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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탑 신앙의 전개
양승규 / 불교문화대학 강사

인도에서 발생된 불교는 여러 시대와 지역을 거치면서, 남방과 북방, 소승과 대승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불교로 변형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불교는 경우에 따라 교학적으로, 수행적으로 첨예하게 대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탑신앙 만큼은 지역적인, 교학적인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곳에서 행해지는 공통된 신앙형태로 자리잡았다. 스리랑카에서부터 인도, 파키스탄, 티벳, 중국, 한국 등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탑이 건립되고, 탑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설사 불교가 더 이상 불교의 자취를 볼 수 없는 곳에서조차 탑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탑은 사리(sar ra)를 봉안한 무덤으로 ‘포개어 쌓는다’는 뜻의 스뚜빠(stupa)에서 비롯된 말이다. 따라서 탑은 무여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몸을 간직한 곳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은 45년동안 중생들에게 진리에 드는 방법을 가르치셨다. 마지막 순간에도 “비구들이여,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할 곳으로 삼아라.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할 것으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쿠시나가르에서 무여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의 장례는 전륜성왕과 같이 장대하게 치러졌다. 장례는 인도전통에 따라 화장을 했고, 부처님의 유언에 따라 장례의 대부분은 재가자에 의해 치러졌다. 유해가 타고 남은 곳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남았다. 장례절차를 주관한 말라족 사람들이 이 사리를 거두었다. 뒤늦게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접한 인도의 일곱 나라에서도 각각 탑을 세우겠다고 말라족에게 사리를 나누어 줄 것을 요구했다. 말라족이 거부하자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왕은 무력으로 사리를 얻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 드로나바라문의 중재로 사리를 여덟 몫으로 똑같이 나누어 탑을 세웠다. 이것이 ‘근본팔탑’이고, 이 이외에도 사리를 넣은 병과 재를 모아 탑을 세운 것이 불교 최초의 탑이 세워지게 된 연원이다. 부처님의 유언에 따라 탑은 사찰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네거리 한복판에 세워졌다.

불탑은 이와 같이 재가 신자들에 의해 건립되고 예배되었다. 출가한 비구들에게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는 이가 아니라 법으로 인도하는 스승, 즉 도사이기 때문에 법을 떠난 불신의 숭배는 무의미한 것이었으며, 불상이나 불탑의 숭배 역시 그러했다. 또한 붓다는 쿠쉬나가르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진리 자체로서는 실재할지라도 인격으로서는 실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부처님의 사리에 대한 공양 예배는 무의미할 수 밖에 없었다.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출가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사리에 대해 공양하는 것보다 오로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여래의 사리는 신심이 돈독한 크샤뜨리아, 브라흐마나, 바이샤 등의 현자들이 공양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불탑의 조성은 생천(生天)을 보장했기 때문에 불탑의 조성과 경영에 많은 재가신자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나아가 그들은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와 성도지인 붓다가야, 초전법륜지인 녹야원, 입멸지인 쿠쉬나가르 등을 성지로서 숭배하였고, 그 곳에 사당을 세워 순례하였다.

탑의 관리를 맡은 재가신자들은 불탑을 부처님 자체라고 생각하여 봉안하였으며, 여기에 춤과 노래를 베풀고, 꽃과 향을 바치고, 보물과 귀금속등을 봉헌하고 예배하는 종교적인 신앙운동을 전개시켰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이나 성도하신 날에는 특별한 공양의례가 베풀어졌으며 재일에는 팔재계가 시행되었다. 탑 주변에는 연못이나 정원이 조성되기도 하고 숙소가 지어져 정착이 가능하게 되었다. 마침내 10선계를 받아 출가하는 출가사문이 되기도 했다. 나아가 자신을 불탑에 헌납하는 탑노가 된 열렬한 불탑 신앙자도 생겨났다.

재가신자들과 달리 출가한 비구들은 비하라(vihara)라고 불리는 출가자들만의 거주처에 머물렀으며, 그곳은 불탑과는 전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였다. 그들은 금은을 받는 일이나 춤과 노래가 금지되었으며, 꽃 공양 등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일정한 스승 앞에서 형식을 갖춘 수계작법에 따라 출가하고,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법 중심의 불교를 지향했다.

