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호 표지

이달의 법문/ 도원 큰스님

집착하지 말고 살자 ☞▷

정각도량/ 이도업 스님

난(蘭)에서 배운다 ☞▷

특집/ 선재들의 발원문

부처님의 영험/박주천☞▷

어머님께서 일깨워 주신 자비심/권종희☞▷

수행의 길/ 이법산 스님

조왕 기도☞▷

고승의 향기 / 정유진 스님

몸으로 보여준 불법 생활☞▷▷

경전의 말씀/ 박인성

우리 기억 속의 지는 꽃☞▷

일주문/ 능원 스님

배경을 보는 눈☞▷

불심의 창/ 강지숙

부처님 뵈러 가게 감기야 물렀거라 ☞▷

세계 문화 유산/ 한용수

중국의 막고굴 ☞▷

인터넷의 세계 불교/ 심재관

네팔-독일 필사본 보존 프로젝트 ☞▷

열린마당/ 윤귀진

삶 속의 불교 ☞▷

詩心佛心/ 이임수

도솔가  ☞▷

부처님 오신날 행사 안내

교계소식 ☞▷

동국동정 ☞▷

 

배경을 보는 눈
능원 스님/ 불교문화대학 강사

중세의 형식주의와 전통에 억압당하던 생활에서 해방되기를 시도해 보았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특징은 한마디로‘개인의 자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카톨릭의 교의(敎義)와 로마의 교황청이 서구 유럽인들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고 있었던 유럽의 중세사회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언이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자유로운 사고와 개성의 존중은 학문과 예술의 진보는 물론 경제적 발전도 현저히 이루어졌던 것이 그 후 유럽의 모습이었다.

‘르네상스’와‘종교개혁’은 개인과 문화의 진보에 기여했지만 그것은 교황의 권위와 억압에서 독립한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신(神)과의 결별이란 일면도 있었다. “나는 생각한다.”라고 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는 생각이 바로 그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한다는 기능을 지성이나 이성이라고 보고 프랑스혁명 때는 여자배우를 ‘이성(理性)의 여신(女神)’으로 꾸미고 축제를 열었다. 그때까지의 기독교 신(神) 대신에 ‘이성(理性)’을 제단에 받들어 모시는 시도였다. 철학분야에서는 ‘니체’가 “신은 죽었다”. ‘포이엘 바허‘는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적 바탕에 오늘날의 빛나는 문명이 이룩된 것도 사실이지만, 신으로부터 독립한 사람들의 아집(我執)은 서로와의 연대관계가 와해될 위험에 직면하게되었다. 본래 인간이 인류로서 동등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파, 계급, 피부색, 국적, 관습 등의 차이보다 더욱 깊은 공통요소가 되겠지만, 아집은 공통점을 잊어버리게 하고 차이점에 집착하게 한다. 프랑스혁명에 이어 러시아혁명에 있어서는 끝내 종교가 탄압을 받은 동시에 사람의 사람에 대한 지배가 만연되고, 어떤 때는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지배, 혁명정권에 의한 권력의 지배가 나타나기도 했다.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니이버’는 설파하고 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재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 말은 아집에 대한 경고의 중요한 대목이다. 아집은 자기 집착과 호불호(好不好)와 이해(利害)관계로 이루어진 집단에도 강하게 집착한다. 근세(近世)초기에는 각 개인이 자유롭게만 되면 모든 것이 잘 조화되어 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발생된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독립하고 봉건시대의 지배계급으로부터 해방되어 사이좋게 살아갈 것으로 예측했던 근대국가 안에서도 유산계급(有産階級)과 무산계급(無産階級)이 대립하게되었고, 그 유산계급을 추방하여 만든 공산국가에서도 새로운 계급으로서 권력을 가진 공산당원들이 특권을 휘두르고 체제의 모순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전 세계적으로 공산정권이 몰락하고 말았다. 아집에는 재산만이 아니라 권력에서도, 그리고 내 제자 남의 제자라고 하는 등 인맥을 형성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본성이 다스려지지 않는 한 세계화가 될지라도 지구상의 지배와 피지배관계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화성인이라도 지구를 점령해 온다면 그때야 비로소 지구인들이 서로 공동의 운명체에 속한다고 느끼게될지 모를 일이지만 그만큼 사람이 진실에 이른다는 것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문화의 발전은 분명히 개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에너지’에 기인했을 것이지만, 엄격한 통제나 방종한 자유, 즉 예컨대 개미사회 혹은 짐승사회의 모델 어느 것도 이상적일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체념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단니쇼(歎異抄)’의 “베풀어 받은 신심(信心)”이라는 말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남에게 전달할 수 없고 남은 이해할 수 없는 각 개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사람의 에너지 근원이며, 또 아집의 근원이라고도 한다. 사람들 사이에 열려 있지 않던 내면의 개인을 초월한 높은 것에 창문이 열려있다면 그것은 아집의 근원이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자기만의 것이라고 해서 그것에 사로잡힌다면 완고한 자아(自我)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곳에 빛이 들어오는 창문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연 것이 아니며 불가사의하게 열렸다고 생각한다. 신심이란 그 열린 창문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기(機)와 법(法), 즉 자기와 자기를 초월하는 것의 접촉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소크라테스’는 “항상 시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결심을 했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를 궁극적으로 지도해 주는 것은 자기를 초월한 곳에서 온다고 하는 느낌은 동서양에서 공통된 것이다. 이것을 ‘루터’는 그의 ‘기독교의 자유’라는 책 속에서 “오히려 신앙은 우리들 속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일이다.” 또 “성령(聖靈)이 신앙에서 작용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외형적 지식이나, 능력, 성격 등의 차이, 차별 따위는 아주 작은 것이다. 바로 여기 인간의 참된 모습과 절대적 평등이 있고 평화가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이것은 불교에서 표현되고 있는 불성, 혹은 번뇌 망상을 여읜 본래심(本來心)의 작용이라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집과 절연된 상태, 즉 극도의 겸허한 자세에서 진실한 신심이 작용하는데 바로 그것이 아미타불의 무량한 자비심,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자아의 발견에 눈떠야겠다. 끝으로 철저히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는 자아 발견과 동시에, 비교적 악인(惡人)에 속하는 나 같은 못난 중생도 구제해 주시겠다는 무량수불의 본원에 감사하는 마음을 오늘도 잃지 말아야겠다. 그것은 ‘배경을 보는 눈’이 생겨 아집이 사라진 곳에서나 가능한 신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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