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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11월호 / 통권 43호 / 불기 2542(1998)년 11월 1일 발행

 

 

이달의 법문

고승초빙법회/오녹원 큰스님

 

정각도량

계(戒)와 율(律)/최 법혜스님

 

특집1

장례문화/화장문화의 확산을 위한 제언/한보광

 

특집2

장례문화/장례방식과 국토보전/오홍석교수

 

화엄경의 세계

화엄경의 세계(3)/이도업 스님

 

만나고
싶었습니다

김복순 금장생활관장/편집부

 

불심의 창

그래도 우리는 기도를 한다/백경선

 

가람의 진수

단군성지 마니산의 전등사(傳燈寺)/유문용

 

신행상담

신통력/장계환 스님

 

수행의 길

불교의 실천수행/정성본 스님

 

불교문학

님의 침묵/이만

 

신간안내

화엄의 세계

 

일주문

가족의식/이법산 스님


이달의 법문
고승초빙법회/오녹원 큰스님

 

현재 대본산 직지사 주지, 동국학원 이사장
1941년, 이탄옹 화상을 은계사로 하여 사미계 수지
1946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방한암 대종사로부터 비구계 수지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 주지
1963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1981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1983년, 조계종 전국교구본사 연합회 회장
1984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5년,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장
1992년, 일본 大正대학 명예문학박사

  이제 새로운 학기를 맞이 했습니다. 오늘 여기에는 총장님, 정각원장님을 비롯한 많은 동국 가족과 일반불자님들이 함께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은 우리 학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신임교수와 조교 여러분들과  함께 하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신임교수와 조교 여러분이 이제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불교신자로써의 증명을 받는 수계식을 갖게 되어 더욱 뜻 깊게 생각합니다. 수계식을 맞아 여러분들께 삶의 자세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무수한 대답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삶이란 오직 그 당사자만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삶에도 하나의 진리가 있으니, 이것은 인생은 苦이다고 하는 하나의 명제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幸과 不幸의 끝 없는 연속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웃고, 내일은 울고, 또 그 다음은 웃고, 울고…, 이러한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행·불행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세상 밖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우리 마음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라거나 탐하는 데서 우리의 행·불행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는 데서 행·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조금 낮추고, 주위를 돌아본다면 행·불행을 떠난 여여(如如)로움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스님 어떻게 사람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는 여여(如如)로움을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을 하실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부처님의 경지이며, 또한 세속에 살 면서 우리 중생들이 삶 속에서 작게나마 느낄 수 있는 깨달음의 맞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 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꿈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깨달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낸다면 우리는 깨달음의 맛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보다도 마음을 조금 더 비우고, 자비로써 타인을 대한다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면서  아하! 그렇구나 하는 삶 속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작은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부처님과 같은 절대 경지를 이루는 초석이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스님들에게 그 첫 관문으로써 『초발심자경문』을 독송, 수지해야만이 진정한 불자로써의 자세를 갖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특별히 새로 임명된 교수님과 조교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앞으로 우리 학교를 음으로 양으로 이끌어 나갈 일꾼들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외부에서 이렇게 본교를 찾아와 제 법문을 듣고자 온 일반 불자님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작은 깨달음의 길을 하나 제시하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답게 살아라라는 것입니다. -답게 사는 것이란 자신의 본분에 맞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교수는 교수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 답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인은 정치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수는 명예를 그 첫 번째 덕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그 본분인 학문에 전념하고, 학생들을 잘 지도하는 것이 교수답게 사는 것입니다.

학생도 교수님들의 가르침을 잘 받들어 학문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학생답게

사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경제시국에 우리가 무엇보다도 굳게 가져야할 자세는 이 답게입니다. 정치인도 당리당약에만 치우쳐 국민들의 어려운 상황은 아랑곳 않는 것은 정치인 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분들도 초발심자경문을 독송, 수지 하여 답게 사는 이치를 배웠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오늘 신임 교수와 조교들은 이 자리에서 수계를 받을 것입니다. 이 수계를 받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종교의 입장으로써 부처님의 제자됨을 엄숙히 약속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이때까지 지은 업을 소멸시켜 주는 정화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즉,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를 한다면, 수미산 같은 많은 죄가 있어도 일시에 소멸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수계의 의미는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앞서 말한 -답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계에는 오계, 십계, 250계 등 많은 계율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오계를 보면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음주하지 말라라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인간답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답게 사는 것이란 작게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지만 크게는 인간답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이 가르침을 계율로써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답게 살 때 진정한 불자요, 진정한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답게 살아 가는 동안 우리는 삶 속에서 크나 큰 깨달음을 향한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여러분도 이 말을 깊이 새겨, 항상 자신을 다스리는 불자가 되기를 노력하십시오.

 

 


 정각도량
계(戒)와 율(律)/최 법혜스님

 

지난 10월 16일은 제6회 전 동국인 수계대법회의 큰 행사가 문무관(文武館 : 체육관)에 서 거행되었다.  교·직원, 조교, 학생, 일반 신도 등 모두 1,397명이 재가 5계(Panca-Sila)를 받았다. 이날 수 계대법회에서 계(戒)를 설해 주신 전계(傳戒) 대화상(大和尙)은 오녹원(吳綠園) 재단 이사장  큰스님이시고, 수계대법회를 증명해 주시는 두 분의 법사스님은 배도원(裵道源) 재단이사 큰 스님과 이성타(李性陀) 불국사 주지 큰스님이셨다.

계(戒란 ; Sila)란 습관·본성 등의 뜻으로 좋은 습관, 즉 착하고 보람 있고 바람직한 결과가 있는 행위의 실천을 말하며, 사회에서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의 윤리관으로써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율(律 ; Vinaya)이란 사회의 법률과 같은 성격으로써 금지(禁止)와 조치(調治)의 뜻 을 가지고 있다.

  원래 이 계와 율의 용어는 그 내용의 성격상 합해질수는 없지만, 율장에서는 계의 정신으

로 율을 지킨다라고 하여 계율이라는 합성어가 사용되었다. 출가의 비구·비구니에게는 계와 율이 적용되고 재가의 우바새(남신도)·우바이(여신도)에 게는 계만 적용된다. 그러므로 비구·비구니가 범계(犯戒)를 하면 승단으로부터 벌칙이 부과되지만, 재가신도에게는 승단으로부터의 벌칙은 없다. 다만 신도 스스로 참회하고 다시 발심하여 생활하면 되는 것이다.

  출가와 재가는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하였다. 출가 스님들은 재가신도들의 공양으로 수행을 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전해 주고, 재가신도들은 3보를 공경하고 출가 수행자를 4사공양(음식·의복·망사·약)으로 후원하여 불법을 유지 존속케 한다. 만일 신심이 돈독한 재가신도를 어떤 비구가 비난을 하여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면 출가 승단은 갈마(塏磨 ; 회의)를 하여 그 비난을 한 비구를 데리고 그 신도의 집에 가서 잘못을 사죄(令謝罪)하게 한다. 반대로 어떤 재가신도가 승단을 비난하고 비구를 모함하여 승단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면 승단은 역시 갈마를 하여 그 신도 집에는 걸식(乞食 ; 지금의 화주)을 하러 가지 못하게 하였다.

  청정한 화합대중은 서로 올바른 윤리관과 가치관으로 탁마(琢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수계법회에서 계를 받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청정한 삶을 위하여 계와 율을 받아 지키는 이

다.

