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호 표지

이달의 법문/ 체링 초펠 스님

인과법과 참회 ☞

정각도량/ 이법산스님

분별심과 지혜 ☞▷

특집/ 인도에 이는 불교 바람

람 라즈의 불교 개종운동/ 이거룡 ☞▷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정승석 ☞▷

詩心佛心/ 윤석성

수의 비밀☞▷

수행의 길/ 이만

마음을 일으키면 부림을 당한다.☞▷▷

고승의 향기/ 정유진 스님

혜가의 구도정신☞▷

경전의 말씀/ 이지수

해심밀경의 가르침 ☞▷

인터넷 세계의 불교/ 최동순

미국에 뿌리내르는 禪 ☞▷

일주문/ 심산스님

배어나는 아름다움 ☞▷

정각논단/ 송재운

경(敬)과 선(禪) ☞▷

세계 문화유산/ 김미숙

붓다의 섬, 스리랑카의 폴론나루와 ☞▷

교계소식 ☞▷

동국동정 ☞▷




마음을 일으키면 부림을 당한다
이만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흔히 무엇에 관해서 많이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배웠다. 그리고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 있어서도 어떤 사물에 관한 많은 지식이 바로 재산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러한 지식들이 오히려 일상생활 속에서는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에 있어서의 지론이다. 다시 말하자면 알 것만을 알지 않고 쓸데없이 아무 것에 대해서나 많이 알았을 때에는 마치 치성한 열「火]을 받으면 머리「頁]가 혼미하여 번잡하게 되는 것과 같은데, 이와 같은 상태에서 번뇌(煩惱)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어떤 사물에 대한 상쾌한 느낌이나 단순한 감정은 우리의 머리를 가뿐하게 하여 지혜를 일으키지만, 너무 많은 지식과 격렬한 감정은 오히려 판단을 흐리게 하여 올바른 인식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감추어져 있는 것이며, 생각이 단순해야 머리가 맑아서 지혜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이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무엇인가 하면, 우선은 사물에 대한 많은 인식의 여운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된 원인은 우리가 마음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번뇌는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듯이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구니가 침입한다.(壁隙風動 心隙魔侵)”고 했는데, 여기에서 마음이란 바로 어떤 범부나 성인을 막론하고 똑같이 가지고 있는 평등한 마음을 가리키지만, 알음알이를 낸 마음과 본래 청정함을 간직한 마음 사이에는 차별이 있다는 것으로서 번뇌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중생들의 마음이고, 아무런 차별성과 분별력이 없는 본연의 마음이 성인들의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마음이 일어나서 분별력이 있는 한 부처까지도 마군이 될 수 있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무심하면 악마의 화살로 전환되어 보살의 연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설화를 보면, 옛날에 어떤 선사가 조용한 곳에서 좌선을 하는데, 하루는 상복을 입은 젊은이가 지게에 송장을 지고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 시체가 죽은 우리 어머님인데, 네가 죽여서 그러니 살려내라.”고 하면서 앙탈을 부리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선사는 근래에 마을에 내려간 일도 없고, 더구나 누구를 만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간곡하게 타일렀지만, 그 청년은 막무가내로 가지 않고 한없이 시비를 걸면서 횡포가 심하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도끼로 상주를 내리쳤다는 것이다. 그리하고 난 후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그 상주는 어디로 간 곳이 없고 대신에 자기 허벅다리에서 피가 흐르더라는 이야기「見孝子而斫股]와, 또 한번은 어떤 선사가 깊은 산 속의 조용한 곳에서 역시 참선에 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주위의 산에 살고 있던 돼지가 나타나서 코를 세우고 달려들더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방어할 목적으로 그 돼지의 코를 움켜잡고 고함을 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았더니, 돼지는 간 곳이 없고 자기가 자기 코를 잡고는 실랑이를 하더라는 것「見猪子而把鼻]이다.

이와 같은 일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지만 마음이 일어나 분별력이 생기면서 순식간에 자신도 모르게 허상을 본 것으로서, 수행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오르면 그 만큼 마구니의 방해도 왕성하여 시험에 든 경우인데, 진실로는 마음에 틈이 생긴 것이 그 원인이다.

한편으로 무심의 경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는 두 선사의 행각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옛날에 두 사람의 수행승이 함께 먼 길을 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물이 많이 흐르고 있던 큰 강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마침 거기에는 한 아낙네가 먼저 도착하여 물이 많기 때문에 건너지를 못하고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는데, 스님 중의 한 분이 양해를 구하고 그 여자를 업어 강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세 사람이 모두 강을 건너고 난 후에 아낙네는 아낙네대로 갈 길을 가고, 두 스님은 스님들대로 행각을 계속했는데, 마침 날이 저물어 어느 거처에서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낮에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같이 가던 스님의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드디어 입을 열어 말하기를, “수행하는 스님이 어찌 그렇게 함부로 덥석 아녀자를 업고 물을 건널 수 있다는 말이요.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그 때서야 낮에 자기가 아녀자를 업고 강을 건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으나 사실은 그 뒤로 잊어버려서 그것에 관한 어떠한 감정도 없었지만, 오히려 뒤따라가던 다른 스님은 아직까지도 그 여자를 업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일부러 마음을 내지 않고 무심한 상태에서 감정을 배제하고 한 행위와 행동은 뒤끝이 없는 것이며, 어디에도 걸리지 않아서 대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이며, 만약에 마음을 내면 중생들은 자주 온갖 유혹과 집착 등에 시달려서 그러한 것들로부터 부림「시킴」을 당한다고 한다. 바로 중생들이 업을 지어서 계속 6도 윤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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