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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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법륭사
김호성 / 불교대학 교수

호오류지는 1993년 12월에, 일본의 문화재로서는 최초로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사찰이다. 우리 나라에서 법륭사(法隆寺)라고 부르는 사찰이 호오류지이다.

처음 호오류지를 찾은 것은 2001년 7월 6일의 일이었다. 호오류지는 나라(奈良)에 있다.  긴테쯔 나라선을 타고 호오류지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택시(720¥)를 타거나 셔틀버스를 타면 이내 호오류지 앞에 도착한다. 호오류지 인근은 그 옛날(6∼7세기)에는 문화의 중심이었겠으나, 이제는 한적한 시골 농촌일 뿐이다. 그래서 교또보다도 더 한적하고, 마음조차 여유로워진다.

“고구려 출신의 담징(曇徵)이 그린 금당 벽화”로 우리에게 익숙했던 절이다. 그런데 실제 일본을 대표할 만한 절임을 이내 느끼게 된다. 우선 터가 넓다. 우리 같으면 황룡사 정도가 이와 비슷한 규모가 아닐까 싶다. 도량이 그렇게 넓다.

“시간이 없는데, 볼 것은 많구나!”

동원가람, 대보장원, 서원가람의 삼원(三院)이 있다.

“무슨 입장료(1,000¥)가 그리 비싸냐?”

아까 했던 말이 경솔했음이 판명된다. 일본 불교사의 초기 모습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건물도 세계 最古의 목조건축이라 한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견뎌냈나 싶다. 古色이 저 옛날부터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이력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교또 시내의 절과는 분위기가 판이하다. 이런 도량이라면 여유롭게 서서히 음미해야 마땅하리라.

박물관 노릇을 하고 있는 大寶藏院은 글자 그대로 큰 보배를 모시고 있는 절이다.

박물관 안에는 백제 관음상이 한 분 계신다. 서 있는 모습인데, 처음 보는 양식이다. 늘씬하고 키가 크다. 자세히 보니 백제 사람을 닮은 듯한 얼굴이다. 부처님은 국경이 없는데, 중생에게는 국경이 없을 수 없으니 더욱 반가웠다.

바삐 돌아나오는데, 입구의 요사채같은 집의 대문에 “성덕종 총본산”이라는 현판을 달아둔 것이 눈에 띈다. “성덕종”은 우리에게는 없는, 일본 불교의 종파이다. 일본 불교를 정착시킨 공로가 높이 평가되는 쇼오토쿠(聖德, 574∼622) 태자를 떠받드는가 보다. 쇼오토쿠 태자는 법화경, 승만경, 유마경에 대한 강의서를 남긴 분이라고 전한다(眞撰 여부가 의문시되고 있긴 하지만). 일본 불교의 기초를 구축한 저서가 이들 세 경전에 대한 주석서이다.

아까 박물관에서는 방 하나 가득 쇼오토쿠태자와 관련된 그림,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호오류지 역에서 52분에 출발하는 오사카 행 기차를 타기 위해서 30분에 호오류지 구경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이건 완전히 “달리는 말에서 먼 산 바라보기”다.

지난 1월 호오류지를 다시 찾은 데에는 여름의 아쉬움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컸다. 마침 재야 미술사학자로 활약하는 성낙주 선생과 동행이 되었다. 지난 번 왔을 때와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번에 호오류지에서 새롭게 느낀 것은, 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 절을 좋아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이다. 교또의 절들과는 달리 넓은 자연 속에 광활한 가람을 지어놓고 있다는 점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일본 사람들이 인공미를 선호한다면, 우리에게는 자연미를 좋아하는 감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호오류지나 도다이지(東大寺)는 모두 자연미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천천히 여유있게 보다 보니까 몇 가지 사실들이 새롭게 보인다. 첫째, 처실(妻室)이 헤이안(平安) 시대에 이미 지어져 있었다. 일본 불교 스님들의 아내의 존재가 헤이안 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당나라 때 조성된 구면(九面) 관음이 모셔져 있다. ‘십일면 관음’은 들어보았으나 ‘구면 관음’은 듣지 못했는데 ----. 셋째, 유식의 교학을 창시한 인도의 무착(無着)과 세친(世親)부터 중국의 자은(慈恩)을 거쳐서 일본의 현방(玄昉)에까지 이르는 조사들을 한 폭의 그림에 배치한 “법상 만다라”가 있었다.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께 법을 듣는 모습이다. 중국 부분에서 혹시 우리의 원측(圓測) 스님을 찾을 수 있나 하고 들여다 보았는데, 안 계시다. 일본 유식은 원측 계통이 아님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넷째, 작은 소탑들이 여럿 보인다. 백만의 소탑(원형 목탑)을 지어서 열 개 사찰에 나누어서 봉안했는데,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호오류지에서 출토된 4만 5천 7백여기 뿐이라고. 호국을 위한 방편으로 그 탑속에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모셨다. 그런 점에서 불국사 석가탑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석가탑에서도 무구정광다라니경이 출토되었으니 말이다.

며칠 후, 오사카 텐노지(天王寺) 내 현대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쇼토쿠 태자전’을 관람하였다. 대단했다. 나는 아들의 손을 꼭 잡는다. 여기서 잃어버리면 큰 일이기 때문이다. 우린 인파에 떠밀려 다녔다. 일본의 역사를 통틀어서 오늘날까지 일본 국민들로부터 쇼토쿠태자가 얼마나 높이 추앙받아 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쇼토쿠 태자와 관련한 유물, 서적, 불상, 성덕 태자상 등 거의 전부를 모아놓은 것같다. 특히 후대에 계속적으로 제작된, 다양한 모습의 태자상(太子像)이 인상 깊다. 이른바 ‘태자 신앙’이라 할 만한다. 왜 그렇게 태자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일본 사람들이 현재의 경제적 난국을 성덕 태자에 의지해서 극복하려는 것”으로 풀이하는 성낙주 선생의 글을, 나는 귀국 후 읽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불교는 우리 불교를 되돌아보고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한 비교의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일본 불교사 공부가 필요함을 다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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