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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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선사의 대비심
정유진 스님/ 불교문화대학 선학과 교수

보통 불교에서 스님들이 입적하면 유해를 처리하는 방법에 몇 가지가 있다. 즉 인도에서는 화장을 하는 다비가 있고, 티벳에서는 금수에게 사신(捨身)공양하는 조장(鳥葬)이 있으며, 중국에서는 유해를 습기가 없는 곳에 매장한 후 몇 년이 지난 뒤에 미이라가 된 시체를 그 대로 감실에 안치하여 생불로서 숭배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우두종의 법지(法持, 635∼702)나 지위(智威, 646∼722)선사는 자기의 유해를 날짐승에게 보시하여 먹게 하였다.

법지와 지위는 스승과 제자사이이다. 먼저 지위의 스승인 법지는 장안의 연조사에서 702년에 입적했다. 그가 임종시에 제자인 지위를 불러 놓고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시체를 소나무 밑에 두고 많은 새·짐승들이 먹게 하라.” 고 하면서 또 그 이유를 말하기를, “나는 살아 있었을 때 사람들을 정토세계로 이끌지 못했다. 그러니 제발 내가 죽으면 그 유해를 새·짐승들이 먹고 정토왕생의 원인이 될 수 있도록 하라.” 고 했다. 이러한 유훈을 이어받아 실천한 사람이 지위이다.

지위의 속성은 진씨이고, 강소성 강녕현 사람이다. 어렸을 때 어느날 지위가 갑자기 사라졌다. 부모가 사방을 찾아보니 지위는 이미 천보사의 통(統)법사에게 출가하고 있었다. 총명하기가 남달랐으며,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우두종 제4세인 법지선사를 사사하였다. 『속고승전』에 그의 용모과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얼굴은 보름달과 같이 온화하고 윤기가 흘렀다. 말씨는 청아하고 지혜와 덕은 난초와 같았다.” 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둥근달과 같은 온화한 얼굴과 복덕이 원만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개원10년(722) 2월 18일에 연조사에서 시적하였다. 지위도 그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유체를 금수들에게 먹이도록 유언했다.

이런 사신공양을 할 수 있었던 그들은 평소에 어떤 수행을 해왔는지 한번 살펴 보자. 『전등록』 제4권에 지위와 혜충의 문답속에 그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즉 어느날 지위가 제자인 혜충에게 묻기를, “본성은 본래 허공과 같다. 망념에 의하여 자기라는 생각이 생겨난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망념을 떨쳐버리고 공(空)의 세계로 되돌아 갈 수 있겠는가?” 혜충이 대답하기를, “허공이야말로 진실의 본체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망념을 없애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지혜의 배만 떠가면 됩니다.” 라고 했다.

우두종 계통의 선사들은 무상(無相)의 반야공사상을 토대로 하여 철저하게 반야공관을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평소에 항상 몸의 실상은 공하다고 관찰하면서도 그 관찰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스스로 공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리는 수행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지위의 물음에 본성은 마치 허공과 같은데 단지 망상에 의하여 나와 남이라는 것이 갈라진다고 했다. 사실 자기의 본체라는 것도 없는데 나와 남이 있다고 하는 생각은 망상 위에 또 하나의 망상을 더 붙이는 꼴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데서 자타와 내외가 갈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 혜충의 대답에 망념을 없애려고 할 필요는 없고, 단지 지혜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이 말속에 반야사상을 근간으로 한 선사상이 모두 녹아 있다. 망념을 끊고 지혜를 얻는 수행을 한 것이 아니라 망념을 그대로 반야의 지혜로 전환하는 실천을 한 것이다. 번뇌와 지혜를 둘로 갈라놓지 않고 하나로 만드는 이런 사상은 곧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나아가 일체의 삼라만상이 자기와 하나라고 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실천정신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만물일체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 지위이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금수들과 유희한 일들이 많다. 예를 들면 지위선사가 조용하고 한적한 산중에서 철야정진하고 있을 때 세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나자 그들과 같이 산책한 이야기나, 또 지위선사는 토끼 두 마리와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들이 항상 본전 앞에서 놀면서 선사를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금수들과 이렇게 친하게 지내 온 지위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만약 지위가 나라고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거나 그들을 헤칠 생각이 있었다면 짐승들이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번뇌망념을 완전히 비워 나와 짐승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중생과 부처가 하나가 된 경지이다. 일체 중생에게 자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만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인간과 짐승이 하나가 된 지위의 대비심은 철저한 반야공관의 실천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금수와 한 몸이 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죽어서도 그 유해를 금수에게 보시하면서 금수와 자기가 일체가 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분명히 천지동근 만물일체(天地同根 萬物一體)의 경지를 체득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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