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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선택을 하자
윤세원/ 정치학 박사, 인천전문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정부 수립 이후 우리는 대통령의 임기 말만 되면 언제나 유사한 내용인 공존의 난맥상을 경험한다. 이는 ‘같은 화살을 같은 곳에 반복적으로 맞는 어리석음’의 비유를 연상케 하는 일이고, 매번 문제의 핵심은 권력의 남용과 사유화 그리고 그 부작용이다. 사실 정치권력이 남용되거나 사유화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의 정치권력이 아니다.

힘과 정치권력은 그 속성이 전혀 다른 것이고, 힘의 획득능력과 통치능력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정치권력이란 공공적 공존생활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행사되는 힘, 즉 정치를 가능케 할 목적으로 행사되는 힘이다. 정치권력은 이와 같이 ‘내재적 목적과 존재이유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중립적일 수 없다. 정치를 힘의 현상으로 본 사상가로는 Thomas Hobbes가 효시일 것이다. 그의 이론은 중립적인 정치적 자원의 소유와 사용기술 등이 통치능력과는 범주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오늘날 민주정치의 기본 골격은 John Locke의 사상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는데, 그의 모든 정치적 사유의 토대는 ‘피치자의 同意’이다. 통치의 기능과 여기에 소요되는 힘의 원천도 바로 피치자가 동의한 계약상의 조건에 의하여 생긴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서 통치능력을 찾는다면 그것은 ‘계약상 합의된 한계 내에서의 힘의 행사능력’일 수밖에 없고, 여기에는 개인의 적성이나 능력의 차이가 고려될 여지가 없다.

2. 통치와 통치자질

고전적 정치사상가들에게 있어서 통치자질 혹은 통치적성이라는 주제는 매우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테마였다. 그러나 사회계약론이 Locke를 거쳐 철학적 자유주의라는 사상체계로 자리잡으면서 논의의 중심은 피치자의 동의라는 테마로 옮아갔고,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실증주의 정치학의 등장과 더불어 이는 잊혀진 주제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의 ‘목적과 존재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통치란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사용하는 것이며, 그 내용은 공공적 공존생활의 목적을 설정하고, 추구하며, 그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다. 요컨대 통치자에게는 힘과 공공적 공존생활의 목적에 대한 논리체계를 수립할 수 있는 지적능력 그리고 공공성의 유지능력이 필요하고, 통치자가 사용하는 힘은 이를 위한 것이다. 통치가 공공성의 유지에 실패했을 경우, 그 정치권력은 자주성이 없거나, 정치권력의 非公共化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대통령의 임기 말이면 어김없이 불거지는 아들 내지 측근들의 문제는 바로 이 정치권력의 사유화(비공공화) 현상에서 초래된 결과들이다.

3. 연기론적 통치자질론

불교의 경전 속에는 정치적인 사유와 연결되는 내용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국가 혹은 통치권의 기원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택스트가「起世因本經」이다. 이 경은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공존이 가능한 상태로의 전환을 위하여 공공적인 힘의 사용이 필요하였고, 이 필요에 의하여 통치자가 출현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국가 혹은 통치권의 기원과 통치권력이 아무렇게 사용되는 힘이 아니라 공존을 가능케 하기 위여 사용되는 힘임을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한편 「轉輪聖王獅子吼經」에는 최고 통치자의 이상적인 통치자질과 내용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 經은 통치자는 일단 존재하는 상황을 상정한다. 선출된 통치자나 존재하는 통치자에 관계없이 통치능력을 소유한 통치자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비록 ‘통치자를 선정하는 합리적인 제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轉輪聖王이라는 개념은 힘과 머리와 감성이 동일 인물 속에 통합되어 나타나는 이상적인 통치자질의 전형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이상적인 통치자상은 붓다 이전부터 이미 그 맹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 불교도들은 이 이상적인 통치자를 상징하는 불교 이전의 용어와 관념이 연기론적인 세계관과 내적 일관성이 유지되게 그 개념을 발전시켜 왔고, 이 과정에서 아쇼카왕의 통치라는 위대한 역사적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 經에 언급된 통치 및 그 자질과 관련이 있는 내용과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세습적 王權도 혈통만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이 지적은 세습적 왕권이 확립된 당시로서는 폭군방벌론으로 발전될 소지가 있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통치자가 권력 사용에서 공공성을 상실하거나 무능하면, 전륜성왕의 상징인 금륜(金輪)이 스스로 사라진다. 이는 왕권의 세습적 정당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고, 통치자의 권력과 도적의 두목이 행사하는 힘 사이에 차이가 없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통치자의 일차적인 직무는 백성들이 오계를 지키도록 하여 도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정치권력이 단순한 힘의 사용이나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내재적 목적과 존재이유를 갖는 것임을 의미하며, 여기서 불교도의 개인윤리규범인 오계가 기능적인 측면에서 정치·사회적 윤리로 그 외연이 확장된다.

셋째는 경제적 안정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을 구축하는 중요한 요인이고, 넷째는 사회문제의 해결이나 죄악의 근절은 경제적 조건의 개선이 아닌 처벌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공공적 공존생활, 즉 ‘도덕적 사회의 건설’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공존질서의 정책방향을 예시해 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전륜성왕 개념의 발전과정에는 ‘지금 여기에서’ 정의(정법)가 실현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서원이 깔려 있다. 正法이 실현된다는 것은 공공적 공존생활이 가능한 공존질서가 형성·유지됨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최소한의 조건이 不殺生·不偸盜·不邪淫·不妄語·不飮酒 倫理의 실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은 통치가 구체적인 목적과 방향을 갖는 것이고, 그것을 담당하는 통치자는 ‘힘과 머리와 공공성 유지라는 서원’을 겸비해야 제대로 된 통치를 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불교는 고(苦)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가르친다. 붇다의 가르침이 생노병사라는 근본고로부터 중생을 해방시키고, 전륜성왕의 서원적 치국이 공존의 난맥상이라고 하는 社會苦로부터 중생을 해방시킬 때, 비로소 모든 苦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불교의 원대한 목표가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전륜성왕이란 연기론적 안목과 자비의 윤리관으로 무장된 지적능력이 뛰어나고, 권력행사에 공공성 유지라는 서원을 가진 통치자를 일컫는 용어이다. 이러한 치자의 자질은 정치의 존재이유에 비추어 볼 때, 치자에 대한 시공을 초월한 요구이다.

통치자, 즉 대통령이 되는 길은 ‘피치자의 더 많은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서 현재까지 동원되어 온 자원은 지연, 학연, 민주화 운동의 경력, 달변, 재력, 물리적 폭력 등이었지만, 기실 이러한 자원들은 힘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은 될지언정 정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또 연말의 대선이 다가온다. 후보자들은 거창한 공약들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후보자들이 제시한 공약에 얼마만큼 생명존중과 자비의 정신이 반영되어있는지, 그리고 여러 공약들이 상호 모순 여부와 또 공약의 실현 가능성 여부 그리고 후보의 과거행적에서 공사의 구분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철저히 검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같은 화살을 다시 맞을 가능성을 최소화시키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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