 

 

 


특집1/장례문화
화장문화의 확산을 위한 제언/한보광

 

우리 나라의 장묘문제는 문화, 시설, 제도적인 면에서 심각한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장묘시설을 혐오시설로 인식하여 자신의 생활권과는 멀리 떨어진 곳을 원하고 있으며, 지역이기주의로 인하여 화장장, 납골공원이 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조상에 대해서는 관대하여 무허가, 무연고, 호화분묘 등의 불법 묘를 양산하고 있으며, 통계적으로는 화장을 원하면서도 자신이나 부모에 대해서는 실천하기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민의식을 전환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적절한 규제와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외국의 사례도 소개하고 시범적인 장묘시설을 조성하여 이제는 더 이상 혐오시설이 아님을 인식시켜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장묘관련시설을 우리들의 생활시설 중 일부로 받아들여 자연공간, 휴식공간, 도시공원시설의 일환으로 정착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기 위한 현행법령의 개정은 탁상공론 식이나 국민적 지지를 얻어 어려운 급진적인 개정보다는 현실적이고 자율적인 선택이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통과 의례는 법률적인 통제보다 종교적인 의례에 의한 선택이 가능하도록 자율적으로 풀어주어야 하며, 화장 후의 처리문제에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화장과 납골시설에 대한 과감한 발상의 전환의 필요합니다.

  우선 용어상으로 시체를 매장하는 묘지, 납골시설 건축물인 납골당(納骨堂), 개별 납골시설인 납골소(納骨所), 납골소를 집단적으로 조성한 납골공원(納骨公園)등 새로운 용어 정의를 통하여 묘지관련시설을 구분함으로써 각각에 대하여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여야 합니다.

  현행법률에서는 납골시설로는 납골당만을 규정하고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납골시설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를 개선하여 납골탑, 가족탑 등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납골은 묘지설치 금지구역을 과감히 해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수원보호구역이나 주택가 등에는 금지하고 있는데 납골탑이나 공원은 가정, 종교경내지, 회사, 교육기관, 공공기관 등의 정원에도 유공자를 위해 흉상을 세우듯이 설치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전의 허가제를 신고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련법의 개정으로는 〔국토이용관리법〕과 〔도시계획성〕상의 묘지시설과 납골시설을 분리하고 납골시설에 대해서는 규제를 완화해야 합니다. 따라서 〔국토이용관리법〕에서는 집단납골시설의 경우 도시지역, 준 도시지역, 준 농림지역, 농림지역의 임야에서는 설치가 가능하도록 하여야 하며, 〔도시계획법〕에서는 묘지설치 가능지역을 기존의 매장에 대해서는 그대로 적용하시켜야 하지만, 납골시설에 대해서는 지역의 제한을 폐지하여 자유로이 설치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ㄱ. 지도층의 솔선수범

  얼마전 중국의 지도자였던 양상곤은 화장을 유언하였으며, 등소평 역시 화장하여 홍콩 앞 바다에 뿌리도록 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나라에서도 고최종현 선경그룹회장이 화장을 유언으로 남겨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몰지각한 지도층의 인사 중에는 아직도 조상의 묘지단장과 호화분묘를 출세의 상징처럼 여기고 있으니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최근에 우리 국민들도 화장에 대한 찬성의견이 50.1퍼센트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찬성이 자신이나 가족의 화장과 직결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즉 남이 화장하는 것은 찬성하면서도 자신은 매장을 원하고 있으니 아직도 사회적으로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는 못한 실정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화장율은 22퍼센트 정도이지만 점차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지도층이 적극적으로 솔선 수범한다면 국민적인 공감대를 널리 확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제 부의 상징인 재벌의 총수들은 화장을 유언하여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도 정계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요인, 장차관, 국회의원, 학계, 언론계, 유명연예인, 종교계 등의 지도급인사들이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ㄴ.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졸지에 부모의 상을 당하게 되면 장례절차문제로 의견이 분분하게 됩니다. 형제간이 많을 경우나 종교가 다를 경우에는 서로 의견이 달라서 난처한 상황에 처하 기도 합니다. 특히 부모의 장례식을 앞두고 자손이 화장하자고 선뜻 말을 꺼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장례절차에 대해서는 평소 밝혀두는 것이 자손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신이 죽으면 화장이라고 하는 유언을 남겨둔다면 자손들은 부모의 뜻에 따라 쉽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장을 원하는 경우에는 장기기증운동과 같이 범사회적인 국민운동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예견하여 동국대학교에서는 1996년 9월 18일 장묘제도개선을 위한 세미나에서 이 운동을 제언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 확산하고 있는 화장 서명운동은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몇 일전에는 서울시장이 주최하여 각계각층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운동은 사회 단체뿐만 아니라 정부의 각 부처에서도 솔선 수범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자신의 사후에도 자손에게 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자신이 죽고 난 뒤 후손들이 나의 묘지관리 때문에 오랫동안 걱정한다고 생각할 때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장 상으로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이 거북스러우면 화장 서명운동 혹은 후손 짐 덜어 주기 운동 등으로도 좋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화장문화를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좀더 적극적으로 한다면 지금까지 조상의 산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한 군데로 모으는 운동입니다. 즉 조상의 산소를 모두 화장하여 가족 납골 탑이나 납골 묘로 만든다고 하면 추석이나 성묘 때 교통난은 말할 것도 없고 후손에게도 큰짐을 줄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장묘문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전환을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해보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매장에서 화장으로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새로운 화장문화의 확산을 위해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잘못된 제도로 인해서 화장을 기피한다면 과감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또 새로운 인식전환을 위해 지도층이 솔선 수범해야 하며 이를 화장 서명운동과 같은 범국민적인 캠페인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의 의식전환으로 후손에게 짐이 되지 말고 아름다운 국토를 물려 주도록 합시다.

 

 

 


특집2/장례문화
장례방식과 국토보전/오홍석교수

 

  모든 생명체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의 법칙이다. 불교계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을 주창해 왔으므로 보다 발전된 모습이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시종(始終)의 관점에서 단순화하지 않고 중간과정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발된 종교적 단면을 보이는 증거이기도 하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 바라보면 애석(哀惜)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보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추모의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죽은 이의 존재를 요괴시(妖怪視)하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까닭에 예우로서 재앙을 막으려고도 시도했다. 여기에 시신(屍身) 처리는 경건한 절차 속에서 집행됐고, 장례(葬禮)라는 의식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장례 의식은 지역이 갖는 다양한 환경에 따라 서로 차이를 드러낸다. 장례도 문화형태인 이상 인간으로 하여금 환경에 적응(適應)하며, 활동 결과로서 표출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화는 우열을 평가하는 절대기준이 없고, 나름대로의 존재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장례에 한정시킬 때 지역과 민족에 따라 다양성을 표출하게 된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야장(野葬)이 일반화 되어 있다. 시신이 들판에 버려진 상태이므로 효도를 중요시 하는 한민족의 시각에서는 불효(不孝)로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유랑생활에서 정처(定處)는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메마른 들판이 오히려 시신의 영속보전을 돕는 환경임을 잊어서 안 된다. 티벳고원에서는 조장(鳥葬)이 탁월하다. 날짐승의 먹이를 위해서 불교적 육신공양(肉身供養)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해군의 시신은 수장(水葬)을 하고 있다. 미국의 태평양 연안에서는 배와 비행기로 육신을 태운 재를 바다와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다.

  이것은 화장(火葬)을 전제한 것이지만 물과 바람이 합쳐졌으므로 복장(複葬)성격을 띤다. 대왕암(大王岩)에 안치된 문무왕릉은 불과 물이 겹쳐진 관계로 이것 또한 복장형식이다. 이런 점에서 장례방법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통용되는 불교의 네 가지 근원적 물질로 시신을 회귀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인도는 열대에 위치하므로 무더움의 상징지역이다. 무더운 환경에서 생명체가 숨지면 금방 부폐하고 이그러진 모습은 혐오감마저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염병의 온상이 되므로 화장 이상의 장례방법은 없다. 불교적 장례는 다비(茶毘)로 표현하지만 인도방식의 화장과 등식으로 인식해 왔다. 그것은 발생지의 문화형태를 그대로 이어온 데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시신매장을 위해 2차적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체를 구제하는 데 있다. 참다운 자비의 실천, 미물의 생명까지 존중하는 불살생(不殺生)의 불교정신을 구현한 장례방법이다.

