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호 표지

이달의 법문/ 도원 큰스님

집착하지 말고 살자 ☞▷

정각도량/ 이도업 스님

난(蘭)에서 배운다 ☞▷

특집/ 선재들의 발원문

부처님의 영험/박주천☞▷

어머님께서 일깨워 주신 자비심/권종희☞▷

수행의 길/ 이법산 스님

조왕 기도☞▷

고승의 향기 / 정유진 스님

몸으로 보여준 불법 생활☞▷▷

경전의 말씀/ 박인성

우리 기억 속의 지는 꽃☞▷

일주문/ 능원 스님

배경을 보는 눈☞▷

불심의 창/ 강지숙

부처님 뵈러 가게 감기야 물렀거라 ☞▷

세계 문화 유산/ 한용수

중국의 막고굴 ☞▷

인터넷의 세계 불교/ 심재관

네팔-독일 필사본 보존 프로젝트 ☞▷

열린마당/ 윤귀진

삶 속의 불교 ☞▷

詩心佛心/ 이임수

도솔가  ☞▷

부처님 오신날 행사 안내

교계소식 ☞▷

동국동정 ☞▷

 

어머님께서 일깨워 주신 자비심
권종희/ 불교문화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
현 동부한농화학(주) 전무이사

새로운 세기 새 천년의 시작이라는 기대로 모두 들떠 있던 99년 연말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에 가족끼리 모여 앉아 얘기하던 중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 녀석이 새로운 세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까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내 의견을 물어왔다.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단정적으로 얘기 할 수 없지만 가장 확실하게 일어날 일은 우리 가족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제일 어린 아들의 나이가 다음 세기 말이면 124살이 될 것이니, 의학이 얼마나 더 발전할 지는 몰라도 생존 확률은 거의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서였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삶을 영위해 간다. 그러나 자신이 바로 죽음에의 존재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과거의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주어진 미래는 보다 더 의미 있게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믿는다.

나도 주변의 수많은 죽음들을 보아오면서 그 죽음들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다른 죽음과의 관계는 적당히 사무적으로 처리해 온 것이 숨길 수 없는 실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내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해 줄 수도 없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은 나에게 엄습해 올 가장 확실한 사건이지만 언제 올 것인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죽음이든 평등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우여곡절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93년 5월 아버님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큰아들인 나에게는 운명하신 후 6시간이나 지난 후에 연락이 닿았고 병원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 사람들이 대신 장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 6남매가 모두 출가하고 시골집에서 어머님과 두 분이 기거하시던 중 마을 앞 도로에서 초보운전 차량에 받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던 것이다.

시골 선산에 장례를 치르고 가족회의가 열렸다. 나는 그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무절제한 내 생각과 생활의 방향이 바뀐 계기였던 것으로 믿고 있다.

어머님은 아버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결혼 후 열심히 노력하여 6남매 잘 기르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또 생전에 자기 묘역을 마련하여 알뜰히 가꾸면서 늘 당신이 어머님보다 먼저 죽는다고, 그리고 죽을 때는 오래 고생해서 자식에게 고생시키지 않고 갑자기 눈을 감는다고 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한다. 소원을 이루셨으니 슬퍼 할 것이 없다. 그러니 원망할 일도 없으니 사고 낸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 풀려날 수 있도록 해주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산청 경찰서로 갔으나 진주 검찰청으로 이첩되고 없었다. 검찰청으로 다시 가서 검사에게 뜻을 전했다. 한참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이상한 사건이라고 했다. 전부가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하고 한마디도 항변하지 않는 피의자를 보고 이상하다 했는데, 조건 없이 풀어 주라는 피해자까지 있다고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서류를 작성해주고 검사의 주선으로 진주교도소에서 가해자를 만났다.

면 소재지 다방의 종업원이었던 가해자는 계속 울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서 중고차를 사서 처음 집에 가는 길에 사고를 냈다고 했다. 가해자는 두 주일 후에 석방되어 아버님 산소에 분향하고 시골집에 찾아와서 어머님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용서를 구하고 어머님은 어깨를 두드리며 부모 잘 모시라고 당부 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그 후 어머님을 부산에서 4년 가까이 내가 모시고 살았다. 어느 날 목욕탕에서 세수를 하시다 칫솔을 물고 계신 채 집안 식구도 모르게 조용히 돌아가셨다. 며느리 손자 손녀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고맙다는 말을 늘 입에 담고 웃으시던 보살 같은 어머님을 왜 더 잘 모시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지금 가슴을 메어지게 한다.

98년 2월 공장에서 큰 폭발사고가 있었다. 작업을 지휘하던 간부직원 1명이 죽고 다른 2명이 중상을 입는 큰 사고였다. 그 뒤처리는 거의 사무적이었다. 냉정하게 이해타산을 따지고 유족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내게 견딜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1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그 사이에 많은 생각을 하면서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었다.

99년 1월 6일 결혼 25주년을 하루 앞두고 아내의 발원으로 아내와 같이 해인사 백련암에서 철야로 참회의 절을 하면서 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3년이 지났다. 50대 후반에 다시 학생이 되어 지금까지 생활에서와는 다른 많은 좋은 인연을 맺고 바른 가르침을 배우는 시간이 기다려지는 즐거움 속에 생활하고 있다. 열심히 참회하고 정진하여 바른 삶을 살고 어렵게 찾은 바른 길을 이웃에로 전파하는 포교사가 되기를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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