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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침의 땅, 보드가야
신성현/ 불교학과 연구교수

 보드가야는 인도 비하르 주의 가야 남쪽 약 11km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마을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소중하게 기억되는 것은 다름아닌 고타마 싯달타가 이 땅에서 붓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싯달타가 붓다로 거듭난 곳, 붓다라는 일반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게 된 곳이 바로 보드가야에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붓다의 일대기를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을 빌어 밝히고 있는 불전문학은 어느 성지보다도 깨침의 땅, 보드가야에 대하여 많은 의미를 부가하고 있다. 그 옛날 현장(玄斡)과 법현(法賢)도 순례했으며 오늘도 붓다의 어느 성지보다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순례자와 참배객이 고생을 마다 않고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고타마 싯달타는 어떻게 하여 보드가야에 왔으며 깨닫게 된 것일까? 그가 보드가야에 오게 된 것은 여러 스승을 찾아 헤매던 중 그들 가르침에 더 이상 만족을 느끼지 못했을 때였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의 수행을 위해 이곳 우루빌라 마을에 찾아오게 된 것이다. 싯달타는 니련선하(尼連禪河)의 건너편 우루빌라 마을의 고행림(苦行林)에 자리잡았다. 당시 이곳에는 20,000여명에 이르는 수행자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수행을 결심한 싯달타는 인간으로는 견디기 힘든 혹독한 고행을 시작하였다. 그 고행으로 몸은 여윌 때로 여위었다.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간 채, 뺨에는 가죽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깨달음은 쉽게 찾아들지 않았다. 고행과 단식이 열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그는 니련선하 강가에 내려가 몸을 씻었다. 이는 고행과 단식의 종식을 의미한다

그때 니련선하 강가에는 우르빌라 지방 성주의 딸인 수자타라는 소녀가 그에게 유미죽을 공양하였다. 날마다 유미죽을 공양받게 된 싯달타는 기력을 회복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교진여 등 다섯동료 수행자들은 “싯달타는 이제 타락하고 말았다.”라고 말하고는 그를 떠나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보드가야의 금강좌(金剛座) 아슈밧타나무 아래에 자리를 정한 싯달타는 길상(吉祥)이라 는 사람이 준 풀을 자리에 깔고 스스로 이렇게 다짐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나의 육체가 소멸되어도 좋다. 다만 어느 시대에도 그 누구도 얻기 어려운 일체지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이곳에서 악마(Mara)를 항복시키고 홀연 깨달음을 얻었다. 정각(正覺abhisambodhi)을 이루어 붓다(Buddha)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우리는 항마성도(降魔成道)라고 한다. 마하박가(Mahavagga)에서는 깨침의 순간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다.

 

“고요히 명상에 잠긴 수행자에게

 진실로 법칙이 드러났다.

 그 순간 모든 의심이 사라졌으니

 원인의 소멸을 알아낸 것이다.”

     

세존께서는 그날 밤이 끝나갈 무렵에 다시 연기(緣起)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다.

 

무명(無明)에 기대어 행(行)이 있고…

유(有)에 기대어 늙음·죽음·슬픔·눈물·괴로움·근심·갈등이 한꺼번에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이 괴로움의 뿌리들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무명에서 탐착을 없애면 무명은 남김없이 사라진다.

무명이 사라지므로 행이 사라지고

유가 사라지므로 생이 사라지고

생(生)이 사라지므로 늙음·죽음·슬픔·눈물·괴로움·근심·갈등이 사라진다.

 

그 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다.

“고요히 명상에 잠긴 수행자에게

진실로 법칙이 드러났다.

태양이 허공에서 작열하듯이

악마의 군대를 마침내 쳐부순 것이다.

 마침내 기나긴 구도의 길은 이렇게 하여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날을 남방불교에서는 바이샤카월 보름날이었다고 하며, 한국에서는 12월 8일 성도일이라고 하고 있다.

 붓다의 성도(成道) 후 B.C. 250년 마우리아 왕조 아쇼카왕은 이곳 보드가야를 찾아 금강좌(金剛座) 자리에 사원을 건립하였으니, 이것이 대보리사원(Mahabodhi Temple)이다. 또한 곳곳에 석주 및 승원을 세우고 사원 및 보리수 주위에 돌담을 조성하였다. A.D 5세기 경 굽타왕조 시대에 대보리사원은 중축되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그 후 역사의 뒤안길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한때 힌두사원으로 바뀌었다가 무슬림(Muslim)의 침공으로 대답주변의 성지는 파묻혀 버리고도 하였다.  1847년 미얀마의 왕은 인도정부에 이 곳 사원을 중수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많은 사람을 파견하여 복원작업에 힘쓰기도 했다. 이후 1880년 컨닝햄(Cunningham)의 발굴작업과 함께 1884년부터 인도정부는 이곳의 발굴 및 재건사업을 떠맡게 된다.

 한편 1851년 에드윈 아놀드경의 격려 속에서 아나길카 다르마 팔라는 마하보디 소사이어티(Mahabodhi Society)를 건립하여 인도정부에 성지 복구를 위한 허가를 요청했으나 인도의 영국 총독부는 이 지방 영주인 힌두교도의 손에 넘겨줘 버렸다. 그 후 60년의 법적 소송 끝에 대보리 사원은 불교도의 소유로 인정되었다, 1953년에는 보드가야 경영위원회가 발족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불교도의 소유로 다시 인정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세계문화유산 복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금도 수많은 불교도가 그곳을 순례하여 다시금 구도심을 불살리며 그들도 붓다처럼 깨치기를 서원하며 정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의 빛이며 희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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