  장례문화도 환경의 소산물임을 전제할 때 여름 한 철에 불볕더위가 실재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땅 속에 매장하는 것이 알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장묘의 전성시대는 풍수설이 전래되면서 열어 갔다. 지덕(地德)의 효과를 살려 죽은 이를 편안히 쉬게 하는 한편, 후손에게 번영을 안겨 주는 이중적 소망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역대 왕조를 통한 신분제도의 강화가 이 땅에 매장문화를 탁월하게 만들었다. 계급제도가 사라진 오늘날에도 국립묘지에는 장군묘역과 사병묘역 사이에 차별을 두고 있다. 이것은 헌법상에 평등을 보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왕조의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적 모순을 그리고 있다. 더욱이 사병묘역은 한 평의 땅으로 제한된 까닭에 시신의 압축방법을 강구하지 않고는 매장할 수 없다. 이것이 화장제의 적용이므로 화장은 토지면적을 최

소화하면서 서민층의 장례방법으로 머물게한 요인이 되었다.

  불교의 전래과정에서 화장묘가 한국에 도입되었고, 스님들이 머무는 사찰경내에 부도(浮屠)의 모습으로 드러났으며, 세간으로 파급되지는 못했다. 다만 통일신라의 기초를 닦은 문무왕과 같은 선각자에 의해서 솔선했을 뿐이다. 그것은 지수화풍의 취합으로 생명이 태어나고, 이산(離散)으로 생명이 없어지는 우주의 이치와 불교 교리를 통달한 데서 가능했다. 여기에다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가전영세(可傳永世)의 화장묘역 조성 유혹도 뿌리쳤던 것이다. 참다운 나라 사랑과 백성을 아끼는 군왕의 도리를 보여줬으므로 오늘의 난국에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

  현재 우리들의 상황도 태평성세는 아니다. 협소한 국토에다 분단의 비극이 걷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상대적으로 인구는 과밀(過密) 상태에 있으므로 토지난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와 있다. 토지난은 집이든, 유택(幽宅)이든 간에 국민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줄여가며 부담한계를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식은 조선시대에 머물고 고대광실과 호화묘지를 선호하고 있다. 이런 사회풍조가 만연될 때 국민 모두가 살아가는 국토의 보전은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국토는 현존하는 세대에 의해서 좌우되는 전유물이 아니다. 삼세(三世)에 걸쳐 영속 번영을 지탱해 나갈 터전이다. 그러기에 최소화된 토지공간에 시신매장이 가능한 탑묘(塔墓) 조성과 화장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장례방법이다. 이를 위해 삼림훼손으로 이어지는 전통적 화장법 법을 지양하고 가스연료에 의한 최신식의 소각시설을 도입하며, 화장에 솔선하는 가구에 국가적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과 제도 개발도 중요하다. 따라서 최근 화장을 유언으로 실천한 어느 재벌총수의 경우처럼 불교 종립대학에서 시범을 보이고 국민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성을 안는다.

 

 


화엄경의 세계/이도업 스님

 

  지난 번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 궁극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부처란 무엇인가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았다. 화엄경에서는 그것을 법신불(法身佛)로 설명하고 있 다. 이번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와 같은 범부중생이 그와 같은 법신불이 될 수 있을까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법신불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믿음(信)이요, 둘째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이요, 셋째는 깨끗한 원(淸淨願)이요, 넷째는 무진애(無瞋牢)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일체의 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지혜와 공덕을 갖추고 있음을 믿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은 본질적으로 모두 부처다라고 하는 절대자각(絶對自覺)을 말한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또 하나의 믿음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부처가 되려면 먼저 내 자신이 본래적으로 부처다라고 하는 절대자각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자기 확신이 서야 한다.

그와 같은 확신이 서면 저절로 발심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발보리심이다. 법신불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 발보리심이다. 발심을 한 후에는 청정하고 확실한 목표를 세워야 하는데, 이것이 청정원이다.

  목표란 어떤 목표인가, 한마디로 요약해서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겠다는 원(願)을 말한다. 부처의 지혜와 공덕과 대비행(大悲行)을 성취하겠다고 하는 자기 완성의 수행과 일체중생을 내 몸과 같이 보살피겠다고 하는 다짐이 청정원이다. 무진애란 진심, 즉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생을 섭수해서 제도하려고 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법장스님은 보살은 백 천 가지의 탐심을 낼지언정 단 한번이라도 진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을 보살이라고 한다.

  불교의 교의는 일의적(一義的)이 아니라 다의적(多義的)이며, 고정적(固定的)이 아니라 유동적(流動的)이기 때문에 보살이라는 개념도 일의적이거나 고정적이 아니다. 다의적이며 유동적이다. 따라서 보살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서원의 보살이 있다. 서원의 보살이란 깨달음을 남에게 주고자 하는, 혹은 남을 깨닫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보살을 말한다. 둘째, 부처의 기능을 대신하는 부처의 대역자로서의 보살이다.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 보살, 실천행을 상징하는 보현보살, 자비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 등을 말한다. 셋째, 구도(求道)의 보살이 있다. 법신부처를 성취하기 위해서 향상의 一路를 추구해 가는  사람을 말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와 같은 사람을 말한다. 이 사회를 정의롭게 하고 청정한 국토로 만들기 위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모두가 구도의 보살이 되어야 한다.

  지금 필자가 쓰고 있는 화엄경의 두 번째 이야기는 보살사상에서의 보살은 선재동자와 같은 구도의 보살을 말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와 같은 죄악심중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본래로는 부처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때로는 욕심내고 때로는 성내고, 연기(緣起)의 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의 중생이 어떻게 하면 부처를 이룰 수 있을까.

  화엄경에서는 우리가 추구해 가야 할 길(道)과 실천해야 할 행(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생의 단계에서 부처의 위치에 이르는 길(道)의 구조를 52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전문용어로 말하면 10신(信)·10주(住)·10행(行)·10회향(廻向)·10지(地)·등각(等覺)·묘각(妙覺)의 52단계가 있고, 그 다음에 구경의 부처자리(佛位)가 있다.

참으로 멀고도 험난한 길인 듯 하다. 그러나 일즉일체(一卽一切)며 일성즉일체성(一成卽一切成), 즉 하나가 곧 전체며, 하나를 확실하게 이루면 일체가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화엄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깨끗한 믿음(淨信)의 그 자리가 곧 구경의 부처자리임을 알아야 한다.

  화엄경에는 이들 52단계의 이름과 실천행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 그 실천행만을 소개하고자 한다.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명법품」에서는 청정한 10바라밀로 요약해서 설하고 있다.청정 10바라밀이란, 첫째 서로 나누어 가짐의 생활(布施)이며, 둘째 윤리성에 입각한 생활(持戒)이며, 셋째 어떤 난관이 닥쳐도 참고 견디는 생활(忍辱)이며, 넷째 부지런히 노력하는 생활(精進)이며, 다섯째 산란하지 않은 생활(禪)을 말한다. 여섯째 지혜로 사는 생활(般若)이며, 일곱째 상황윤리에 따른 생활(方便)이며, 여덟째 원을 가지고 사는 생활(願)이며, 아홉째 수행의 힘에 의지해서 사는 생활(力)이며, 마지막 열 번째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동체의 대비지(大悲智)에 사는 생활(智)을 말한다.

