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보여준 불법 생활 정유진
스님/ 불교문화대학 선학과 교수
요즘
사람들은 입만 열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최고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입으로만
똑똑하고 몸으로는 똑똑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입으로만 실천하고 몸으로는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살아 있는 일화를 한 토막을 소개할까
한다.
사찰에
가면 어떤 스님이 노송(老松)의 긴 가지에
앉아서 위험하게 좌선하고 있는 수상좌선도(樹上坐禪圖)를
종종 볼 수 있다. 소나무 위에서 좌선하고
있는 스님은 다름 아닌 조과도림(鳥貸道林,
741∼824)선사이다.
그의
전기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경덕전등록』권4에
선사는 절강성 부양현의 사람으로 성은
반(潘)씨이고, 그의 어머니는 일광(日光)이
입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이를 가졌으며,
태어날 때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찼으므로
어릴 때의 이름을 향광(香光)이라 불렀다고
한다. 9살에 출가하여 21살 때는 호북성
강릉현 형주의 과원사(果願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이어 장안으로 와서 서명사의
복례(復禮)법사로부터 『화엄경』과 『기신론』을
배웠으며, 또 복례법사는 두 경론의 내용을
요약한 ‘진망송(眞妄頌)’을 가르쳤는데
어느날 도림은 복례법사에게 이 진망송을
어떻게 마음으로 체득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자 복례법사가 한 마디의 말도
답변하지 못하자 도림은 교학자인 복례법사의
곁을 떠나 학림현소(鶴林玄素)의 제자인
경산도흠(徑山道欽, 714∼792)선사 밑으로
갔다. 그곳에서 대오하고 우두선의 종풍을
얻어 진망산(秦望山)으로 돌아와 소나무
가지에서 정진하다가 장경 4년(824) 2월
10일 앉아서 시적한 선사이다. 그리고
절강성 소흥현의 동남쪽에 있는 진망산은
수목이 무성하고 장송들이 울창하여 까치들도
많이 살고 있었는데 도림선사는 이 새들과
친숙하여 마치 친구처럼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작소(鵲巢)화상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선사의 일상생활 가운데 실천불교의
교육적인 의미를 담은 대화가 『조당집』
3권 ‘조과화상장’에 나온다.
어느날
조과선사가 장송의 긴 가지 위에서 좌선하고
있을 때 그 당시의 군수였던 백거이(白居易,
백낙천)가 진망산에 큰스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와 질문하기를,
백거이
문, “무엇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십니까?”
도림
답, “모든 악한 일을 행하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백거이
문, “이 정도의 말은 세 살난 아이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도림
답, “세 살난 아이들도 이 말은 다 알고
있지만 팔 십 먹은 노인도 이 말을 실천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라고
한 선문답 속에 도림선사의 철저한 실천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입으로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여러 가지
악한 일을 하지말고, 여러 가지 착한 일을
받들어 하라”고 하는 부처님의 이 가르침이
간단한 것 같지만 전심전력을 다하여 자기
자신이 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여 철저하게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간단하다고 하는 것은 머리로써
알고 있는 것일 뿐 몸으로써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아직까지 분별심으로
알고 있는 지식을 몸소 체험하여 생활의
지혜로 바꾸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아는
것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과는 별차원의
문제이다. 불교의 본질은 머리로써 이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데 있다.
행동은 몸으로 하는 것이지 입이나 머리로써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교 가운데
특히 선불교는 신체의 종교라고 단정지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지혜로운
삶이란 말 그 자체에서 시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일상생활의 신체적인 활동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즉
지혜로운 생활의 모습은 활동하는 가운데
나타나며, 또 일을 하는 도중에 새롭고
또 다른 지혜가 창출되는 것이다. 불법의
정신과 생활도 역시 일상생활을 벗어나서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불법의 정신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생활화하고 인격화하는 실천은 지식적으로
외워서 아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의 정신과 실천을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이 일상생활의 일을 통하여 구현해
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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