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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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정통수행/김호귀☞▷

응용수행의 실태와 문제점/안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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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용수행의 실태와 문제점
-기복 불교와 제3 수행법
안승준/ 불교대학 강사

간화선 체계에 대한 두 가지 도전

한국 불교는 간화선 체계를 종지로 세우는 조계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간화선 체계를 중심으로 하는 종지에 대한 믿음은 승속을 불문하고 어느 정도 보편화 되어 있고 한국 불교에 대한 자긍심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편리함이 산속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승가의 검약한 무욕의 정신이 지탱해 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기가 매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른바 간화선 체계의 전통을 이어오는 선승들을 만나면 승가의 본래 정신이 풍기는 향기를 만나는 듯하다. 바로 검약과 무욕의 실천자들이 그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존경할 만한 스승들이 우리곁에 가까이 있다면 한국 불교의 미래는 결코 어둡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와는 달라서 우리 곁에서 검약과 무욕의 향기는 거의 사라져 버린 듯하고 그 아름다운 전통에 대한 되살림의 노력도 좀처럼 찾아보기가 어렵다. 스스로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간화선에 대한 자랑스럽고 적극적인 논의로 채워져야할 교계의 신문들을 보면 그러한 기대와는 달리 전혀 엉뚱한 논의들이 난무한다. 이른바 기복 불교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고, 제3 수행법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이들 논의에서 간화선을 옹호하는 입장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압도적이라면 한국 불교의 정체성으로서의 간화선 체계에 대한 되살림의 몸짓으로 잘 회향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간화선 옹호론자의 입장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고 수세에 몰려있다고 판단한다면 풍향계는 간화선 체계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 교계의 논지를 종합해보면 풍향계는 위기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정체성의 위기를 느끼지 못하거나 느끼더라도 안일하게 대응한다면 그 위기는 가속화 될 수 밖에 없다. 지금 한국 불교 정체성의 위기를 나타내는 풍속계가 점점 가속도를 더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결코 소수가 아닐 것이다.

기복 불교의 도전

기복이란 글자 그대로 복을 비는 행위를 말함이니 물욕과 탐심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 어렵다. 반면에 불교는 실천적으로 물욕과 탐심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기복과 불교는 이율배반적이다. 기복 불교라는 말은 기복이 불교로 승화된 것이 아니라 불교가 기복으로 타락한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해탈을 열망하는 수도자에게 중생심이 있듯이 불자들 중에도 기복형태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바른 형태의 신앙으로 안내되기 전의 부득이한 일시적인 양태로서 인정될 수 있을 뿐 정상적인 신앙의 형태로 인정될 수는 없는 일이다. 기복신앙의 형태는 현실에 있어서 잠재적으로 인정되지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장려하는 일은 불교의 정상적인 신앙에 대한 반역이며 도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기복 불교의 신앙 형태가 이미 불교 안에 수용되어져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의 성립 요소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불교 안에 있는 항존하는 불교의 도전 세력이다. 불교 신앙 형태상에서 이 기복적 성향이 강하게 유행하는 시대는 불교가 타락하는 시대의 흐름과 궤를 함께 한다. 반면에 이 흐름에 대한 반성적 자각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불교역사는 르네상스적인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음 시대에 맞이하고픈 불교는 당연히 타락한 불교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이미 기복의 형태는 타락이라고 불릴 만한 경지에 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개선함으로써 우리는 다음 시대에 불교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기복 불교의 신앙 형태가 이미 조계종 안에 간화선의 종지와 함께 현실적으로 공존하고 있지만 그것은 항상 내부에 존재하는 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기복 불교라고 하는 내부의 항존하는 도전에 대해서 항상 깨어 있는 방향으로 교육과 포교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것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한다는 태도는 현실적으로 승려와 신도를 물욕과 탐심에 젖어들게 하고 불교의 타락을 불러올 뿐이다.

불교 교리에 대해서 무지하여 기복의 신앙 형태를 취하는 불자는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불교에 대해서 바른 믿음을 일으키고 십선업의 가르침을 배운 자라면 기복은 철저히 타파해야만 하는 악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복은 바로 이기심의 드러남이며 이기심을 자라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인과의 도리에 대한 무지를 나타내는 것과 동의어라고 말해도 좋다. 기복을 장려하는 일보다는 인과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 불제자의 도리임을 모르는 승려와 포교사가 있다면 참 희한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제3 수행법의 도전

한편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불교 밖에서 움직이는 도전 세력이 있다. 현행의 매스컴에서는 그 세력들을 총칭하여 제3 수행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이 간화선 체계에 대한 제3의 도전 세력이다. 한국 불교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이들의 도전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응전해야만 한다.

이들은 불교의 시대는 갔다고 공공연히 외친다. 불교의 교리와 수행법은 미완성이며 낡은 것이고 자기들의 교리와 수행법이 새롭고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최고의 경지가 아니라 하고 자기들이 스스로 더 높은 자가 되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들에 현혹되는 불자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있다. 어찌 저들만을 탓할 수 있으랴! 이 어찌 불교에 몸담은 수행자와 학자와 불자들의 업무태만이 아니랴!

우리가 제3 수행법이라고 부르는 저들의 수행법은 사실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모두 불교의 전통에서 흘러나간 방편의 체계를 저들이 임의대로 어설프게 얽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저들이 말하는 독창의 교리라는 것도 불교 전통에서 흘러나간 경전적 가르침의 단간들을 임의대로 조합하고 왜곡한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저들은 불교를 배반한다. 저들은 사문들의 청정한 수행법을 상업적으로 판매하여 중생들을 물욕과 탐심에 묶어둔다. 그리고 스스로 물욕과 탐심에 묶여 있다.

저들은 한국 불교를 타락한 기복 불교라고 매도한다. 저들은 스스로 불자라고 말하지 않지만 불교의 깨달음과 선정 수행의 체계를 자기들의 상품으로 판매한다. 저들은 한마디로 타락한 상업 종교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기복 불교와 마찬가지로 저들 타락한 상업 종교도 물욕과 탐심을 조장하는 업의 체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업 종교가 유행한다면 불교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도전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타락에서 유래한 것임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저들 중에는 타락한 기복 불교의 종단에 대한 반항 세력들이 가출하여 외도 세력과 야합하여 탄생한 사생아들이 포함되어 있다. 저들은 불교를 공격한다. 한국 불교의 신앙 형태를 기복 불교라는 이름으로 매도한다. 자! 이러한 시점에서 불자들이 기복 불교를 옹호한다면 불교의 정체성은 저절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한국 불교는 내부적으로 상존하는 기복 불교의 도전에 대하여 그리고 외부적으로 닥쳐오는 상업 종교의 도전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응전해야만 한다. 물욕과 탐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간화선에 매진하던 선사들의 검약과 무욕의 전통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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