불교에는 구경의 성불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정토교학에서는 청명염불을, 선종에서는 좌선실수를, 진언종에서는 육자진언의 주력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들과 비교하면 화엄경에서 말하는 구경성불에의 길은 좀 다르다. 특정의 사람이 특정의 장소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다양한 일상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김복순 금장생활관장/편집부

 

  기자 : 늦었지만 먼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취임하시자마자 전동국인 수계대법회라는 큰 불사에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요,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복순 금장생활관장 : 이번 수계대법회는 올해 뿐만이 아니고, 2-3년 전부터 대규모로 동참했었는데, 생활관에 입관하는 조건으로 수계를 받은 학생을 원칙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앞에 금장생활관장을 역임하셨던 김 동협 교수님께서 기초를 완벽하게 다져 놓으셨기 때문에 제가 많이 힘쓴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매일 아침 예불에 참석해서 학생들과 동참한 점과 남동 여동에 계시는 법사스님들께 이미 수계 받은 학생들도 다시 동참할 수 있는 인연을 심어 준다는 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고, 이미 수계 받은 학생들의 거부감도 없지 않았습니다만은 수계대법회가 성황리에 봉행될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여러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기자 : 관장님께서는 매일 아침예불에 참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김복순 금장생활관장 : 처음 2주는 남동의 예불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여동에서의 불미스런 사고로 말미암아서 더욱 견고히 신심을 다진다는 뜻도 있고, 하루를 설계하고 스스로를 정리하는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서 아주 즐겁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기자 : 여러 가지로 바쁘시겠습니다. 힘든 점이 많으셨지요.

  김복순 금장생활관장 : 9월 1일에 발령을 받았지만, 9월 3일부터 생활관 업무를 보게 됐습니다. 제가 신라문화연구소에서 간사 일을 맡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신라문화제라는 큰행사가 있었고, 수계대법회와 강의문제로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바쁘다 보니까 강의 내용을 충분히 준비해서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강의를 할 수 없었던 것이 미안할 뿐입니다.

  기자 : 800여 명이 생활하는 이곳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관생이 많을 것 같습니다. 금장생활관 관생들의 생활방식이나 자체 규율에 있어서 개선되어야 하거나 바라는 점이 있으시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습니까?

  김복순 금장생활관장 : 그런 행동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기는 어렵고, 생활관의 방침은 일단 학생들이 부모님이 계신 집을 떠나 있는 상태니까 이곳의 생활 자체가 집에서의 생활처럼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끔 관장 이하 직원, 사감 모두가 사생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소수에 불과한 몇 사람이 전혀 남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관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옷을 입는다든지,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라든지, 귀가시간에 조용히 들어온다든지 이런 사소한 것들을 지켜 주는 예의가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관생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생활관 자체의 규율을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생활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기자 : 관장님께서는 사학자로서 화엄사상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화엄사상에는 어떤 매력이 있습니까?

  김복순 금장생활관장 : 저의 박사논문이 신라 화엄종의 연구입니다. 책도 같은 제목으로 냈습니다. 저는 사학자이니까 사상쪽으로 조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사적으로 연구를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최치원에 관한 연구로 논문을 서너 편 쓰게 되었는데, 최치원의 저서 가운데서 화엄종에 관한 저술이 많이 있습니다. 최치원 자체를 연구하다가 그의 저술 속에 보이는 신라불교, 그 중에서도 특히 화엄종을 연구하게 된 것입니다.

  기자 : 관장님의 법명이 보현(普賢)이라고 하셨는데요, 부처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되었습니까?

김복순 금장생활관장 : 할머니께서 절에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저의 형제가 7형제인데 어릴 때부터 유독 저를 자주 데리고 절에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고 2학년 때 불교학생회 창립 회원입니다. 그 해 여름에 용주사에 수련대회를 갔었는데 그 때 주지였던 정무스님께서 보현(普賢)이라는 법명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수계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그 법명을 그대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을 좋아하고, 또 속에 담아 두는 성격이 못되어서 공개적으로 일을 의논하고 처리하고 싶습니다.

  기자 : 관장심께서 평소에 좋아하는 경구(經句)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김복순 금장생활관장 :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이 경구를 보고 나같이 집착이 많고 애착이 많은 사람은 반드시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담아서 과거의 생각에만 집착하지 말고, 항상 새로운 마음을 갖고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겠구나. 그렇게 마음을 다집니다. 일을 많이 벌리면 욕심이 많아지고, 욕심이 많다는 것은 집착이 많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에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하셨고, 그리고 예를 들어서 옛날에 임금이 궁중 속에서 비밀스럽게 지낸 일도 몇 백년 후에 우리가 TV를 보면서 다 알게 되듯이 하나하나의 일들이 숨길 것이 없고,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를 대할 때 상대방도 나에게 느낌으로 통해지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관장이나 직원이라는 관계를 떠나서 자기 위치에서 일을 열심히 한다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잘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자 : 바쁜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금장생활관의 관생들에게 부탁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김복순 금장생활관장 : 지금 금장생활관이 위치한 자리(제가 풍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는 산세가 좋고, 생활관 맞은 편이 옛날의 석장사지였으므로 이곳에서 임신서기석이라는 비문도 나왔고 해서 우리 관생들은 이런 좋은 곳에서 아침 저녁으로 예불 소리도 듣고, 심신을 단련하고 공부에 수련을 박차를 가하여 이곳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후에 큰 동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불심의 창
그래도 우리는 기도를 한다/백경선

 

  스스로 깨닫지 못한 진리를 깨달은 척 하는 행위는 不妄語의 戒를 어긴 죄가 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글을 쓴다. 生存을 위한 인간생활에는 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세계에 접근하는데 많은 장애물이 있는데, 시시각각 닥치는 生存에 대한 위협, 물질주의와 쾌락의 誘惑, 거기에 사랑하는 이성에 대한 걱정, 친구 걱정, 남 걱정, 나라 걱정,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혼까지도 걱정을 하는 것이 자연

스러운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고 애착과 욕심을 버려도 될만큼 현실은 여유롭지도 못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나약한 모습은 더더욱 우리들을 허무주의자로 만들기 쉽다.

  이것들을 이겨내기 위한 願力이 아무리 원대해도 갈등과 번뇌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또 한 평범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욕심과 절제의 조화가 곧 행복한 삶이 아닌가 싶다. 낙엽지는 가을밤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수에 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쓸쓸하다 못해 눈물이 나도록 공허한 인생을 곱씹으며 冥想에 잠기는 시간이 요즈음 부쩍 늘어난 것 같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이 너무 크기도 하지만 혼탁한 삶을 잔잔하게 꾸짖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때면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나는 佛法의 網을 피해갈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나는 가족과 함께 주말을 이용해 山寺를 자주 찾는 편이다.

특별히 기도 도량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절 공기만 마시고 오는 편이다. 하는 데도 초등학교 6학년 짜리 아들녀석은 제법 사고 방식이나 논리가 다분히 불교적이다.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祈禱를 강요하는 담임선생에 반기를 든다던가, 불교를 폄하는 아이들과 논쟁을 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빙긋이 웃고 만다. 왜냐하면 더 이상 불교에 대해서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많이 아는 척 하고, 많이 재고,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아빠의 모습보다 훨씬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보다는 부처님 마음을 가까이 하는 모습-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보다는 남을 아껴 주고 사랑하는 마음-이것이 참다운 불교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三寶에 귀의하고 우러나서 念佛을 한번이라도 하게 되는 순간, 누구라도 보살의 길로 들어선다고 法華經은 설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허망한 욕심과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젊은 날의 초상을 결코 그리워 하지도 부끄러워 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걱정은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도 극히 적지만 그래도 우리는 祈禱를 한다. 평범한 사랑보다는 역경을 이겨낸 사랑이 아름답다. 성공도 고난을 이겨낼 때 더욱 더 돋보이듯이 시절이 어렵고 생활환경이 요즘처럼 혼탁할 수 록 부처님께 더 열심히 祈禱하고 身口意 三業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금부터라도 자세를 가다듬어야 겠다.

 

 


가람의 진수
단군성지 마니산의 전등사(傳燈寺)/유문용

 

 

  전등사가 있는 산이 마니산 줄기에서 뻗어 나온 정족산이라고 하는데 꼭 산봉우리에 생김새가 솥에 3개의 발이 달린 것이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마니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고 단군의 3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이 있다.

