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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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양자의 역할
권혁주/ 물리학과 졸업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처음 읽었던 때, 그 때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번에 『고타마 붓다의 생애』를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고타마 붓다의 생애는 크게 붓다의 탄생, 젊은 시절, 출가 수행, 설법과 전도, 입멸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나에게 특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중도(中道)의 가르침이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최초로 설법했던 ‘초전 법륜’에서, 다섯 비구에게 말했다.

“비구들아, 출가자들이 피해야 하는 두 극단이 있다. 그 두 가지 극단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쾌락과 탐욕에 빠진 생활이다. 이런 생활은 타락의 길이다. 관능적이고 세속적이고 거룩하지 못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혹독한 고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고행은 고통스럽기만 하고 거룩하지 못하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중도는 통찰과 지혜를 가져오고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물리학을 전공하는 나는 중도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에서 양자 역학을 떠올렸다.

현대 물리학의 두 가지 테마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슈퍼 스타라 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인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와 더불어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등장은 아인슈타인조차도 두 손 들게 한 21세기 과학의 연구 과제 중 하나이다.

객관적 세계의 합리성을 신봉하는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면서 완벽한 통일장 이론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아인슈타인도 양자 역학의 발전을 보면서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양자 역학은 M. 플랑크, E. 슈뢰딩거, W. K. 하이젠베르크, P. A. M. 디랙 등에 의해서 건설된 이론으로서, 1927년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도입하여 수립하였다.

양자 역학이란 어느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측정하는 데에는 필연적인 오차가 수반되며, 각 측정의 불확정성의 곱이 h(플랑크 상수)보다 작을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어느 입자(전자)의 위치를 알면, 그 속도를 알 수 없고, 입자의 속도를 알면 그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양자 역학을 다른 말로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과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뉴턴에 의해 정립되어 이후 300여 년 동안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결정주의 과학관은 마침내 붕괴되어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법칙이나 원리의 절대성을 흐려 놓았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컨대 ‘달걀을 시멘트 벽을 향해 던지면 100% 깨진다.’라는 말은 오류이다. 깨지는 것은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일 뿐이다. 사고의 전환점은 달걀이 시멘트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 또한 가능한 현상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가능성의 확대를 가져온다. 불확정성의 증가가 가능성의 확대라는 것은 쉽게 A라는 사건, E라는 사건이 있는데 그 경계를 확고히 지어 버리면 독립적인 A, E 사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그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우리는 B, C, D라는 새로운 사건이 생길 수 있다.

또 한 예로서 ‘가’라는 여자와 ‘나’라는 여자가 있는데, 둘 다 아는 사이이다. 애인으로 사귀고 싶은 남자는 둘 중 한 여자에게 집중하면 나머지 한 여자의 장점을 볼 수 없고,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둘을 관찰하고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잘 활용하여 자신과 잘 어울리는 여자를 선택한다면 자신과의 인연을 만들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예처럼 우리는 어떤 확고한 경계보다는 불확정성을 증가시켜 더 많은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양자 역학을 처음 배울 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온 자연 현상을 과학자들이 물리적으로 규명하는 데에는 양자 역학이 유용하다. 요컨대 현재 과학의 최신, 최고의 이론이 바로 양자 역학이며, 물리학자들이 자연 현상을 규명하는 데 가장 근접한 이론이 바로 양자 역학이다.

양자 역학을 배우면서, 난 어렴풋이 중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계속 집중하면 다른 쪽은 그만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항상 중도를 수행하는 것이 가장 큰 에너지(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내가 양자 역학의 수식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이 양자 역학이 붓다의 중도의 가르침과 부합된다고 본다. 항상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내게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 뜻만은 마음에 담고 살고자 한다.

나의 철학 중 첫째는 ‘즐거움은 극히 짧고, 고통은 길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고통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었을지라도 그 기쁨의 시간은 너무나 짧은 것 같다. 그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또 다른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 여정……. 인간의 생은 그 짧은 기쁨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 생을 이어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붓다는 말한다.

“생은 고통이고, 그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발생된다. 고통을 주는 집착을 버리고 나를 부정하고, 진정한 나의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청정 수행하여 해탈을 얻어라.”

가슴 깊이 와 닿는 말이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내가 실천하기란 너무 힘든 것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나한테도 있고, 그것을 다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간다면, 앞으로 있을 나의 삶 속에서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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