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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敬)과 선(禪)
송재운/ 문과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성리학의 요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거경궁리(居敬窮理)라 할 것이다. 거경이란 문자 그대로 경에 머무른다는 뜻이요, 궁리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전자는 수양론이요, 후자는 지식론에 해당한다.

이번 학기에 필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과 서울대학교 윤리학과 박사과정에서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선생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읽고 있다. 퇴계의 성학십도는 거경궁리를 포함한 성리학의 학문정신과 방법론은 물론 교육사상까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동양사상 특강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올해가 퇴계 탄신 500주년을 맞는 해여서 그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국제 학술회의가 열리고 또한 퇴계 사상을 여러 각도에서 재조명하는 행사도 적지 않았다. 이제 퇴계는 한국만의 퇴계가 아니라 세계 속의 퇴계로 거듭나고 있는 느낌이다. 강의에 동참하고 있는 학생들도 이러한 때에 퇴계를 연구하게 되어 기쁘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사상을 전문으로 하는 이「정각도량」에 웬 퇴계의 이야기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퇴계의 경(敬)에 대한 필자 나름의 몇가지 관견(管見 )이 있기 때문이다.

성학십도는 퇴계가 70세를 일기로 별세하기 2년전인 68세에 저술하여, 나이 어린 임금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학이란 유학을 이름이요, 열가지 글과 그림은 태극도(太極圖), 서명도(西銘圖), 소학(小學), 대학(大學),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인설도(仁說圖), 심학도(心學圖), 경재잠도(敬齋箴圖),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를 말한다. 일일이 설명할 겨를은 없지만, 선조로 하여금 성인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하고 성리학의 핵심이 어떤 것인지를 터득케 하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이 성학십도는 퇴계의 대표적인 저술로 꼽힌다. 그리고 성학십도는 제 1도에서 10도에 이르기까지 경(敬)으로써 일관되어 있다고 퇴계는 애써 강조하고 있다. 매 도의 성학(유학)은 오로지 경을 통하여서만 그 근본정신을 체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도설은 퇴계의 경학(敬學)이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퇴계는 말한다.

경은 일심(一心 )의 주재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지경(持敬)을 통하여 인(仁)을 구함으로써 성인에 도달할 수 있다.

경은 성학의 시종(始終)이다.

퇴계가 성학의 처음과 끝이라고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경이란 무엇인가.

퇴계는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의 설을 따라 경을 정제엄숙(整齊嚴肅),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말하고 있다. 정제엄숙이란 말 그대로 “잘 다스려 가지런하고 정숙한 것”을 이름이요, 주일무적이란 “마음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외모로부터 내면에 이르기까지 경건성을 지니는 것은 정제엄숙이요, 불이부잡(不二不雜)하여 전일한 것이 곧 경이다. 오늘날 강단에서 흔히들 성(誠)을 진실무망(眞實無妄)이라 하고, 경을 주일무적이라하여 마음이 오로지 하나에 집중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모두가 정·주(程·朱)나 퇴계의 설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하나”가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주일(主一)할 때의 一, 전일(專一)할 때의 그 一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성학십도에서 퇴계는 그 一에 대한 해답을 분명하게 내놓지 않고 있다.

만일 주일(主一)을 한가지 일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한 가지는 사람마다 각각 생각하고 설정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선한 일도 있을 것이고 악한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유학에서 만인에게 통일된 수위법(修爲法)이 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성리학의 경 공부에서 一에 대한 정의란 필연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주(程·朱)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집의(集義)나 집중(集中)으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문인진 모르지만 한국 성리학에선 분명한 개념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선종의 선(禪) 역시 따지고 들어가면 그 방법론상 심(心)의 주일무적(主一無適)이다. 그러나 선종은 그 一을 언어도단적 화두로 삼음으로써 탐구의 대상을 분명하고 있다. 선과 경의 다른 점이다.

원래 성리학의 수양방법은 주정(主靜)에 있었다. 그래서 정이천도 정좌 잘하는 제자들을 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퇴계에 따르면 (抄醫閭先生集白沙陽明抄後復書其末) 정이천은 “정(靜)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문득 석씨(釋氏)의 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자는 쓰지 않고 다만 경자만 썼으니, 정의 편벽됨이 있음을 염려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이천의 형인 정명도가 강조한 정 역시 경의 뜻이다.

경(敬)은 선진유가에서 공경, 외경의 뜻으로 쓰였다. 그래서 예의 근본을 무불경(無不敬)이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이 송대에 와서 주일무적이라고 의미가 고양된 것은 앞서 정이천의 말대로 불가의 정좌법과 구별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정·주(程·朱) 이후 거경(居敬)이란 용어로 성리학의 학문론, 수양론의 골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특히 선종의 정좌는 이학의 경을 발전시키는 촉매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성리학이 불학(佛學)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유학운동이라고 이해할 때, 우리는 경과 선의 다르면서도 유사한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상채(謝上蔡)가 경을 상성성(常惺惺, 늘 깨어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윤화정(尹和靖)이 기심수렴불용일물(基心收斂不容一物, 그 마음을 수렴하여 일물도 용납지 않음)이라고 한 것은 더욱 선(禪)적이다. 그러므로 선종의 심법을 이해하는 것은 이학(理學)의 경을 이해하는 기본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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