  전등사라는 말은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원비(元妃)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옥등(玉燈)을 시주로 전해줬다고 해서 전등사라고 한다고 한다. 지금 이 절에 옥등은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이 절이 처음 세워지게 된 것은 고구려 시대에 불교가 전래될 때인 소수림왕 11년 372년에 아도화상이 절을 짓고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고종 46년 1259년에 삼랑성에 가궐을 짓게 하고 고려 충렬왕비인 정화궁주가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인출을 해 가지고 여기 진종사에 보관을 하고는 원찰로 삼아 크게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이때 정화궁주가 원나라에서 가지고 온 옥등을 이 절에 시주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오면서 선조 38년 1605년에 화재가 나서 크게 손실이 있었다고 하고 광해군 6년 1614년에 또 큰 화재가 있어서 거의 모두 소실이 됐다고 한다.광해군은 이내 중창 불사를 일으켜서 1621년에 다시 사세를 확충하였는데 옛같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현종 1년 1660년에는 여기에 선원전과 장사각을 향산에서 옮겨 짓고 숙종 4년 1678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시작했는데 이 전등사에서 이 중요한 사고(史庫)를 지키는 역할이 있어서 왕실에 보호를 받게 되고 원찰로 승격이 되어서 사세가 번창하였다고 한다. 영조 25년 1749년에 또 한번 대 불사가 이루어져서 사세가 확장되고 그 이후에도 많은 중 보수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 사고에 보관되고 있던 왕조실록은 1909년 일제시대에 총독부로 옮겨져 있다가 창경궁 안에 있었던 규장각에 보관되고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이후에 사고는 없어졌고 지금은 사고지만 전등사 인근 뒷산에 남아 있다.

이 전등사가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때에도 큰 역할을 한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특히 그 흔적을 알아볼 수가 있는 것이 동문밖에 있는 양헌수에 승전비가 있어서 알 수가 있다. 이 승전비는 병인양요때 양헌수라는 사람이 명사수인 사냥꾼 5백명을 거느리고 프랑스군과 대적을 해서 승전을 했다고 하는데 이때 격전지에 나가면서 대웅보전에서 결사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때 대웅전 안에 사방에 돌아가면서 결사에 표시로 벽면에 묵서명으로 이름들을 써놓고 갔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묵서명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부처님을 모시는 가람과 나라에 사보(四寶)를 관리하고 있었던 가람, 그리고 국난이 있을 때 결사에 가람이었던 여러 면모를 볼 수가 있다.

  전등사 남쪽 입구에는 삼랑성(三郞城)에 안내판이 있다. 사적 130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단군에 3아들이 이 성을 쌓아서 삼랑성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 성문은 삼랑성에 문이지만 다른 절에서도 이렇게 성문 식으로 된 문이 있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도 성문양식의 산문이 있고 금산사에서도 무너지기는 했지만 이런 성문자리가 있다. 이런 성문 양식의 산문은 왕사나 국사 또는 나라의 원찰인 경우에 나라에서 허용하는 것이다.

이 남문에는 종해루(宗海樓)라는 액호가 붙어 있다.이 문루의 건물은 영조 15년 1739년에 건립되었다가 다시 소진되고 1976년에 콘크리트로 다시 복원을 해놓은 것이다.

  처음 만나는 집이 대조루(對潮樓)이다. 대조루는 지방문화재 자료 제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대조루가 처음 지어진 것은 상량문 기록에 보면 영조 25년 1749년에 중창이 됐고 헌종 7년 1841년에 다시 중건이 되었다고 하고 1916년에 수리를 하고 1932년에 다른 전당들과 같이 중수가 되었다고 한다.

  요즘은 옛날 같이 여기에서 예불에 참례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대부분은 편의에 따라서 사용을 하고 있다. 여기 전등사에서도 지금은 불구(佛具)를 파는 불구판매점으로 활용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사물에 목어와 법고가 그대로 걸려 있고 이 전등사에 전부터 있었던 전각들에 현판들이 걸려있고 각 전각에 상량기, 개금불사 개연기, 시문객들의 찬송시 같은 현판들이 수없이 달려있어서 전등사에 역사가 이 집에 모두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대조루 왼편에 범종루가 있다. 범종각 안에 있는 범종은 우리나라에 종이 아니고 중국에 범종이라고 한다. 일본이 중국에서 이 범종을 약탈해 가지고 일본으로 가지고 가던 중에 부평 병기창에 두었던 것을 광복 후에 아주 독실했던 우리 불자님이 이 범종을 전등사로 갔다 놓았다고 한다. 이 범종에 새겨진 명문에 보면 중국에 북송이라는 나라에 철종 4년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고려 숙종 2년 1097년에 중국 회주 수무현의 백암산에 있던 숭명사라는 절에서 주조를 했다고 되어 있다. 이 절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고 봐야 하는데 낯선 이국 땅에 와서 보물로 정해졌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중국에 종이 우리나라에서 지정된 것도 유일한 것이지만 학술적으로도 아주 귀중한 것이라서 이렇게 지정까지 된 것이다. 이 범종은 우리나라에 범종과 비교해 보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전등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이다. 이 대웅보전은 보물 1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조선조 광해군 13년 1621년에 중건이 되었다고 하고 철종 6년 1855년에 대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집에서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는데 4모퉁이 귓기둥 위에 짜여지는 포작 위에 추녀를 받치고 있는 사람 형상을 볼 수가 있다. 처마 밑에 사람을 조각해 놓은 그 유례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것이 꼭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그렇고, 옷을 입지 않은 것을 보면 원숭이 같기도 한데 여기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가 더 재미있다.

이 법당을 짓던 도편수가 공사를 하는 동안에 어떤 미모에 여인과 사랑을 나누게 됐다고 한다. 집을 지으면서도 그 여인에게 그동안에 벌었던 전 재산을 모두 받쳐서 사랑을 했는데 집이 거의 다 지어가니까 이 여인이 모든 재산을 가지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그러니 이 도편수는 처음에는 실망이 커서 일도 부진하고 했는데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 짓는 일에 전념을 다해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그 여인이 괘씸하고 분해서 생각해 낸 것이 그 여인이 평생을 두고 그 무거운 지붕에 추녀를 받치고 있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여인을 조각해서 추녀 밑에 받쳐놨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렇더라도 아무리 집짓는 목수라고 해도 설마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에 이렇게 여인을 그것도 나쁜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했으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 목수가 자기가 법당을 지으면서 여인을 사랑을 하고 정신을 팔았다는 것이 오히려 가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비록 자기를 배반을 하고 매정하게 떠나버렸지만 그래도 그 인생이 불쌍해서, 그 악연을 내세에까지 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여인에 모습과 자기에 모습을 조각을 해서 평생을 부처님에 법당을 조금이나마 받들고 있는 것이 속죄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법당 안에는 삼존불이 계시는데 법당과 같이 협시보살님을 모신 삼존불이 아니고 석가모니에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수인으로 봐서는 양편에 계신 작은 보처불이 아미타 부처님과 같이 보이지만 여기서는 석가삼존불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보면 영조 37년 1761년에 개금불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석가삼존불이라고 한다.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고종17년 1880년에 효월당 유담대사가 사주로 그려 모셔졌다고 한다.

  부처님이 계시는 수미단도 아주 화려하고 장엄을 갖춘 불단인데 조선중기에 지어진 대웅보전과 같은 년대로 보이는 격식을 잘 갖춘 그런 불단이다. 이 수미단과 같이 보궁인 닫집도 매우 훌륭하다. 화엄경에 보면 부처님 나라에는 33천이 있는데 그 중에 도리천에 보면 수미산이 있고 그 위에 보궁을 짓고 그 안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다고 했으니까 닫집을 보궁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이 닫집의 천정에 보면 극락조나 용이 있고 거기에는 구름이 곁들여 있으며 대개는 입체적인 조각으로 되어 있다. 구름이나 용 또는 극락조가 보궁 안에 있다는 것은 천상이 되니까.

