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業을
청정하게 하자 이도업
스님/ 불교문화대학원장
오늘은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을 청정(淸淨)하게 하자는 법제에
관해 부처님 경전에 전해지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제자가 매일 먹은 것을 다시 씹는 되새김질을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는 스님들이
부처님한테 물었죠. “부처님. 저 스님은
왜 되새김질을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 비구를 보시더니 “저 사람이 전생에
소의 몸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러자 또 스님들이
“전생에 소였던 비구가 어떻게 현생에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습니까?”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저 사람은 전생에 소였을 때, 어느 날
풀을 뜯어먹고 있는 중에 부처님 경 조각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 경 조각을 먹지 않고
코로 훅 불어 날려버리고 풀만 뜯어먹었다.”
즉 부처님의 경전을 먹지 않고 코로 훅훅
불어 남겨둔 그 공덕이 얼마나 컸던지
사람 몸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전생과 금생이 있다는 윤회설이
포함되어 있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일회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전생에
자신이 소였기 때문에 금생에서도 매일
음식을 되새김질하던 소의 습관이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업이라는 것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얘기도 됩니다.
또
다른 일화를 얘기하자면 중국 당(唐)나라
시대에 ‘백장(百丈)’스님에 관한 것입니다.
백장스님은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다.”며,
하루를 무위(無爲)로 지내면 그 날은 굶는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수도생활을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백장스님은
백장산(百丈山) 절의 조실(祖室)스님 즉
사찰에서 최고 어른이셨고, 늘 한
달에 한 번씩 대중들을 모아서 법문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백장스님이 법문을
하실 때마다 수염이며 머리가 하얀 백발
노인이 항상 법문을 듣고 있었답니다.
하루는 문 뒤에 앉아 있던 노인이 갑자기
나와서 하는 말이 “스님. 사실은 제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오백 생을 지낸 여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백장스님께서
“그래. 네가 여우인데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다면 네가 무슨 일을 해서 일생이
아닌 오백 생 동안 여우의 몸으로 살게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노인이
하는 말이 “제가 사실은 오백 년 전에
이 큰절의 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수행을 하는 한 사람이 와서 절을 하더니
“제가 사실 알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 질문인즉
“선지식,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선지식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여겼는지라 “선지식은 인과(因果)에 불낙(不落)이니라.”
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노인이 말한 것을 잠깐 살펴보면
우매한 중생, 수행이 적은 사람
같으면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과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선지식 즉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일을 해도 나쁜 일을 해도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노인은 이 말 한 마디를 잘못을 해서 오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장스님께서 네가 다시 한번 나에게 그
질문을 해보라고 하였고 노인은 “선지식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물었습니다. 그러니
백장스님께서 “선지식은 인과에 불매(不昧)이다.”
그러니까 선지식도 인과에 떨어지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백장스님은 많이 수행한 사람은
인과를 모르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 한 마디로 그 노인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제가 오늘 몸을 바꿀 테니
내일 불법대로 화장을 잘 지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백장스님도 동의하시고 대중들에게
다비식(茶毘式)을 준비시켰는데, 사람들이
가보니 죽은 사람은 없고 큰 여우가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 이야기에서도 말 한
마디 잘못한 과보로 오백 생 동안 여우로
살았으니 업(業)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이
업의 속성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해서 처음에는
사람이 업을 짓고 그것이 반복된 습관으로
바뀌어 지고 그러면서 사람이 처음에 업을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업력이 생겨 업이
사람을 움직이게 됩니다. 또 그러한 업이라는
것은 불멸한 것이어서 전생에 풀을 먹는
소였지만 부처님 경전을 먹지 않은 공덕으로
해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여전히 되새김질하는
버릇이 남아있는 스님의 경우나, 선지식은
인과에 불낙이라는 말 한마디 잘못해서
오백 생 동안 여우 몸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경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하나 하나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법으로써 삼업을 청정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삼업은 신(身)·구(口)·의(意)
세 가지로 이루어지는 행위를 말합니다.
또 업은 습관 또는 버릇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좋은 습관을 지을 수도 있고 나쁜
습관을 지을 수도 있으며, 외적인 힘이
있어서 주고 뺏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생각으로도
많은 업을 짓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으로
짓는 업은 탐(貪)·진(嗔)·치(癡)가
됩니다. 즉 지나치게 욕심내고, 지나치게
화내고, 지나치게 어리석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을 맑고 청명하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야운(野雲)스님의
『자경문(自警文)』 속에서 첫마디가 “주인공아.
내말 잘 들어보아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아서 다 자기 자리에 앉았는데,
너는 어째서 지금도 업장 속에서 그렇게
괴로워하느냐?”고 얘기할 정도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것
즉 세상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연기법(緣起法)을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어울러져 사는 것이고,
이 우주 만물 전체가 열쇠고리 마냥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연기입니다. 그래서
집안을 평온하게 하려고 한다면 제일 먼저
내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안정이
되면 모든 일이 즐거워지고, 내가 괴롭고
불편하면 모든 것이 우울하고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행동하고, 말 한마디하는
것, 생각 하나 하는 것, 신(身)·구(口)·의(意)
이 세 가지를 맑고 청명하게 해야하는
데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본 마음을 잘 찾아가려면 열 가지를
잘 해야한다는 야운스님의 『자경문』에
담긴 말씀을 새겨본다면 방법도 있을 듯
합니다. 한두 가지 정도를 언급해 본다면
우리가 업을 깨끗이 하려는 첫 번째는
“연(軟)·미(美)·식(食)을
切莫受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살려면 대게는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하잖아요.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싶다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입니다. 또 좋은
것이란 참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점점
더 좋은 것을 찾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첫 번째는 너무
호위호식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둘째는 “내 것을 아끼지 말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재물에 대해서는 너무 인색하지 말라.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돈은 욕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죠. 그걸 아는
사람은 마음이 편할 것이며, 그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우리의 본 마음자리
찾는 방법의 세 번째로 “口無多言하고
身不輕動하라.” 하셨습니다. 몸을 가볍게
놀리지 말라. 말을 많이 하면 기가 많이
빠지니 적게 하고, 말을 적게 하되 생각이
많아져 번뇌망상이 많아지는 것을 주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섭고 불멸한 이 업을 맑고
청정하게 하는 방법으로 우선 생각을 맑고
바르게 하고, 말을 부드럽게 하며, 몸을
가볍게 움직이지 않고,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리고
재물과 색을 보거든 반드시 생각을 바르게
해야 될 것입니다. 또 타인의 과실 허물을
말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생물은 본래 부처님의 생명과 공덕과 덕을
가지고 있는데, 업이라는 것으로 인해
우리 본래의 불성이 가리워 불성이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조금씩
꾸준히 이 삼업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
정진한다면 우리 안의 본래 불성도 환희
드러나게 될 것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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