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여러 사상에서 道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道란 무엇인가? 선불교에서는 평상심이
바로 道라는 「平常心是道」 혹은 번뇌
망심이 없는 그 마음이 道라는 「無心是道」라는
말이 잘 알려지고 있다. 평상심이나 무심은
결국 번뇌 망념이 없는 인간의 청정한
본래심으로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조당집』
제10권 장경화상전에 그러한 내용에 대한
설법이 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질문했다. “그대들은 무엇을
道라고 하는가?” 그러자 한 사람의 제자가
“번뇌 망념이 없는 그 마음을 도(無心爲道)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한 사람은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도(觸目爲道)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한사람은 “두 손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깡충 깡충 뛰면서 걸어 나간
것입니다.(兩手撫膝 雀躍而行)”
그러자
공자가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無心이
道라고 함은 이제부터 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요, 눈에 닿는 것을 모두 도라고 함은
도를 찾은 것이요, 깡충 깡충 뛰어 나간
것은 도를 나툰 것이다.”
장경선사가
이 이야기를 제시하면서 대중들에게 질문했다.
“공자가 이렇게 판단한 것은 세 사람의
뜻에 부합되겠는가?”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장경화상은 스스로 말했다.
“두 사람은 승복하겠지만, 한 사람은
승복할 수 없다.(兩 則得, 一 則不得)”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에 대한 근거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선불교의 입장에서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선불교에서 자주 주장하는
「無心是道」나 「觸目是道」라는 말의
맹점과 참된 불도의 정신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일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無心이
道라는 말은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심(無心)의
경지를 각자가 직접 체득하도록 가르친
선불교의 사상을 말한다. 선불교의 보편적인
사상은 각자가 실천수행을 통해 자기 것이
되도록 하고, 자기 자신의 사상과 지혜가
되고, 구체적인 생활에서 전개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눈에 띄는 것이
모두 도라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의 눈에 띄는 일체의 사물과 경계가
그대로 깨달음(道)의 경지가 되기 위해서는
사물과 경계에 차별, 분별심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사물에 끄달리고
집착되어 자신의 주체(본래심)를 망각하고,
자신이 경계에 매몰되어 번뇌 망념을 일으킨
중생의 삶을 어찌 깨달음(道)의 경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공자의
판단에 장경화상은 「無心爲道」나 「觸目爲道」라고
대답한 제자의 견해는 보편적인 사상을
가지고 道의 세계를 대변하려 하고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승복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두 손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깡충 깡충 뛰어 나간 사람은
무심한 경지에서 일체의 사물과 경계를
도를 구현하는 장소로 하고 구체적인 도의
삶을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공자의 이러한 평가에 승복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도란
언어나 사상을 말로서 표현한다는 것은
위대한 선사상을 무지한 안목으로 죽이는
것이다. 언어 문자로 깨달음의 세계나
도의 경지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不立文字〉라고 말한다.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無心是道」라는 말은 추상적인
철학이론이나 고정화된 선사상이나 개념이
아니라, 지상에서 전개하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깨달음의 삶인 것이다. 즉 구체적인 일상생활
그 속에서, 일체의 번뇌 망념이 없는 無心의
경지에서 지금 여기의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지금 여기의 자신의 삶이란 바로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일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불법과
도를 배우고 익힌다. 보다 좋은 자기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행복하고 평안하며 건강한
삶을 향한 길(道)을 찾고 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좋은 길을 찾는 구도자인
것이다. 각자가 그 길을 찾아 걸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결국 지금 여기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일은 정지된 것이 아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조당집』
제4권에 약산유엄선사전에 이고(李暖)가
약산선사에게 “무엇이 道입니까?”라는
질문에 약산은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에 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중용』에도 군자의 도는 다양하게 작용하면서도,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 말의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솔개는
하늘을 날고 고기는 물 속에서 헤엄친다.”라는
『시경』의 말을 인증하고 있다. 즉 도가
언제나 쉼이 없이 작용하면서도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솔개가
허공을 날고, 고기가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그것이 다름 아닌 도의 실제인 것이며,
감추어 보이지 않는 도가 실제로 이렇게
여실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약산의
대답은 도의 실제 본질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시경』에서 말하는
도의 본질적인 작용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가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도는 단순히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항상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순간이라도
그 형태나 모양에 멈추거나 쉼이 없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無心是道」라는
말은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일을 통해서
구체적인 삶으로 작용될 때에 무심이 바로
道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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