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호 표지

이달의 법문/ 도원 큰스님

집착하지 말고 살자 ☞▷

정각도량/ 이도업 스님

난(蘭)에서 배운다 ☞▷

특집/ 선재들의 발원문

부처님의 영험/박주천☞▷

어머님께서 일깨워 주신 자비심/권종희☞▷

수행의 길/ 이법산 스님

조왕 기도☞▷

고승의 향기 / 정유진 스님

몸으로 보여준 불법 생활☞▷▷

경전의 말씀/ 박인성

우리 기억 속의 지는 꽃☞▷

일주문/ 능원 스님

배경을 보는 눈☞▷

불심의 창/ 강지숙

부처님 뵈러 가게 감기야 물렀거라 ☞▷

세계 문화 유산/ 한용수

중국의 막고굴 ☞▷

인터넷의 세계 불교/ 심재관

네팔-독일 필사본 보존 프로젝트 ☞▷

열린마당/ 윤귀진

삶 속의 불교 ☞▷

詩心佛心/ 이임수

도솔가  ☞▷

부처님 오신날 행사 안내

교계소식 ☞▷

동국동정 ☞▷

 

중국의 막고굴
한용수/ 중어중문학과 교수

2000년은 막고굴(莫高窟)의 제 17호굴로 명명된 장경동(藏經洞) 발견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많은 기념 활동과 학술회의 등이 개최되어 바쁜한 해이기도 하였다. 우리학과의 선생님과 학부학생, 그리고 교육대학원 원생을 포함한 15인은 중화민족의 역사와 문화 이해를 위해 그해 8월11일부터 8월20일까지 탐방의 길을 나섰다. 처음 가져던 기대처럼 힘들고 피곤함에 지친 여정에서 우리 학생들은 여행 결과에 대해 대단한 만족을 표시했고 중국에 있는 세계문화 유산의 자취를 돌아 볼 수 있음에 대단한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막고굴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 도시를 먼저 이해함이 옳을 것이라 여겨 먼저 돈황(敦煌)을 소개한다. 돈황은 중국의 북서쪽 감숙성(甘肅省) 하서(河西) 회랑 지대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감숙, 청해(靑海), 신강(新疆) 3성의 교차 지역으로 남쪽에는 기련산(祁連山)이 있고 북쪽에는 마종산(馬義山)이 있으며 동서 양쪽에는 고비사막이 있다. 해발 평균은 1,138m로 서쪽에서 동북으로 분지 평원의 형세로 기울어져 있다. 그중 오아시스는 전 면적의 4.4%이고 사막이 고비로 둘러 싸여 있어 고비사막이라 부른다. 돈황은 내륙에 위치하여 기후가 건조하다. 낮과 밤의 온도차는 크고 강우량이 적고, 증발량이 많으며 일조시간이 길고 4계절이 분명하다. 연평균 기온은 약 9.4도, 최고 평균 기온은 24.9도이고 최저 평균기온은 9.3도이다. 전 도시 인구는 15만명, 그중 농업 인구는 9.46만명이다. 총 인구중 한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회족, 몽고족, 장족(티벳), 유오이족(위구르), 묘족, 만주족, 토족, 토가족, 합살극족, 동향족, 유고족 등 11개 소수 민족은 1.06%를 차지하고 있다.