  그 보궁이 얼마나 높고 크다는 상징이 될까? 따라서 부처님이 계시는 집은 수미단 위에 보궁이 있는 곳이 되고 대웅전이라는 건물은 예불당이 된다는 말이 된다. 이 법당 안에 묵서명의 낙서가 많다고 했다. 기둥이고 창방이고 평방 할 것 없이 빈틈없이 먹글씨가 써져 있다. 낙서의 상태가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막 써놔서 꼭 무지했던 시절에 관람객이 와서 막 써 놓고 간 것으로 보인다. 더러는 퇴색되고 더러는 글이 없어져서 알아 볼 수 없는 상태여서 더 지저분하게 보인다.

  1866년 고종3년 병인년에 프랑스군함이 강화에 침공을 해서 점령을 하려고 할 때 양헌수라는 사람이 사격에 명수인 사냥꾼들 500명을 모아서 대적을 했다고 한다. 결국은 승진으로 이끌었다고 하는데 이때 포수 500명이 이 법당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결사의 표시로 법당 안에 자기의 성명을 써놨다고 한다. 이 포수들이 명필도 아니었을 것이고 나름대로 이름석자를 썼을 테니까 낙서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호국정신을 높이 평가해서 아직까지도 묵서명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보존을 한다고 한다. 명부전은 영조43년 1767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건축의 양식은 조선조 후기에 모습을 갖추고 있어서 많은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 명부전에는 지장보살님을 비롯해서 10분에 시왕, 그리고 판관, 록사, 인왕할 것 없이 온통 법당 안이 꽉 차고 그 뒤에도 각 탱화들이 가득해서 빈틈이 없다.여기 명부를 다스리고 계시는 지장보살님은 지옥중생만 다스리는 분은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부터 미륵부처님이 나타나실 동안 이 세계에 계시면서 육도의 중생들을 교화시키실 원력으로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다. 이 육도라는 것은 모든 중생이 지은 업보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갈곳이 정해져 있다는 6가지의 길을 육도라고 하는데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에 모든 중생을 말한다. 아귀는 부처님의 계율을 어겨서 가는 곳인데 목구멍이 바늘구멍같이 작아져서 음식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앙상하게 마른 귀신이 된다고 한다. 수라는 아수라(阿修羅)라고 해서 항상 싸움만 일삼는 귀신인데 요즘도 온통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고 아수라장 같다고 한다.

  육도 중에서 비교적 고통이 적고 좋은 여건을 갖춘 천상과 인간, 아수라를 삼선도(三善道)라고 하고, 고통이 심하고 최악에 여건을 갖춘 축생, 아귀, 지옥을 삼악도(三惡道)라고 해서 구분을 하고 있는데 삼악도의 상징으로 무독귀왕(武毒鬼王)을 모시고 삼선도의 상징이 도명존자(道明尊者)가 있다고 본다.

  중앙에 지장보살님과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가 있는 주존불단 좌우에 십대왕과 판관, 록사들이 있는데 각 왕들의 뒤에 시왕도가 따로 있고 주존인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뒤에 지장탱화가 따로 걸려 있다.

  이 탱화가 그려진 것은 1884년 고종 21년에 그려진 것이다. 시왕(十王)들은 모두 역할이 다 다르다고 한다. 1대왕부터 10대왕까지 각기 소임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초 7일이 되는 동안 저승으로 가는데 제1대왕인 진광대왕 앞으로 간다고 한다. 여기서 또 7일 동안 제 2대왕인 초강대왕 앞으로 가게 되는데 강에 다리를 건너서 가게 된다고 한다. 또 7일 동안은 3대왕인 송제대왕 앞으로 가는데 아득한 험로를 가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7일 동안 4대왕인 오관대왕 앞으로 가는데 목에 칼을 메고 간다고 한다. 그리고 또 7일 동안 5대왕인 염라대왕에게 가게 되는데 드디어 생전에 지은 업보를 업경대에 비추어 보고 업보에 경중을 심판 받는다고 한다. 그 다음에 가는 곳이 6대왕인 변성대왕에게 가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 업보에 대한 문책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7대왕인 태산대왕 앞에 가면 49일이 되는데 이때는 이미 생전에 업보에 대한 판결이 나고 업보에 해당하는 육도로 가게 되는 판정을 받게 된다고 한다. 49제를 올리고 명복을 비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제 100일이 지나면 제 8대왕인 평등대왕 앞으로 가게 되는데 이 대왕 앞에서 형벌을 혹독하게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9대왕인 도시대왕 앞으로 가는데 이 대왕 앞에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하고 마지막 왕인 진륜대왕의 앞에 가는 것은 3년이 되어야 간다고 하는데 이로서 자기 업보에 대한 대가대로 육도로 환생을 하게 된다고 한다.

  명부전 문에 들어서면 양편에 인왕상(仁旺象)이 있다. 이분들이 수미산 입구를 지키고 있는 분이라고 하는데 입을 다물고 있는 분이 금강신(金剛神)이고 입을 벌리고 있는 분이 역사상(力士象)이라고 하고 또 왼편에 있는 분을 밀적금강(密迹金剛)이라고도 하고 오른편에 있는 분을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라고도 한다. 이 인왕상은 절에 들어가는 인왕문에서도 볼 수가 있지만 대개 법당 안에 계실 때는 명부전에 있게 된다. 이 명부전은 지장보살님이 계셔서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시왕이 계시니까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신행상담
신통력/장계환 스님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 아주 신나는 화제의 하나가 부처님의 신통력에 관한 내용입니다. 스님 말씀으로는 부처님께서 지니신 여러 위신력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습니다만, 좀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의 신통력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또한 지금은 왜 그러한 신통력을 볼 수 없는 것인지요. 그리고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이러한 신통력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과학대학 법학과: 강 진명)

 경전에서만이 아니라 옛 조사스님들의 일화에서도 신통에 관한 얘기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통력이 불교의 대명사처럼 생각되어 왔지만, 실은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신통력의 사용을 권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질문하신 신통력의 종류에는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천안통(天眼通)인데,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보는 능력을 말합니다. 또한 천안통으로 보면 미래의 과보까지도 알 수 있게 된답니다. 둘째 천이통(天耳通)은 보통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고, 셋째 타심통(他心通)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이 알 수 있는 능력이며, 넷째 숙명통(宿命通)은 숙세, 즉 과거의 인연을 환히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고, 다섯째 신족통(神足通)은 어디든지 걸림없이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는 능력이며, 여섯째 누진통(漏盡通)은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다시는 미망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이 누진통은 부처님만이 갖출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신통력을 단 한 가지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신통력을 마치 마술처럼 생각하여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든가 기적을 일으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든 길이 환히 다 보이듯이, 깨달으신 분에게는 모든 일체가 보이지만 우리들 중생의 식견으로는 다만 감지하지 못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단순히 허공을 날고 벽을 꿰뚫어 보는 신비적인 현상으로만 받아들이지 마시고 한번 생각을 바꾸어서 새로워진다는 의미로 해석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는 육근(眼耳鼻舌身意)의 지시에 따라 욕심과 불만으로 가득찬 이기적이었던 나였는데, 불교를 배우고 나서부터는 육근의 통제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점이 나쁘면 나의 태만으로 반성하고, 부유한 나보다 어려운 친구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자세 등, 이 모든 행동들은 분명히 이전의 자신 모습과는 다른 새로워진 모습입니다.

 가령 어린애들이 예전과 판이하게 다른 착한 행동을 할 때 어른들은 참 신통하다고 칭찬하지요. 그렇다면 열심히 수행하는 불자가 나날이 새로워진다면, 그 자체도 신통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이해하시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세요.

