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호 표지

이달의 법문/ 도원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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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도량/ 이도업 스님

난(蘭)에서 배운다 ☞▷

특집/ 선재들의 발원문

부처님의 영험/박주천☞▷

어머님께서 일깨워 주신 자비심/권종희☞▷

수행의 길/ 이법산 스님

조왕 기도☞▷

고승의 향기 / 정유진 스님

몸으로 보여준 불법 생활☞▷▷

경전의 말씀/ 박인성

우리 기억 속의 지는 꽃☞▷

일주문/ 능원 스님

배경을 보는 눈☞▷

불심의 창/ 강지숙

부처님 뵈러 가게 감기야 물렀거라 ☞▷

세계 문화 유산/ 한용수

중국의 막고굴 ☞▷

인터넷의 세계 불교/ 심재관

네팔-독일 필사본 보존 프로젝트 ☞▷

열린마당/ 윤귀진

삶 속의 불교 ☞▷

詩心佛心/ 이임수

도솔가  ☞▷

부처님 오신날 행사 안내

교계소식 ☞▷

동국동정 ☞▷

 

우리 기억 속의 지는 꽃
박인성/ 불교학과 교수

봄날 우리 아파트 앞편 양달 속에서 목련꽃이 이제 막 피어나고 있습니다. 참 예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봄날을 살짝 열어 주기 때문인지 더욱 예뻐 보입니다. 그런데 바라보기가 두렵습니다. 예쁜 꽃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 보게 되어 있는데 바라보기가 두렵습니다. 봄날이 그렇게 가듯 바로 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피어나고 있을 때 그 아름다운 모습을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될 터인데 질 때 헤 벌어진 모습이 벌써 떠오르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언뜻 목련꽃은 다른 꽃들에 비해 일찍 지기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피는 꽃은 아름답고 지는 꽃은 추하다고 이미 단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뒤편 응달 속에서 목련꽃은 서서히 피고 서서히 집니다. 질 때도 필 때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는 꽃도 저렇게 고울 수가 있건만 우리는 지는 꽃에 눈길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는 꽃은 추하다고 미리 단정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지는 꽃은 눈길을 받기도 전에 저버림을 당하는 셈이지요. 이렇게 단정을 내리기까지 숱하게 지는 꽃을 보아 왔을 겁니다. 지는 꽃은 어느 하나 예쁘지 않았을 겁니다. 설사 지는 꽃이 예쁘다고 느꼈을 때가 있었을지라도 응달 속의 목련꽃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였을 겁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이기에 우리는 이 지는 꽃의 고움을 아주 쉽게 잊고 맙니다.

한 송이 목련꽃 자체는 피는 꽃이면서 지는 꽃이고 지는 꽃이면서 피는 꽃입니다. 꽃은 피었다고도 말하지 않고 지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피는 꽃이 아름다운지요? 지는 꽃이 추한지요? 숱하게 피는 꽃을 보았을 때 이 피는 꽃이 아름다워서, 숱하게 지는 꽃을 보았을 때 이 지는 꽃이 추해서 우리는 피는 꽃이 아름답고 지는 꽃이 추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단 한 번의 만남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끼지요. 우리 마음에 이미 분별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별이 기억을 만들어 내고 기억이 다시 분별을 만들어 내지요.

정녕 추한 꽃은 아름다울 수 없는지요? 용수(龍樹)는《중론(中論)》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있음과 없음을 보는 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을 보지 못하네”(제15장 게송6) 이제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네 기억 속의 지는 꽃을 지워 버려라. 그리고 이제 꽃을 고요히 바라보자. 어디까지가 피는 꽃이고 어디까지가 지는 꽃인가? 설사 피는 꽃이 있고 지는 꽃이 있다고 하자. 피는 꽃은 늘 아름답고 지는 꽃은 늘 추한가? 꽃은 인간이란 중동분(衆同分)의 마음에 나타난 꽃일 뿐이다. 그러니 네 기억 속의 지는 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닦아라.”

크레파스에 크레온들이 담겨 있습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 참 예쁜 이름들입니다. 똥색, 살색도 있습니다. 더 예쁜 이름들입니다. 똥색은 불똥, 별똥, 개똥, 개똥벌레를 연상케 하기에 귀엽고, 살색은 살결을 떠오르게 하기에 곱습니다. 살색은 황토 같은 우리 민족의 피부색을 생각나게 하기에 더욱 고와 보입니다. 귀여운 똥색은 건강한 사람의 똥이라면 그야말로 똥색이기에 나라, 민족, 인종의 차별이 배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딛고 사는, 우리를 품고 있는 이 땅마저 차별 없이 아우르는 정말 위대한 색입니다. 하지만 고운 살색에는 나라, 민족, 인종의 차별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이 살색은 오로지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의 피부 색, 몸 색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넓혀 보아도 이 살색은 몽고인, 중국인, 일본인 등 황인종의 피부색을 담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네팔인의 살색도, 파키스탄의 살색도 살색입니다. 우리의 살색은 다른 나라, 민족의 살색을 배척하는 살색일 뿐입니다. 마치 유럽인, 미국인이 우리 황인종을 배척하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분별과 기억에서 나온 이 살색이란 이름은 오로지 우리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이들은 추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살색은 피는 꽃의 아름다운 색이고 다른 이들의 살색은 지는 꽃의 추한 색인 셈이지요.

잘 살아 보겠다고 이 땅에 들어와 혹독한 환경 속에서 고되게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수십만의 외국인 노동자들. 우리에게 그들의 살색은 살색이 아닙니다. 살색은 오로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살색일 뿐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그들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6, 70년대에 손이 잘려 나가고 팔이 잘려 나가며 일을 했는데도 일터에서 쫓겨나간 우리 노동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으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6, 70년대에 우리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살색이란 이름으로 끌어안는 척하면서 학대했고 오늘날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살색이란 이름으로 따돌리면서 학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의 살색도 살색이라고 마음을 바꿔 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분별과 기억과 이름은 이렇게 단단하게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지요. 그러기에 용수는 《중론》에서 이렇게 과감하게 말합니다. “일어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같은 것도 없고 다른 것도 없다.”(제1장 귀경게) 이 말을 우리는 이제 이렇게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요. “피는 꽃과 지는 꽃, 똥색과 살색은 네 마음의 분별과 이름일 뿐이다. 꽃 자체는 피지도 지지도 않는다. 색 자체는 똥색도 아니고 살색도 아니다. 네 마음 속의 분별과 이름을 과감히 걷어 내거라. 그러면 꽃 자체와 색 자체를 볼 수 있으리라. 그러면 그 이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매이지 않게 되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은 마음을 닦아가는 길입니다. 해탈로 가는 길이지요. 그리로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지만 가야만 하는 길이지요. 아름다운 부처님 세상으로 가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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