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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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심밀경의 가르침
이지수/불교대학 인도철학과 교수

화엄경에서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고 말하듯이 불교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마음에로 귀착된다.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신 중심의 종교라면 불교는 마음을 중심으로 삼는 마음의 철학이자 마음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중추인 조계종은 중국의 선종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지만, 선종은 분석적이고 조직적인 인도불교의 교학을 종합적, 실제적, 직관적인 중국적 사유방법으로 재편성하여 토착화시킨 중국적 불교이다. 그리고 선종이야말로 마음을 구심점으로 하여 다양한 교학들을 통합시킴으로써 마음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불교의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의 <관심론>에는 ‘마음을 보는 하나의 법이 모든 行을 포섭한다’,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 모든 行이 오직 마음의 소행이니 마음을 알면 만행이 갖추어진다.’ 라고 말한다. 또, 보조국사의 <진심직설>에는 영명(永明)의 <유심결>을 인용하여 ‘대저 이 마음이라는 것은 갖가지 묘하고 신령스러운 것이 모두 만나는 곳이니, 만법의 왕이다. ... 일체 중생의 미망이 모두 마음에 미혹함이오, 모든 수행인이 깨달음을 얻음도 모두 이 마음을 깨달음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혜능은 <단경>에서 ‘깨닫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오 한 생각 깨칠 땐 중생이 곧 부처이다. 그러므로 만법이 모두 자기 마음에 있으니 어찌 자기 마음 가운데로 따라 문득 진여본성을 보지 못하는가?’ 라고 가르쳤다.

중국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종은 이상의 몇 가지 인용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마음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그 마음의 근본적 변혁의 방법으로 참선을 권유하는 가르침이지만, 따지고 보면 선종의 연원도 결국은 인도에 있다. 특히 유가행파, 혹은 유식학파는 마음(=識)의 구조와 기능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 마음이 잡염의 생사계를 나타내고 반대로 청정의 진여 열반계를 실현시키는 메카니즘을 밝혀주고 있다. 이 유가(요가)행 유식학파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도 선종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만법의 근원으로 삼아 유가행(止와 觀)과 10바라밀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마음을 청정한 진여심으로 변형시키는 원리를 해명해 주고 있다.

<해심밀경> ‘무자성상품’에선 석존의 가르침을 세 시기로 구분한다. 첫 번째 시기에선 성문승을 위해 4성제를 설하셨지만 그것은 아직 낮은 단계의 가르침이며,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미료의(未了義)의 가르침이다. 두 번째 시기에선 대승에로 나아가고자 하는 보살승들을 위해 일체법이 모두 무자성이고 생도 멸도 없이 본래 적정하고 열반임을 가르치셨으나 이 역시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미료의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일체승(일승)에로 나아가려는 사람을 위해 일체법이 무자성이고 불생불별이며 본래 적정임을 감추어진 것이 없이 그 의미를 드러내어 설하였으며, 이것이 곧 유식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일체법이 무자성=공임은 반야경에서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미료의이므로 3성과 3무자성에 의해 그 깊고 비밀스런 의미를 밝게 드러내어 해명해 주려는 것이 <해심밀경>의 의도이다.

용수는 석존의 근본적인 가르침인 연기를 곧바로 무자성=공=중도라고 해석했지만 요가행을 통한 마음의 근본적인 변형을 추구하는 <해심밀경>은 연기=마음=의타기자성으로 해석했고, 이 의타기성의 마음(識)이 잡염의 생사와 청정한 열반의 바탕이라고 본다.

마음이 번뇌에 오염됨으로써 그 허망분별작용에 의해 나와 너, 주관과 대상 등 갖가지 이원적 대립과 차별, 경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중생계가 현현하며 이것을 변계소집성(분별되어 집착되는 모습)이라고 부른다. 반대로 마음에서 번뇌가 제거되고 왜곡되어진 의식의 구조가 본래 청정한 모습을 회복할 때 허구적인 변계소집성은 소멸되고 진여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것을 원성실자성이라고 부른다.

<해심밀경>에선 3자성을 눈병과 수정의 비유로 설명해 주고 있다. 변계소집상은 눈병이 든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머리카락의 다발 등 착각적 현상들이며, 의타기성은 그러한 착각을 일으키는 병든 눈의 작용이고, 원성실성은 눈의 병이 치유되어 건강한 눈에 사물의 본래 모습이 여여하게 드러난 상태이다. 또 맑은 수정이 푸른 빛을 받아 에메랄드로 착각되어 집착되는 것이 변계소집성이라면 푸른 빛을 반사하는 수정이 의타기성이다. 에메랄드로 집착된 것이 실은 맑은 수정에 비친 푸른 빛임을 알 때 수정의 본 모습이 드러나듯이 의타기성(수정)에서 변계소집성(에메랄드라는 착각)이 사라진 상태가 원성실성이다.

그런데 이 3자성을 문자 그대로 존재의 본성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해심밀경>은 ‘무자성상품’에서 3성이 그대로 3무자성이라고 설한다. 변계소집성은 분별되어진 것일 뿐 실상이 없으므로 상(相)무자성이며, 의타기성은 타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것, 즉 연기이므로 생(生)무자성이고, 원성실성은 무자성=공성이 궁극적으로 실현된 상태이므로 승의무자성이다.

나의 세계란 곧 나의 마음이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란 결국 우리들의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오늘날 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갈등과 대립, 마찰과 충돌도 탐 진 치와 자만심(慢), 그릇된 생각(見) 등의 번뇌에 오염되어 일그러지고 비틀린 마음이 그려놓은 그림일 뿐이다. 그러므로 <해심밀경>은 네 마음의 정체를 똑바로 바라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유식(唯識)이라고 하면 ‘대상(境)은 없고 다만 식만이 있다’라고 문자 그래도 해석하여 유식학파를 서양철학의 관념론과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무아’가 무조건적으로 ‘아(我)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고, 또 ‘공’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듯이 ‘유식’도 무조건 ‘식 밖에 없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무아’란 다섯 가지 요소들(오온)이 ‘아’가 아니고, 그것에 ‘아’가 없다는 뜻이고, ‘공’이란 연기하는 이 모든 사물에 불변적 본질(자성)이 비어 있다는 뜻이듯이, ‘유식’은 식의 분별작용으로 만들어진 변계소집상이 다만 내 마음에 나타난 영상일 뿐이라는 뜻이다. 몽중에 현현한 갖가지 영상들을 실재로 착각하는 미혹에 빠진 꿈꾸는 사람에게 ‘그것은 다만 꿈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꿈도 사라져 버리듯이 의타기상의 식(마음)에서 변계소집상이 사라질 때 식도 사라져 버리고 무분별의 지(智) 즉 무심으로 바뀌고 식에 의해 나타난 허상 대신 진여의 실상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유식무경의 논증을 다루는 세친의 <유식20론>에서 ‘법무아에 깨달아 든다는 것은 법(사물)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분별되어진 모습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법의 본성을 주관·대상(능취·소취) 따위로 분별한다. 그러한 분별되어진 성질에 있어서 그들이 무실체라는 것이며 깨달은 자의 인식대상인 비언설적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유식’이란 ‘그대가 실재라고 집착하는 것은 그대 마음에서 만들어진 영상일 뿐이고 일종의 분별이다’라는 뜻이지 ‘꿈(식)만이 있다’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승의적으론 분별되어진 대상은 없고 진여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해심밀경> ‘승의제상품’에서 ‘승의제(진여, 원성실성)는 모든 것에 두루하며 평등하다’, ‘여래가 세상에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제법의 법성은 안립되어 있으며 법계에 안주해 있다’라고 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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