 되든지 누구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공동체라는 인간의 여러 유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우선 불제자(佛弟子)들은 ‘선인선과 악인악과(善人善果 惡因惡果)’의 법칙을 믿고,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그 법칙에 묶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불교는 발전을 하면서 참으로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고, 또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보통사람보다 더 뛰어나고 높은 경지를 음미하는 선자들도 생기고, 어떤 경우에는 해도 안되니까 주저앉는 사람들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여러 형태의 다양한 종교적인 현상도 생기게 되고, 우리 불교계를 볼 때에 조금은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문물이 새록새록 바뀌면서 자신에게 이익이 없으면 손톱만큼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풍토이며, 불교는 다른 종교와 맞물려서 같이 살아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불제자들은 해야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경전에 보면 한 사람이 청정하면 차츰 차츰 많은 이들이 청정해져서 온 천하가 청정해질 수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선인성현의 말씀을 찾아다니면서 서로 그 유대를 공고히 하고 그래서 이 모든 사람들이 누가 보거나 안보거나 평소에 생각했던 선인선과의 법칙을 어기면은 절대 안된다는 자기 제어 기능이 생겨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 볼 거 같으면 진정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또 그것을 주도적으로 특히 우리 불교계에서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불제자들이 공동체 생활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고, 평소의 불제자들의 힘이 종으로 횡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 속에서 자기가 잊고 지냈던 어떤 철학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삶을 엮어 보겠다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교를 믿어야 되는 이유를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리에 입각해서 내가 일상생활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매일 매일 다져나가야 할 굳은 의지가 약해지고, 저항을 받고 힘들 때에만 부처님의 가피력을 빌지는 않는가. 혹시 어려울 때만 무작정 부처님에게 봐주십시오 그런다면 아무 의미 없는 맹신과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불자들이 서로가 공동체임을 인식했더라면 지속적이어야할 불심이 이렇게 약하게 표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방 직후엔 국군의 3분의 2정도가 불자였을 정도로 불자의 수가 많았는데, 지금은 국군의 대령 이상의 불자가 매우 적은 숫자라고 합니다. 말하면 울타리 없는 집이요, 입술 없는 이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불자 개인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움직이지, 공동체의 유대개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불자로서 불교를 믿고 불교교단의 명령에 우선 따르기 않는 것이 큰 문제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자기 자신이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며 불제자로서 긍지를 붙들고 매나가도록 하는 힘을 길러주셔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불제자는 가정의 구성원의 의무, 국민의 의무도 다하여야 하지만 거기에 불제자의 의무도 꼭 머릿속에 두고 생활 속에 실천해 나가시고 많은 이에게 이를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가정이나 국가에 대해서만 충성을 할 것이 아니라, 불자들은 불교 교단을 위해서도 마음을 다하는 훈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불자공동체를 가장 먼저 시도해 볼 곳은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제자는 귀의불(歸依佛)이라 말할 때 부처님께 이 목숨 다하도록 바치옵니다라는 개념을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작은 힘으로 시작해 큰 힘을 뭉쳐서 큰 일을 이루어 내야 할 시기인 것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심이 청정하면 다심이 청명해진다는 것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 불교는 수많은 신도들이 있지만 응집력이 다소 약한 약점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불제자의 언동을 보이고, 불제자의 영역을 지키고, 불제자의 가정다운 가정을 엮어 나아간다면 이러한 약점도  고쳐지리라 믿습니다. 더불어 지금 이러한 생각을 해볼 수 있고, 실험해 볼 수 있는 곳이 여기 동국대학교 이외에도 바로 여러분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우선 나 자신이 불자적 인생관을 다시 한번 다지셔야 합니다. 또 그러한 생활을 현장에서 체험하면서, 불자적 생활을 아예 양심의 표제로 삼는다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더불어 가정에 돌아가셔서 가정내의 화합도 일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조금씩 불교신자들은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집단으로 바뀌는 일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남쪽에서 진달래꽃이 처음으로 터져 올라가듯이 조금은 막막한 이 불교계의 현실 속에서 여러분들이 새로운 화두로서 이렇게 피어나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모두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다 한번 생각할 수 이야기를 제가 미흡하게 하였습니다. 다같이 성불합시다.

 

 | 표지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