그렇지만 세속적인 삶을 영위하는 재가신자들은 선정을 닦고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의 자비를 통해서 구원받기를 원했다. 이러한 종교적인 욕구에 따라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는 구제불로 등장하게 되었다.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은 구원의 부처님이다. 이들은 출가교단에서 독립하여 자신들의 교법을 발전시키고, 관불(觀佛)이라는 종교적인 행위를 실천하기 위한 장소로서 불탑을 선택했을 것이다.

불탑에 예배하던 신자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활동하던 자산가였다. 이들은 주로 상인이었고 지주였으며 무역상을 통해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불탑에 보시했는데 그 액수는 상당했다. 막대한 재산이 불탑에 기증되자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의 재력도 풍부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보시하는 사람과 관리자들이 불탑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활동은 활발하고 이들 신앙단체의 규모도 상당히 큰 형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적인 기반이 확립되면서 비구승단과는 별도의 불탑 신자단은 보살단으로서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보살단이란 명칭도 처음에는 불탑에 예배하고 보살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정도의 단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체의 세력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자치단체의 성격을 띄게되면서 출가와 재가의 공동체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 불탑을 숭배하는 신앙형태를 가졌던 보살단은 차츰 그 입장을 강화하게 되고 더불어 불탑은 이 공동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부터 비구교단도 불탑예배를 채용하게 되어 인도 전역에 불탑 신앙이 유행하게 된 것은 기원전후가 된다. 그러나 불탑 신앙에 대한 폐해도 생기기 시작했다. 즉 경전은 독송하지 않고 자기 생활을 위해 불탑을 찾는 사이비 사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이비 사문들의 출현은 보살공동체의 상징인 불탑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되었고, 보살단의 순수한 신앙마저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원래 무소유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숲속에서 생활하고 걸식을 원칙으로 전도의 삶을 살았던 교단이 사원을 기증받고 정착하면서 저질렀던 과거의 어리석은 역사를 이 보살단도 똑같이 반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보살단은 그대로만 있을 수 없는 새로운 자각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을 것이다. 보살단 중에서 신앙심이 깊고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그룹이 기원전후부터 새로운 불교운동을 지향하면서 새 경전을 결집하려는 의지를 굳혀갔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런 운동의 결과로서 『반야경』, 『법화경』 등의 대승경전이 탄생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와 같이 불탑 신앙을 중심으로 하던 보살단이 새로운 결집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법화경』 신앙으로 응집되기에 이른다. 『법화경』의 중심사상은 일불성(一佛性)사상이다. 일불성사상은 일체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은 방편이고, 이것은 진실이 아니므로 무상도인 일승의 가르침을 말씀한 것이 『법화경』이란 것이다. 그런데 이 일불성을 자각하는 실천행법으로 [방편품]에서는 육바라밀의 수행과 함께 불탑조성과 불탑예배와 공양을 열거하고 있다. 1. 과거 많은 부처님 세상에서 많은 중생이 여러 가지 보배불탑을 건립하거나 묘를 세우고 그 공덕으로 불도를 성취했다. 2. 심지어 어린 동자가 장난으로 모래를 모아 불탑을 쌓고 혹은 손톱으로 불상을 그리고도 성불했다. 3. 산란한 마음으로 꽃 한 송이를 불상에 공양한 것이나 산란한 마음으로 탑묘에 들어가 한 번 나무불(南無佛)이라고 소리내어 외우기만 해도 그 공덕으로 불도를 성취한 이가 있다. 또 [수기품]에서는 대가전연과 대목건련이 탑을 건립하고 탑에 공양하는 인연으로 ‘염부나제금광여래’와 ‘다마라발전단향여래’라는 이름으로 성불한다는 기연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법화경』에서는 탑을 조성하고 탑에 공양하는 것은 단순히 복덕을 짓는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대승의 보살은 삼아승지겁동안 육바라밀이라는 보살행을 닦아 성불하게 되는데, 이러한 보살행의 공덕을 『법화경』에서는 탑을 조성하고 공양하는 것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불자들의 바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랫동안 중생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찬란한 인도불교의 역사속에서 다른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탑은 옛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남아있다. 보드가야에도 대탑이, 사라나트의 녹야원에도 탑이, 날란다 대학의 폐허 속에서도 탑은 남아 있다. 탑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다. 그곳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모든 번뇌를 뛰어 넘고 지혜를 구족하신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번뇌를 끊기 힘들지만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지혜를 갖추기 힘들지만 구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시기 위해 계신다. 그래서 탑은 무한한 공덕을 가진 것이고, 탑을 조성하고 공양하면 복이 있고, 그 복덕으로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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