‘돈황’. 이 글자가 가장 먼저 출현한 곳은 『사기』(史記)로 대완열전(大宛列傳)에 “돈(敦)은 크고, 황(煌)은 번성하다.” 즉, 성대하고 휘황 찬란함을 가지는 의미로 해석했다. 역사적으로 돈황은 일찍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지로서 교통의 중심지였고, 외교적 국제도시였다. 또한, 서역의 군사 중요 지역으로, 중화 역사에 많은 족적을 남긴 찬란한 곳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약 4000 여년 전 요(舜)·순(禹)의 상고 시기부터 돈황은 인류 조상의 생활이 번성하였던 곳이라 했다. 춘추 시대의 돈황은 과주(瓜州)라고 불렀는데, 아름다운 과일이 생산되어 이렇게 불렀다. 이곳은 시대의 거듭된 변화를 거치면서 주인이 바뀌게 된다. 비록 많은 전란을 겪었으나 돈황의 경제와 상업은 나날이 번영하여 중원문화를 크게 전파하여 불교가 융성하였는데, 돈황은 오량(五凉) 문화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막고굴은 돈황 동남쪽 25km에 위치한 명사산(鳴沙山) 동쪽 기슭에 있다. 앞에는 탕천(宕泉)이 인접해 있고 동으로는 삼위산(三危山)을 향하고 있는데,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2년 전 5 개의 기본 석굴을 관람하는 입장료 68원(RMB)이 지금은 80원으로 10 여개의 석굴을 관람할 수 있는데 관람하려는 석굴에 따라 관람비용이 다르게 책정되어 있다. 이 입장료는 중국어 안내원이 함께 동행하는 비용이며, 또 다른 외국어 안내원이 필요하면 20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정말 이곳에서 가치있는 석굴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정보를 파악한 뒤 관람을 결정해야 가치 있는 막고굴 일부라도 관람할 수 있을 듯하다.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하는 막고굴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으며, 유적의 내용물도 가장 풍부할 뿐 아니라. 보존 상태도 가장 양호한 불교 유적지이다. 당(唐) 시대의 비문 기록에 막고굴은 전진(前秦) 건원(建元) 2년(366년)에 창건하여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1000 년간 끊임없이 동굴을 파고 상을 만들었는데, 북량(北凉), 북위(北魏),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唐), 오대(五代), 송(宋), 회골(回丹), 서하(西夏), 원(元) 시대에 걸쳐 상하 5층인 남북 1680m의 동굴을 이루었다. 현존하는 동굴은 492개에 이르고, 채색 인물상은 2.400여개, 비천상은 4,000 여개, 벽화는 45.000 평방미터에 이르며, 당 송시대의 목조 처마 5 개가 있다.

막고굴 각 동굴은 모두 다 채색된 소조와 벽화로 종합적으로 구성되었고, 동굴 건축 형식은 주로 선굴(禪窟), 중심탑주굴(中心塔柱窟), 불감굴(佛龕窟), 불단굴(佛壇窟), 대상굴(大像窟) 등이 있다. 소조와 회화가 결합된 채색소조는 주로 불, 보살, 제자, 천왕, 역사상 등이 있고, 벽화 내용은 넓고 풍부한 내용으로 불교 숭상, 불경고사, 불교 역사, 불경 변화, 신선과 요괴, 공양하는 사람, 장식 도안 등 7가지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고대 사회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조와 벽화 계통은 각 시대의 예술 풍격 및 변화 발전을 꾀하고 계승을 반영한 것으로서 귀중한 역사, 예술, 과학기술의 가치를 담고 있다.

막고굴에서 사문 낙준이 만들었다는 제 1호 석굴을 비롯한 초기 석굴은 현존하지 않고, 현존하는 석굴 중 가장 오랜된 것은 5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이다. 명사산(鳴沙山)에 천년 동안 굴을 파 사원을 만들었는데 30m가 되는 거대한 미륵상을 모신 석굴 사원도 있고 크기와 양식이 다양하다. 16호의 석굴 사원에서 17호로 명명된 장경동(藏經洞)은 청(淸) 광서(光緖) 26年(1900년)에 발견하였는데, 4세기에서 14세기의 문서, 자수, 비단 그림, 종이 그림 등의 문화재 5, 6 만여점을 출토했다. 이것은 국내외 학자로 하여금 대단한 관심을 갖게하여 유명한 ‘돈황학’이 형성된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자료는 대부분 한문으로 쓰여진 사본이고 소량은 각인본이었다.

한문으로 씌어진 사본중에 불교경전이 90% 이상이고 전통적인 經史子集(經史子集.漢籍의 전통적 분류법으로 경전, 역사서, 제자, 시문집을 일컬음)도 있으며, 진귀한 역사 자료가 포함된 관사문서(官私文書) 등이 있다. 한문 이외에 고장문(古藏文), 범문(梵文), 회골문(回丹文), 우전문(于猊文), 구자문(龜柴文) 등 많은 종류의 소수 민족의 문자도 있었는데, 돈황 문서의 발견은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역사, 지리, 종교, 경제, 민족, 문학, 예술, 과학 기술 등의 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12월 막고굴은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비록 이 유산은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었건만 이들 사료중 많은 자료가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것은 과거 청 나라의 무지한 태도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음에 있다. 지금에 이르러 그 중요성을 파악하고 그들의 문화의 정립을 위해 자료 복원을 위해 노력하지만 어느 시기에 막고굴 자료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을지 그 기대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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