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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불심
곽대경/ 경찰행정학과 교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세에서의 지극한 수양과 보살행을 통해 성불을 할 수 있다는 불교의 교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중생들에게 스스로의 생활을 반성하고 정진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매일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쉽게 나태해지는 우리들에게 있어 항상 불도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생각을 바로 하고, 조그마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서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자신의 수도정진에 힘쓰는 자세를 변함없이 유지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실천하기 어려운 인고의 경지를 뜻함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다행히도 불교와의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시며 평생을 불자로서의 바른 자세를 몸소 실천해 오신 부모님을 가까에서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에 그 경험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어머님은 지리산 자락인 산청지역에서 대보살로 다른 신도들에게 존경을 받던 증조외할머님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사찰을 방문하고 참배를 하는 생활을 계속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님과 혼인을 한 이후에 어머님은 아버님과 함께 불교신자로서의 길을 걸으며 서로의 신행생활을 격려해 주는 동반자의 역할에 충실하셨다. 어머님이 불교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 부처님에게 약속한 일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모녀삼대에 걸친 불사를 끝내 마무리하신 일이다. 어머님이 태어난 지리산 자락의 산청지역에는 은숙봉밑에 자리한 심적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6·25동란 때 그만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해가 지고 밤이 되면 빨치산들이 내려와 진을 치니까 국군들이 부처님 상만 내리고는 절에다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어머님의 기억에 따르면, 어렸을 적에 심적사는 도량이 좋아서 기도를 하면 성불할 수 있는 훌륭한 수양터라는 이야기를 증조외할머님으로부터 듣고 자랐다고 한다. 여하튼 심적사가 소실된 이후 산청지역을 비롯한 서부경남지역의 여러 불자들이 몇 번에 걸쳐 그 절을 복원하려는 불사를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까이 여기셨던 증조외할머님은 심적사복원의 원을 외할머님에게 부탁하시고 돌아가셨고, 슬하에 10남매를 키우셨던 외할머님께서는 자식들 중에서 특히 불심이 깊었던 필자의 어머님에게 심적사 복원의 대불사를 이루는데 앞장서서 기도를 올리고 뜻을 같이 하는 불자들에게 동참할 수 있도록 권유할 것을 청하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진주지역의 다른 보살님들과 힘을 합쳐 30평 정도 되는 요사채 하나만이라도 우선 지어 보겠다는 원을 세우고, 철따라 삼천포에서 멸치를 트럭으로 가져와 보살들에게 판매한 수익금을 적립하고, 대나무광주리를 판 돈을 모았으며, 글씨가 뛰어나거나 달마도를 잘 그리시는 분들의 작품을 불자들에게 소개하고 시주를 받기도 하는 등의 노력으로 한푼 두푼을 쌓아 갔다. 결국, 여러 해 동안의 정성으로 요사채가 완성되었고, 그 후 심적사는 주지스님과 여러 불자들의 수고 덕분에 이제는 어엿한 도량으로 복원되어 많은 신도들이 찾는 마음의 수양처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심적사를 복원하는 불사를 진행하던 당시에 어머님은 붓글씨를 잘 쓸 수 있었다면 작품을 통해 보다 많은 시주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 하셨는데,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씨공부를 시작하여 경북 김천의 청암사에 있는 승가대학에서 스님들에게 사경(寫經)지도를 하고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정성껏 쓴 병풍작품을 불교신도들에게 보급할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하셨다. 그리고 주위의 다른 보살님들에게도 함께 불경공부를 권유하시고 불교경전에 많이 쓰이는 한자를 골라서 어느 스님께서 엮어 놓은 불교천자문을 사경을 연습할 수 있는 체본으로 만들어 많은 불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이러한 어머님의 노력은 지리산 중턱에 자리한 길상선사에서 새로 마련한 법당의 부처님을 모실 때 진주지역의 여러 보살님들과 함께 부처님의 복장내부에 정성껏 준비한 사경들을 봉헌하는 불사를 마무리하며 빛을 발하였다.

글씨를 통해 보시를 하는 일들 중에서 어머님이 무엇보다 애착을 가지신 일은 불경을 필사한 병풍을 사찰에 모시는 일이었다. 어머님은 심적사, 대원사, 문수암, 상무재, 그리고 부산의 광명사 등에 병풍보시를 하셨는데, 특히 법개사에 병풍보시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셨다. 산세가 웅장하고 기운이 넘치는 지리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법개사가 보궁으로 승격된 후에, 복원불사를 하고 낙성식을 하게 되었는데, 주지스님의 부탁으로 어머님은 금강경병풍을 정성을 다해 완성하셨고, 이렇게 좋은 사경작품은 그냥 사람이 지고 나르는 것이 격에 맞지 않다며 주지스님이 대절한 헬기를 타고 아버님과 함께 낙성식에 참석한 일을 무척이나 보람된 일로 기억하고 계셨다.

그런데, 주변의 모든 분들에게 좋은 일만 하려고 애쓰며 살아오신 어머님에게 뜻하지 않게 병마가 찾아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어머님은 저승에서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심부름꾼으로 쓰고 싶어 빨리 부르는 모양이라는 농담으로 주변 사람들을 오히려 달래주셨지만, 초인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견디신 삼 년간의 복강암투병생활은 극심한 고통을 오로지 불심에 의지해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참아내시려 애쓰신 나날이었다. 다행히 여러 번의 지독한 항암치료를 견디는 도중에, 꿈에서 음식을 받아먹고 배가 든든해지는 느낌이 드는 성몽(聖夢)을 꾸신 후에 일시적으로 건강상태가 나아진 것을 어머님은 부처님의 가피를 받은 것으로 믿으시고 부처님의 은덕에 감사하기도 하셨다. 이 때 주위에서는 그 동안 수십 번의 삼천배를 하신 기도의 가호를 입었다고 하시고, 사경(寫經)한 공덕으로 사경(死境)을 헤매다가 다시금 생을 얻게 되었다고도 하셨다. 여하튼 어머님은 다시 청암사에서 스님들에게 사경지도를 하게 된 것을 무척이나 기쁘게 생각하시며 그 동안 쾌유를 기도해 주신 청암사의 스님들을 고맙게 생각하셨다. 하지만 병이 재발하여 결국 어머님은 지난해 말에 우리 곁을 떠나가셨고, 어머님의 칠제는 그 동안 인연을 맺은 사찰들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려는 의도에서 심적사, 길상선사, 청암사, 그리고 송광사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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