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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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담불라 석굴
김미숙/ 불교학부 강사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 사원, 담불라의 황금 사원. 그 곳은 캔디와 아누라다푸라를 잇는 길 중간에 있다. 캔디에서는 72킬로미터, 아누라다푸라에서는 66킬로미터 거리에 자리한 담불라는 스리랑카 섬의 상하 좌우에서 거의 정중앙에 위치한다. 또한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 캔디를 잇는 문화 삼각 지대의 중심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담불라는 스리랑카의 문화 탐방 길에서 빠짐 없이 들르곤 하는 코스로도 유명하다.

특히 석굴 안에 가득히 봉안되어 있는 불상들과 벽마다 가득 채워 놓은 극채색의 벽화는 스리랑카의 불교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불상과 벽화로 짐작되는 화려하고 은성했던 옛 시절은 간 곳 없고, 지금은 석굴 사원만이 문화 유적지로 덩그렇게 남아 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던 석굴이 자리한 담블라가라 산의 높이는 약 180미터로서 한 덩어리의 바위산이다. 사람들은 그 바위산을 ‘란 기리’라고 하는데, 황금빛으로 빛난다는 뜻이다. 정작 바위산은 흑갈색이지만, 그 곳에 봉안된 불상과 벽화가 황금빛으로 가득하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 짐작된다.

석굴의 초입에서 산 중턱에 자리한 석굴 사원까지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하기는 해도 그다지 힘겹지 않은 언덕길이다. 올라갈수록 탁 트인 전망에 한숨 돌리고자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시기리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너른 열대림 평원 속에 모자 모양으로 불쑥 솟아난 시기리야 바위산. 19킬로미터 떨어진 거리가 지척과도 같다. 잠시 동안이나마 목적지인 담불라 석굴을 잊을 정도로 독특한 주변 풍치에 이방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야말로 천혜의 입지가 따로 없다. 담불라 언덕을 에워싸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열대의 풍경화 한 폭. 석굴을 보기도 전에, 석굴에 머물며 수행했을 옛 스님들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누군들 이런 풍경 속에서 마음이 맑지 않을 것인가? 촉촉이 물기 어린 열대 우림의 채색은 이내 마음 속 번뇌를 투명하게 물들인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이내 다다른 석굴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면 석굴 앞으로 긴 복도가 이어진다. 지붕이 있는 회랑식 복도는 자연 석굴 앞에 잇대어 지어 놓은 것이다. 복도에서 석굴로 다시 복도에서 석굴로……, 5개의 석굴이 모두 이어져 있다.

이 곳은 인도의 아잔타나 엘로라 석굴처럼 인공적으로 굴을 파내거나 깎아 낸 것이 아니며, 자연 상태의 석굴을 본래 그대로 이용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천장도 벽도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 높았다가 낮았다가 들쭉날쭉하다. 거기다 간간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발걸음을 조심스레 떼어놓게 한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 눈을 돌리면, 희한하게 그림을 훼손하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를 볼 수 있는데, 보통 사람의 눈에도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옛 스님들이 조성 당시부터 암벽에 홈을 파서 물줄기를 다스린 것이라 한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다. 천장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인 물줄기가, 보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타고 올라 흐르다가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을 보았을 때, 느끼는 놀라움은 신비 그 자체이다.

더구나 그 물방울이 떨어지는 동이는 절대로 모자라지도 넘치지 않고 꼭 그만한 정도로 차 있다는 말을 듣고 보면, 감탄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범속한 사람들은 그 신비에 또 다른 신비를 더한다.

본래 담불라라는 이름이 ‘물이 솟아나는 바위’를 뜻하고 있듯이, 이 석굴에는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데 그 발원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 이 물만 먹고도 한동안 지낼 수 있을 만큼 신비로운 효능을 지닌 성수라는 것이다. 바로 이 감로수가 담불라의 또 다른 보물이다.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제1 석굴부터 제5 석굴까지는 조성된 시대별 순서와도 같다. 그런데 뜻밖에도 석굴이 조성되었던 계기에는 싱할라족과 타밀족의 분쟁의 역사가 그대로 녹아 있다.

기원전 1세기경에 발라감 바후 왕이 타밀족의 침략에 밀려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에서 이 곳으로 피신했다. 14년의 피난 생활 끝에 타밀족을 물리치고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 왕은 그 공덕이 불교에 있다면서 사원을 조성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그 후로 해를 더하면서 불상의 수도 늘어가고 석굴도 점차 수를 더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제1 석굴의 이름은 데바 라자 비하라이다. ‘신들의 왕의 사원’이라는 뜻이며, 가장 오래된 석굴이다. 담불라 최대의 열반상이 있다. 길이가 15미터에 이르는 황금빛 와불은 열반상이다. 그 발바닥에는 마치 불꽃 같은 꽃 무늬가 그려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벽과 천장의 그림은 프레스코 화법으로 그린 것이다. 먼저 암벽에 하얀 회칠을 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이 퇴색하면, 다시 덧칠하여 그리되, 그대로 다시 그리거나,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벽화의 경우에도 500년 내지 200년 정도 된 것이라 한다.

제2 석굴은 마하 라자 비하라인데 ‘위대한 왕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담불라에서 가장 큰 석굴인 동시에 가장 뛰어나다. 석굴의 폭은 52미터, 깊이는 25미터, 높이는 6미터에 이른다. 이 석굴에는 모두 56개의 불상이 있으나, 정작 유명한 것은 벽화이다. 천장에는 붓다의 생애와 싱할라족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려져 있다. 원색의 그림이기 때문일까, 생생한 박력이 넘친다. 그림 중에는 싱할라족과 타밀족의 싸움 장면도 있다.

제3 석굴은 마하 알트 비하라이다. 그 뜻은 ‘위대한 새로운 사원’이다. 18세기에 왕이었던 킷티 시리 라자하가 조성했다. 총 57개의 불상이 있는데, 9미터에 이르는 와불도 있다.

제4 석굴은 파스시마 비하라이다. ‘서쪽 사원’이라는 뜻이며, 좌불상이 많다.

제5 석굴은 가장 최근인 1915년에 조성되었다.

17세기에 세라나트 왕의 명령으로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는데, 제1, 제2 석굴의 벽화 중 대부분은 그 때 다시 그려진 것이라 한다. 석굴 사원 한 곳의 역사가 2천 년이 넘도록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담불라의 석굴들은 본래 자연 동굴에서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들이 머물던 거주처였기에, 모두 ‘비하라’로 불리지만 정작 석굴들을 둘러보고 나면 비하라보다는 ‘차이티야’에 가깝다는 느낌이 앞선다. 스님들이 수행 생활 틈틈이 신앙심으로 새기고 그려 놓은 불상과 벽화들이 석굴에 가득하여 그대로 신성한 예배 공간이 되었기에, 스님들의 거주 공간이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바위산을 타고 내려오는 길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담불라의 불상, 담불라의 벽화, 그 열대의 채색으로……. 잡된 번뇌가 사그라진 원색의 향연이 오래도록 가슴 속에 여운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그 원색은 스리랑카의 유서 깊은 불심의 빛깔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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