 

 


수행의 길
불교의 실천수행/정성본 스님

 禮拜(절)의 실천 수행

 合掌과 禮拜(절)는 불교 수행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합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각자 아름답고 향기로운 연꽃과 같은 자신의 인격을 만드는 실천수행인 것이다. 합장과 예배는 분리할 수 없는 실천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禮拜를 통한 불교의 실천수행을 살펴 보자. 불교의 禮拜偈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釋禮三拜 佛家의 禮拜인 삼배는 表三業致敬 身口意  삼업을 지극히 공경히 하여而歸依三寶 佛法僧삼보에 귀의함으로써得離三毒也탐진치 삼독을 여의도록 함일세.

불교에서의 예배(절)을 올리는 것은 三拜가 기본이 되고 있다. 三拜는 佛法僧의 삼보에 대한

歸依의 예배인 것이다. 그 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禮拜偈頌에서 읊고 있는 것처럼, 자

신을 위한 삼업청정의 수행임과 동시에 탐진치 삼독을 여의는 구체적인 실천행이라는 점이

다.

불교의 예배는 단순히 三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佛法僧 三寶에 귀의하고 貪瞋痴 三毒을 여

의며, 身口意 三業을 청정하게 하는 실천으로 9拜가 있다. 또한 53배는 懺悔를 관장하는 53부처님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가지고, 많은 세월동안에 지은 죄업을 참회하는 실천수행이 있고, 108배는 우리들이 무심결에 일어나는 108 번뇌를 소멸하는 실천수행의 예배도 있다.

賢劫一千 부처님께 공경심을 표하는 1000拜, 과거 현재 미래의 三大劫에 출현하는 부처님께 올리는 三千拜의 수행도 있다. 특히 하루에 삼천배를 올리는 禮拜의 수행은 자신을 진정한 수행자로 만들 수 있는 좋은 수행이 되기 때문에 성철스님은 많은 사람에게 권장하였다.

  단순히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 어떤 수행이 되는 것일까?

첫째로 我慢과 我相을 꺽고 각자의 무한한 福田을 이루기 위한 실천 수행이다. 인간은 자아의 입장을 강조하고 내세우는 我相 때문에 불화가 조성되고 화합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金剛經』을 비롯한 반야부 경전에서 한결같이 자신을 비우고 無我 無心으로 어디에도 집착없이 살도록 하는 無住의 실천행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와 입장을 텅 비운다는 것은 반야경전에서 강조하는 空의 실천인데, 각자가 직접 예배와 절을 통해서 이러한 경전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주위를 의식하고 체면과 자존심과 교만심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고 지혜와 인격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은 한푼어치도 되지 않는 자존심과 교만심의 사슬을 끊어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공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下心의 구체적인 실천을 절을 통해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의 아름다운 인격을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는 자존심과 교만심이 없어진 겸손과 공경심의 美德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맑고 향기로운 연꽃과 같은 사람이며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보살의 자비인 것이다.

『禪家龜鑑』에서「예배는 공경이요 屈伏이다. 眞性의 공경이요 無明을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法華經』에 전하는 상불경보살은 언제나 합장과 공경심으로 일체중생에게 예배를 올린 수행자였고, 『金剛經』에도 일찍이 부처님이 수행 할 때에 歌利王에게 육신의 몸을 베이고 끊임을 당하였지만, 我相 人相등의 四相이 없었기 때문에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禮記』에도 『母不敬』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것을 공경심으로 대하는 인격적인 삶의 정신을 제시하고 있다. 『六祖壇經』에도 「無上의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하는 자는 항상 下心을 修行하며 일체 중생을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미혹함과 집착을 여의고 반야의 지혜를 깨달아서 迷妄을 제거하고 깨달아 불도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불법승 삼보를 공경함은 존경하는 대상에 대한 예배이나,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예배를 올리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은 我相과 교만심을 꺽고 본래의 순진하고 청정한 참된 自我를 회복하는 수행임과 동시에 자신의 겸양과 인격의 福田을 만드는 실천인 것이다.

  부질없는 자존심과 교만심은 자신을 초라하고 불행하게 만들지만 자신을 낮추는 下心과 공경심은 자신의 마음도 평안하게 할 뿐만아니라 주위까지 편안케 한다. 그래서 하심과 공경심으로 절을 하는 수행은 자신과 이웃을 편안하게 만드는 福田을 만들고 大功德을 이루는 것이 된다.

  두번째는 業障을 소멸하고 貪瞋痴 三毒을 여의는 실천수행이다.우리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業障을 짓고 있다. 사실 불교의 수행은 이러한 身口意 三業을 청정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실천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배를 통해서 생각해 보자. 절을 한다고 해서 그냥 허리를 굽혔다 펴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행위만을 중요시하고 천배, 이천배, 삼천배를 했다고 주장하는 일은 잘못된 예배의 수행인 것이다.

  천배나 삼천배를 한다고 예배의 숫자를 정해놓고 절을 하는 것은 절을 통해서 자신을 그렇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원력인 것이며 서원인 것이다. 숫자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을 我相에 집착하고 자만심 교만심에 떨어뜨리는 행위가 될 뿐이지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절을 하면서 언제나 我相과 교만심을 없애고 무심하게 자신을 비우며, 일체중생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만드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

  몸은 절을 하면서도 마음을 쓸데없는 망상과 번뇌로 시간을 보낸다면 몸과 마음은 두가지 행위로 이중적인 자신을 만들기 때문에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없게 된다.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 하나가 되어 삼매의 경지에서 예배를 올릴 때 身口意 三業이 청정한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몸으로 절을 하면서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이나 「석가모니불」이라고 부처님의 名號를 외우며, 마음으로는 오로지 자신이 외우는 부처님의 名號 소리만을 듣고, 일체의 잡념을 내지 말아야 한다. 염주를 돌리며 숫자를 계산하면서 절을 한 경우에는 자신의 마음으로 세는 숫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마음의 귀로 또렷하게 들어가면서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身口意 三業이 하나가 되는 것을 三昧라고 하는데, 삼매의 경지에서는 나쁜 業障이 만들어지지 않고, 언제나 청정한 행위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절을 하는 예배를 三業淸淨의 실천 수행이라고 한다. 삼업이 청정한 수행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수많은 나쁜 業障을 녹이고 정화하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에 업장을 소멸하는 수행이 되는 것이다.

 

 


불교문학
님의 침묵/이만

 

한용운(韓龍雲 : 1879 ~ 1944)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였다. 우리들에게 익숙해진 만해(萬海), 卍海)는 그의 호이다. 충남 홍성출신으로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여년간 한학을 익혔으며 14세때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였다. 27세때 정식으로 득도하여 불교에 입문한 후로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으며, 불교잡지 <유심(唯心)>을 간행하기도 했다.

3·1 독립운동 때에는 백용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한명으로 참여하였고, 만세사건, 만당사건(卍黨事件) 등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47세 때인 1926년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님의 침묵』을 발간하기도 한 그는 1944년 중풍을 앓다가 입적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장편소설 『후회』 (1936), 『박명(薄命)』 (1938)이 있다. 한용운 문학의 특징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이 탁월한 예술적 표현과 결합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머리말이라고 할 수 있는 군말로 시작해서 창작 후기에 해당하는 독자에게로 끝나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복종 등 모두 88편의 시들이 실려 있으며, 대부분의 시들은 불교 종교론에 입각한 證道歌的 성격을 띤 작품들이다.

  이 시집은 대중불교를 주장하고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던 만해 한용운이 3·1 독립운동이 실패한 후 1925년 내설악의 백담사에서 쓴 시다. 독립된 시로서 또 시집으로서도 유명한 『님의 침묵』은 신문학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쓰여진 불교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님의 침묵』은 시 전편이 이별-갈등-희망-만남이라는 구조, 즉 기승전결의 극적인 구성으로 전체 시들이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소멸[正]-갈등[反]-생성[합]이라는 변증법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극복과 생성의 시편들이라 할 것이다.

