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공부 이상병 / 교육방송국
간사
흔히
불교는’마음 공부’라 한다.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스스로 깨쳐 알게 하는 교이며,
그 이치를 사무쳐 알고 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이치를 알게되고 우주·인생의 근본진리도
해결될 것이라 한다. 이는 간단한 문구지만
한없이 깊고 끝없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외부환경을
바꾸고 싶거든 그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바꾸라고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다른
사람이 바뀌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내가 먼저 내 마음을 바꾸면 된다. [보왕삼매론]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 지나니,
그래서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삼으라.”하셨다.
화가
날 때는 남을 탓하지 말고 조용히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어찌 불자들만의
몫이겠는가?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역사적·사회적·정치적·문화적
현상은 우리 인간의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다채롭고 복잡한 문화적 시설물과 공상품(工商品)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요 땅에서 솟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 인간의
머리로부터 지어낸 소산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계에 전개된 온갖 시설과
기계·기구 등 문화현상은 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며 즉 인간의 지능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 지능은 인간의 마음의
작용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였다. 자발적 참여로 ‘대∼한민국’을
외치며 독립이후 처음으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고 너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불교에서는 연기설로 설명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에 대해 “갈대 다발이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에는 서 있지만, 어느 한 다발을
떼어내면 다른 하나도 넘어지게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멸(滅)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이나 타인들과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상호
의존성을 철저히 깨닫게 되면, 자기가
소중하듯이 남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남의 기쁨을 같이
기뻐하게 되고, 남의 슬픔도 같이 슬퍼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자비(慈悲)의 윤리가
나온다. 자비는 타율적으로 강요되거나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성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윤리이다.
불교의
세계관은 사고 방식 자체가 다르다. 석존은
일찍이 이 우주 전체를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
파악했다. 모든 것이 그 어떤 조건이나
관계에 의한 임시적 존재로 깨달은 연기법(緣起法)이
바로 이것을 증언한다. 이 연기의 이치
가운데에서는 너도나도 그것도 모두 같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결국 생명체로서의 인간이나 짐승은
산천초목의 국토와 서로 다르면서 같은
하나라고 하게된다. 그리하여 사람이나
짐승은 물론이고 산천초목까지도 모두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위
초목성불설(草木成佛說)이 나오는가 하면,
국토 자체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처
그 자체(法身佛)’의 표현이라고 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주 전체가 숭고한 생명현상으로
설명되고 확신되기에 이른다. 이름 없는
돌멩이 하나 하나나 들판의 보잘것없는
풀 한 포기조차도 모두 부처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각종 자원 고갈과
환경의 오염 및 파괴로 인해 인간의 생존
자체가 위협되고 있는 현대의 심각한 사태는
인간의 집단적 이기주의가 숭고한 생명
세계에 도전하여 해친 결과의 당연한 보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물을 보는 눈과 삶의 방식
자체에 근본적으로 크나큰 전환을 기해야
한다. 임기응변적인 대중요법이나 부분적인
개선으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자연적
환경 자체를 나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삶의 자세와 사고 방식이
요청된다. 작은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싹이 트여 큰 나무로 자라나서 넉넉한
그늘로 쉴 곳을 제공하듯이, 본래부터
불성을 갖고 있는 우리들은 주변을 살피는
여유도 갖춰야 할 것이다.
불성(佛性)은
존재의 본질적 핵심이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불성으로부터 나왔다. 불성은 원천인
동시에 목적이다. 우리는 불성으로부터
와서 불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불성’이라는
하나의 낱말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불성은 삶이라는 원(圓)을 완결 짓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깊이 잠들어 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붓다라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직면하면
불성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본래면목을 보게 되는 날, 온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다. 특정한 한 개인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한 개인이 깨달을
수 있겠는가? 특정한 ‘한 사람’이라는
개념자체가 깨닫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나’가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에 앞서 ‘나’가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러니 어떻게 ‘나’가
깨달을 수 있겠는가? 내가 깨닫는 날 우주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수많은 형태와 이름을 갖고 있으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붓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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