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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과 묘법 연화경
정승석 / 인도철학과 교수

법화경은 중국에서 정법화경, 묘법연화경, 첨품묘법연화경이라는 세 가지로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법화경이라고 말할 때는 이 중에서 묘법연화경을 먼저 지목한다. 셋 중에서 왜 유독 구마라집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이 가장 널리 유통되어, 동북 아시아에서 법화 신앙 또는 법화 사상을 선도하게 되었을까?

법화경의 원천은 인도의 어느 지역에 있었다. 이 원천에서 흘러나온 샘물은 도랑을 형성하여 흐르면서, 군데군데서 무리를 지어 또는 따로따로 솟아나는 다른 샘물과 합류해 나갔다. 이 도랑이 마침내 법화경으로 불리는 내를 이루었고, 이 내는 인도로부터 서역의 협곡을 지나 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흘러 드는 길고 긴 강을 형성했다. 이 강의 이름을 ‘법화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 내가 중국에까지 흘러 들자, 중국에서는 그 내의 물길을 확장하여 많은 지류를 가진 도도한 강으로 일신하게 할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공사의 주역은 구마라집이고, 그가 맡은 공사의 명칭은 묘법연화경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이 유명하게 된 배경이 그러하다.

구마라집(344∼413년 생존)은 중앙 아시아의 쿠차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는 이 곳을 구자국(龜玆國)으로 불렀다. 이 곳은 현재 신강성의 위그루 자치구에 속한다. 아버지는 쿠차 왕국의 국사가 된 인도 출신의 스님이었으며, 어머니는 쿠차 국왕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7세에 출가하여 9세부터 12세까지, 이미 비구니가 된 어머니와 함께 북인도의 카슈미르 지방에서 불교를 수학했다. 여기서 그가 진력하여 수학했던 것은 초기 불교와 설일체유부 계통의 아비달마 불교였다. 그는 귀국하는 도중에 카슈가르에서 1년간 머물면서 베다 등의 인도 철학과 대승 불교를 수학하고서는 확실하게 대승으로 전향했다. 귀국한 후에는 20세에 정식으로 비구가 되어 대승 불교를 홍보하는 데 전념했다.

학승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서역 일대로부터 중국에까지 퍼졌다. 당시 중국에서 북조(北朝)에 속해 있던 전진(前秦)의 국왕은 구마라집을 데려오려는 목적으로 군대를 보내 쿠차를 정벌했다. 구마라집이 그 군대의 포로가 되어 양주(凉州)의 고장(姑臧)에 도착했을 때, 전진은 멸망하고 후진이 들어섰다. 이 때문에 구마라집은 그 곳에서 18년 동안 억류되어 있었지만, 이 사이에 그는 중국어와 중국 고전을 습득했다. 드디어 후진의 국왕이 그를 국사로서 맞아들임으로써 그는 401년에 수도인 장안(長安)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왕의 후원으로 번역 작업에 총력을 쏟았다. 이리하여 그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경전과 논서들의 번역을 연작으로 완성해 냈는데, 권위 있는 그의 번역은 모두 35종에 이르며, 이 중에는 법화경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번역 작업에서는 중국인의 제자와 학승들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조직체가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이전의 번역과 비교하여 구마라집의 번역을 세심하게 검토하고 그와 함께 그 의미를 논의하면서 그가 자신의 번역어를 퇴고하도록 도왔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법화경이 다른 번역에 비해 그토록 우수하고 그토록 광범위하게 열성적으로 읽혀 왔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법화경을 영역으로 소개할 때도 대부분의 역자들이 원서로 채택하는 것은 구마라집의 묘법연화경이다. 구마라집의 번역이 왜 이렇게 유명한지, 여기서 묘법연화경 옹호론자의 변론을 들어 보자.

“법화경이 인도 불교의 작품이라면, 왜 그것을 범어 원전으로부터 번역하지 않고 구마라집의 한역본(漢譯本)으로부터 번역하느냐고 누군가는 물을지 모른다. 첫째로, 법화경이 애초에 어떤 언어로 작성되었는지를 우리는 모르고, 따라서 범어 사본은 이미 원본으로부터 한 단계 벗어난 것이다. 둘째로, 현존하는 어떠한 범본도 구마라집이 번역한 연대(406년)만큼 이르지 않으며, 모두 내용의 일부에서는 그의 번역과 다른 점이 있다. 이처럼 그의 번역은 거의 확실하게 원전의 초기 형태를 대변하며, 원본에 더 가깝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에서 구마라집의 번역을 통해 법화경이 알려지고 수세기에 걸쳐 독송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오래 전에 사장되었고 원전의 범본도 수백 년 동안 사라졌다가 근래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엔 소수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법화경의 범본을 읽지 않는다. 반면에 동아시아의 수백만 명의 스님과 재가 신자들이 구마라집의 번역을 매일 읽고 독송한다. 이 한역 법화경의 언어와 형상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종교 생활과 사고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쳐 왔으며, 그들의 예술과 문학을 이끌었다. 따라서 이처럼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판본을 영역하는 것은 전적으로 지당하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구마라집의 명성은 그의 특출한 번역 능력에서 유래한다. 일반적 평가에 의하면, 그의 번역은 종래의 옛 번역에 비해, 간결한 어휘와 문장으로 자신이 이해한 의미를 잘 전달하는 데서 교묘한 재능을 발휘하여, 한층 더 탁월하다. 이 같은 그의 번역은 이후의 경전 번역에서 규범이 되는 동시에, 이러한 번역 경전들에 의존하여 불교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의 번역은 독송용으로도 화려하여, 동일한 경전에 대한 다른 번역이 있더라도 그의 번역만을 극구 찬양하는 경향은 현재에도 여전하다.

구마라집의 행적을 소개하는 {고승전}의 기사들 중에서 그의 파계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그는 이미 어렸을 때 “35세가 되기 전에 파계한다면, 지력이 빼어난 법사가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들은 바 있다고 하며, 중국에 들어와서는 두 차례 파계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곧이곧대로 사실처럼 받이들이기는 곤란하지만, 구마라집의 파계를 합리화하고 부각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구마라집의 천재성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즉, 그 이야기들은 그가 파계하지 않았다면, 그의 천재성이 짧은 기간에 많은 불전들을 탁월하게 번역하는 쪽으로 발휘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공감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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