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화가 우제선 / 불교학과 교수
필자의
고향은 작설과 매화로 유명한 섬진강 자락이다.
태어난 곳은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라는
지리산 첩첩 산중이었지만 어릴 때 한의사였던
조부께서 보다 대처로 이사를 하시어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와 마주하는 다압이라는
곳에서 자랐다. 하얀 뱃사장을 낀 섬진강을
사이로 지리산과 백운산이 마주하는 곳인데,
봄철에는 산 따라 진달래와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속까지 훤히 보이는 강에서
멱도 감고 재첩도 채취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조부께서는 한학을 하셨던 관계로
어릴 때부터 천자문이며 소학을 손자들에게
가르치셨는데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배우기
싫어 노상 도망 다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나이가
되어 초등학교를 입학했는데 사는 곳에는
학교가 없어 면소재지까지 십리를 넘게
걸어 다녔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나 눈보라가
치는 날은 결석하기가 일수였지만 평상시에도
초등학생 걸음으로 아침 조회 전까지 등교하자면
적어도 두어 시간 전에는 집에서 나서야했다.
또래끼리 다니자면 십리 내에는 마을도
없고 인적도 드물어 혼자 다니기에는 혹시
귀신이라도 나오지 않나 여간 마음이 조마
조마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등교길 중
가장 외진 곳에 굴바위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어떤 거지가 어느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머물다 동사했던 장소라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사 오학년쯤으로 기억된다. 무슨 이유인지는
지금 확실하지 않지만 고전 읽기 모임인가
무언가해서 혼자 밤늦게 귀가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가 있었다. 낮에 동무들과 같이
다녀도 무서웠던 길인데 밤에 그것도 혼자
집으로 돌아오자니 여간 마음이 스산한
것이 아니었다. 굴바위 옆 대나무나 포플라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어 서로 부대끼는 소리라도
낼 때에는 기겁을 하고 냅다 달려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고 한편 신기하기도 하지만
어느 날부터 내가 왜 무서워하는가 하고
생각해본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고
굴바위를 지날 때 무서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계속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냅다 달렸지만 왜 그곳만
지날 때면 마음이 두려움에 감싸이는지
그것은 어린 필자에게 늘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었다.
많은
사람들이 필자는 불교와 인연이 깊다라고
말들을 한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동국대에서 밥을 먹고 사는 것도
그렇지만 집안에 스님이 두 분, 그것도
삼촌과 친누님이 조계종 소속 스님이시다.
삼촌은 선과 교에 두루 밝으신 분으로
법명만 말해도 많은 분들이 아실 터인데,
아자방과 운상원이 있는 지리산 칠불사에
오래 주석하셨다. 아자방은 한번 불을
지피면 석 달 열흘간 따뜻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빨찌산 토벌로 건물은 소실되고 온돌만
남아있던 필자의 어린 시절에도 군불을
때면 적어도 한 달간은 따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만 되면 칠불사에
갔었다. 명목상은 스님께 한문도 배우고
불교 공부도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명목이고 아자방 군불 지필
때 감자나 옥수수 구워먹고 혹 노보살님들
기도오셔서 절에 머물 때에는 몰래 신발
감추어 애 먹이고 그런 일로 소일했다.
물론 지금도 필자가 보관하고 있지만 읽든
안읽든 간에 가는 첫 날 천수경도 받아
놓고 금강경도 받아 놓고 하긴 했었다.
하도 개구쟁이 짓을 많이 하자 운상원에서
정진하시던 어느 스님께서 필자가 머물던
방의 한 쪽 벽에 점을 조그맣게 찍어 놓고
그것을 하루에 삼십 분씩 세 번 관하게
하는 말하자면 면벽 수련을 시키시었는데
그것도 며칠을 지속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생긴 무서움은 과연 왜 일어나는가라는
의심은 필자를 조금은 변화시킨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관심의 시발점이었는데 생전 묻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러한 문제를 그
해 겨울 방학에 칠불사를 갔었을 때 그것도
인사를 여쭙자마자 스님께 물었으니 말이다.
스님께서는 가만히 빙그레 웃으시더니
필자에게 도리어 물으셨다. 굴바위를 지날
때 해꼬지를 당한 적이 있느냐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달리다 스스로 넘어져 몇 번
무릎이 까진 적은 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무엇에도 아무런 해를 입은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부처님 말씀을 빌려 딱 한마디
답하셨다. 그 무서움은 너의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어느
의사 분에게 들으니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은 누구나 싶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대뇌에서 명령 체계가 이루어지고
어떠한 신경 조직을 통해 명령이 손까지
전달되며 어떤 근육이 어떻게 움직여서
쥐었다 다시 폈다 하는 행동이 일어나는가를
설명하자면 대영백과 사전과 동일한 지면의
분량을 동원해도 부족할 뿐더러 현재의
의학 지식으로 다 밝힐 수도 없다고 한다.
십오 년을 훌쩍 넘게 불교를 공부했지만
필자는 아직도 불교 설일체유부 등에서
말하는 마음 밖에 따른 세계가 있는지
아니면 유식학파에서처럼 이 세계는 오직
識 뿐인지 그리고 만약 마음의 세계가
밖의 세계와 다르다면 그것들의 연결 고리는
무엇인지 명쾌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십수 년 전에 스님께서 주셨던 경전의
말씀, 물론 그것은 불교 경전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마음이고 마음은
화가가 되어 우리 세계를 그린다는 것은
또렷이 필자의 마음 속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필자를 불교에 입문하게 했으며
불교 인식론과 존재론에 관심을 갖게 만든
중요한 동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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