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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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정통수행
김호귀/ 불교대학 강사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수행과 깨달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 수행 가운데 대표로 언급되는 것이 좌선 수행이다. 좌선 수행은 석존 시대 이전부터 보편적인 수행 방식이었다. 이것이 불교 수행의 정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석존이 깨달음의 방식으로 채택한 이래 불교의 중요한 수행 방법으로 응용개발되어 왔다. 특히 후대에 전승된 전통적인 참선의 수행 방식으로는 지관(止觀), 위빠사나, 간화선(看話禪), 묵조선(默照禪)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가 있다.

지관 수행

지(止)와 관(觀)은 불교의 독자적인 낱말로서 붓다의 선정은 지와 관을 그 내용으로 한다. 지는 마음을 통일하는 것이며 적정의 경지에 달하는 것이다. 관은 지에 의거하여  몸과 마음의 현상으로부터 그 본성을 보며 연기의 법과 삼법인 등을  관조하고 일체중생의 구제에 마음을 쓰며  견성하여 생사 없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석존은 지의 상태에서 관에 나아가 그 상태가 항상 유지되지 않으면 진정한 선정이 아니고 참된 해탈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지관은 크게 마하지관(摩訶止觀), 석선바라밀차제선문(釋禪波羅蜜次第禪門), 육묘문(六妙門)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것을 3종 지관이라 한다. 마하지관은 원돈지관(圓頓止觀), 차제선문은 점차지관(漸次止觀), 육묘문은 부정지관(不定止觀)으로 불리운다.

좌선 속에서 지관 수행을 권장하는 이유는 행(行). 주(住), 좌(坐), 와(臥)의 행위 가운데 좌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지를 수행하는 방식으로는 초심의 추란(駝亂)을 대치하기 위한 지관, 마음이 부침하는 병을 대치하는 지관, 편의에 따라 수행하는 지관, 정중(定中)의 세심(細心)을 대치하는 지관, 정혜(定慧)를 균제하게 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지관 등 5종이 있다.

그리고 관을 수행하는 데에는 대치관(對治觀)과 정관(正觀)의 둘이 있다. 대치관은 부정관(不淨觀)으로 탐욕을 대치하고, 자심관(慈心觀)으로 진에(瞋等)를 대치하며, 계분별관(界分別觀)으로 아집을 대치하고, 수식관(數息觀)으로 이것 저것을 찾아 구하는 마음을 대치하며, 인연관(因緣觀)으로 어리석음을 대치하는 5정심관(停心觀)을 말한다. 그리고 정관이야말로 천태지관이 설하고 있는 요점이다. 제법의 실상을 관하는 지혜이다. 止의 방법으로 망념이 그치지 않을 때에는 心이 일어나는 곳에 따라 관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

위와 같은 공덕을 지닌 지관 수행에 있어서 특히 관법 수행에 해당하는 위빠사나에서는 수행의 대상을 대표적으로 사념처(四念處)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남방 상좌부의 전통에 이어 현재에도 널리 응용되고 있다.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는 마음을 집중하는 네 가지 대상으로 사념처를 들고 있다. 몸을 관찰하는 신념처(身念處) 수행법, 감각(느낌)을 관찰하는 수념처(受念處) 수행법, 마음을 관찰하는 심념처(心念處) 수행법, 법을 관찰하는 법념처(法念處) 수행법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사념처 수행은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에 전심 전력을 다하여 명확히 알아차리는 것이다. 정진력, 마음 집중, 분명한 앎이 사념처 수행에 필요한 특성이다. 특히 몸을 관찰하라는 것은 몸을 관찰할 때 그 관찰의 대상은 몸이고, 감각의 관찰은 그 대상이 감각이며, 마음의 관찰은 그 대상이 마음이며, 법의 관찰은 그 대상이 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신념처의 수행은 호흡과 몸의 구성요소와 몸의 움직임 등에 대하여 주의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신념처 수행이 물질적인 대상에 대한 마음집중이었다면 수념처 수행의 대상은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감각(苦, 樂, 不苦不樂)을 관찰하는 것이다. 심념처 수행은 늘상 변화하는 생멸의 속성이 있는 마음에 대하여 그 움직임의 모든 현상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진정한 고요를 성취하는 것이다. 법념처 수행의 대상은 진리(法)에 대한 관찰이다. 곧 개념적으로 받아들였던 법에 대해서 실천적인 수행을 하고, 부처님의 진리를 몸소 깨닫고 관찰하는 것이며, 법의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해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간화선 수행

좌선 수행의 다양한 발전은 중국 송대에 들어와서 간화선이라는 독특한 수행법을 창출하였다. 간화선이 등장하게 된 필연적인 근거는 아무래도 올곧은 수행을 진행시키기 위한 모색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초심자가 좌선에서 겪는 가장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망상으로 인한 산란심과 적적공무(寂寂空無)에 떨어지는 혼침을 쉽게 추스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산란심과 혼침의 두 가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제시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화두를 드는 것이다. 화두를 들고 있음으로 해서 화두에 전념하기 때문에 부산하게 일어나는 망상을 피우지 않게 되고 동시에 살아 있는 송장처럼 죽어 있는 듯 살아 있는 듯 하는 혼침도 제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두에 전념하여 話頭 일념의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산란심과 혼침을 발붙일 곳이 없어지고 만다. 이러한 산란심과 혼침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든다.

간화선 수행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간절하게 지속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화두 수행을 하는 기본적인 요소로서 예로부터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대신근(大信根), 대의단(大疑團), 대분지(大憤志)의 세 지가 필수적인 요소로 언급되었다.

첫째 대신근은 화두 자체를 믿음과 함께 화두를 제시해 준 스승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화두 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른다는 사실과, 화두 수행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기자신을 통째로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인과법만큼이나 명확한 명제이기도 하다. 다음 대의단은 대신근의 바탕 위에서 화두 자체에 대한 의문을 지니는 것이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지상의 과업으로서 화두를 들어 그것을 투과할 때까지 지속하는 치열한 구도 행위이다. 셋째 대분지는 위의 화두를 줄기차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정진이다. 단순하게 의문만 가지고는 오래 계속하지 못한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맹세 내지 오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화두를 들다가 죽을지언정 화두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고심참담한 노력이다.

묵조선 수행

묵조선의 수행도 간화선과 마찬가지로 중국 송대에 등장한 좌선 수행법이다. 그러나 묵조선의 수행은 본래부터 깨달은 존재라는 절대확신을 중시한다. 자신이 본래불임을 스스로 확인해 나아가는 방식임과 동시에 그대로의 현성이 곧 좌선이다.. 그래서 묵조선에서의 좌선은 깨달음의 내용이고 형식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중생의 입장에서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경우의 수행이 간화선적인 입장이라면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 깨달음의 유지라는 경우의 수행이 묵조선의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묵조에서 묵(默)은 몸으로서 조용하게 좌선하는 행위이고, 조(照)는 마음으로 항상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깨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묵조에서는 세상의 어느 것 하나라도 완전하게 깨달음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을 주장한다. 여기 현성공안에서 말하는 공안이란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의 의미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현성공안이란 말 그대로 일체의 진리가 숨어 있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간화선이 화두 참구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묵조선에서는 좌선 그 자체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간화선에서는 굳이 좌선이 아니더라도 화두일념(話頭一念)의 상태가 우선 요구되지만, 묵조선에서는 있는 그대로가 깨달음의 현성이기 때문에 좌선을 통하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선은 곧 깨달음의 현성이며 깨달음은 곧 좌선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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