  이별은 시 전체의 대 전제로서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동시에 사랑을 완성하는 자율적인 법칙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이며 따라서 언젠가 맞게 될 만남의 시간은 바로 참된 피안이며 그것은 광복의 시대가 된다. 이점에서 볼 때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시 도처에 깔려있는 못한다, 아니한다, 없다, 말라 등의 부정적인 사유와 비극적인 시대인식은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모순의 시대로 파악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의 저항과 투쟁정신은 그대로 시를 통한 부정적 세계관으로 상징화된다.

  『님의 침묵』에는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방언과 토속어의 애용은 대중들의 언어를 시적인 언어로 변용시켰고 독창적인 시형식을 개척해서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시의 형식에 있어서도 한국 현대시의 한 기점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된다. 얼핏 대중가요와 같은 느낌을 주는 싯구는 신성지향을 갈망하면서도 본능적이며 인간적인 감정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세속적인 사랑을 나타내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대중의 정신을 강조하지 않는 만해의 시는 참된 대중시를 지향한다 하겠다.

  그의 시는 또한 여성적인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여성주의는 불교의 관음사상이나 인도의 여성사상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것보다는 한국시가의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는 것이 좋을 듯하다.

  조선 중기 정철(鄭澈)이 왕권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주의의 『사미인곡』을 쓴 것처럼 한용운도 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잃어버린 조국과 민족에 대한 회복의 소망을 여성주의적 방법으로 형상화하여 역설한 것이다. 아울러 만해시는 은유와 역설 등 시의 방법과 산문적인 개방을 지향한 자유시로서의 형태를 완성시킴으로써 현대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점에서 그의 시는 타고르 등 외국시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시에 그 정신과 방법상

의 맥락을 계승하고 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참아 떨치고 갔습니다.

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 데 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일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의 휩싸고 돕니다.

 

 


신간안내
화엄의 세계

- 동국대 TV불교아카데미 방영 -

 

해주스님 강의 / 신국판 368쪽 / 값 8,500원

 

화엄의 세계는 본래가 부처의 세계이고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로자나불의 화현이다. 우리 범부 중생이 그대로 부처임을 일러주는 화엄의 세계는 부처님의 평등세계이고 우리 모두가 본래 부처존재인 곳이다. 이러한 세계를 담고 있는 화엄경은 부처님의 45년 말씀의 요지를 오롯이 담고 있기에 어떤 경전보다도 많이 읽고 연구하는 경전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불교의 수행과 신행형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경전이며 대승경전의 꽃으로 불리운다. 한국불교의 의식에도 화엄사상이 그대로 무르녹아 있으며, 한국선의 이해도 화엄사상의 공부 없이는 그 맛의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현재 각 사찰 강원의 마지막 과정이 화엄경인 만큼 한국불교에 있어 화엄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책 《화엄의 세계》는 동국대 사회교육원과 불교텔레비젼이 공동으로 개설하여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동국대 TV 불교아카데미에서 <화엄사상의 세계>라는 주제로 화엄경에 대한 강의를 맡은 동국대 해주스님께서 이를 요약·정리하여 발간한 것이다.

화엄경의 중심사상을 토대로 엮어진 이 책의 구성은 ①화엄경의 중심사상 ②화엄경을 교의로 하여 체계화한 화엄종의 화엄사상 ③한국의 화엄사상 ④화엄경의 편찬·유통과 화엄종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 ⑤화엄경으로 수학하고 신행·증득해가는 화엄의 수증론(修證論)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내용들을 중심으로 총 48강으로 나뉘어져 있어 불교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불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화엄경을 강의하는 법사나 스님,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이들도 이 책의 강의진도에 따라 공부해 간다면 누구나 중중무진의 화엄의 세계에서 불법의 참맛을 볼 것이다.

생겨나는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어 문제될 것이 없는데 늘 분별 속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들. 우리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직시하여 부처로서 다함께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이 화엄의 세계로 가는 그 길이다. 그것이 나날이 보리심의 선근에 물주는 보살도로 이어져 각자 지닌 원(願)의 힘이 증장되기를 저자 해주스님은 간절히 기원하신다고 한다.

 

다시보는 경전①
유마경 이야기

혜원스님 지음/신국판 240쪽/6,500원

유마경은 재가불자 유마가 병들어 눕는 것으로 시작된다. 세존은 유마가 병들어 누워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십대제자에게 병문안을 권유하나 한결같이 자신은 병문안 할 자격이 없다고 사절한다.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에게 권유한다. 문수는 유마거사를 상대할 법력은 없지만 세존의 성지를 받들어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과 유마의 병문안을 간다 나의 병은 중생이 아프기에 생긴 병입니다. 내 병은 중생이 고뇌에서 벗어나는 날 나을 것입니다.

중생과 자기를 동체대비시킨 유마의 말이다. 번뇌 즉 보리이며 생사가 바로 열반이요, 부처가 바로 중생이라는 불이의 사상을 보여준 재가불자 유마의 말이다. 하나되자는 대승불교사상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다. 너와 내가 하나되고 없는 자와 가진 자가 하나되고 배운 자와 못배운 자가 하나되어 서로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不二,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것, 극단의 사고를 버리는 것, 바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을 일컬음이다.일반적으로 경전의 주인공은 위대한 보살이나 성자인데 유마경에서는 재가신자인 유마가 주역으로 등장한다. 공의 세계를 우리가 사는 현실의 세계에서 유마의 법문으로 보여주는 경이다. 재가신자인 유마가 주인공이 되어 이 세상을 자재하게 살아가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경은 재가불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경전이며 재가자를 쉽게 구도의 현장으로, 즉 공의 세계로 인도하는 경전이며 많이 읽히는 경전

이기도 하다.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이신 혜원스님께서 시종 흐트러짐 없는 잔잔한 문장으로 뭇 불자들을 공의 세계로 이끌어 주고 있다.

  유마경의 마지막 장면.

문수보살이 불이법문에 대해 설하기를 어떠한 것도 논하지 않고 말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하여 나타내 보이는 것도 아니며 설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불이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마는 묵묵부답. 통 말이 없다. 바로 여기에서 이를 지켜본 5천의 보살들은 불이의 법문에 들어가 무생법인을 깨닫는다. 유마의 침묵. 그럼 이 침묵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두자.

 

 

 


일주문
가족의식/이법산 스님

 

세상의 모든 중생은 각기 업이 다르기 때문에 그 출신과 모양과 취미와 생각이 각각 다르

다. 가족은 작게는 혈통적인 직계가족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생활을 더불어 하는 회사·국가

등 여러 형태의 크고 작은 가족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은 구성원들이 더불어 사는

삶의 태도를 가졌을 때, 그 가족은 화목하여 지혜롭고 아름다운 삶을 함께 할 수 있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 즉, 극락세계는 아름다운 가족처럼 반목과 질시 없이 서로 더불어

하는 화목한 사회이다. 나의 가정 우리 사회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토가 되기 위해서는 각

자가 자신의 아집을 깨고 자신의 본성을 밝혀서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되었

을 때, 그 가족과 사회는 바로 서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장아함 소연경(長阿含 小緣經)』에서 말씀하셨다.

 

그 태생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가계가 다르더라도 너희가 출가하여 집을

버린 수행자가 되었을 때 저 바라문들이 「너희는 무엇이냐?」고 묻거든 「우리는 석가족의

자손이다. 석가모니의 진정한 아들이다. 우리는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법에서 났으며 법의

상속자이다」라고 대답하여라. 너희는 여래를 의지하여 새로 얻어 성취된 청정한 계행의 몸

이요, 선정의 몸이요, 지혜의 몸이요, 해탈의 몸이요, 해탈지견의 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교단에 귀의한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종족이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계행을

지키며 생활하고, 선정으로 마음을 청정이 하고, 지혜로 마음을 밝게하여 해탈로 스스로의

애착에서 벗어나 해탈지견으로 자유를 성취하여 누구나 더불어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이해하

고 판단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이라도 해 낼 수 있는 대원력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학교·직장·국가의 일원으로써 자기가 몸담고 있는 소속의 이념과 직무에 충

실해야 하는 의무와 같은 것이다. 우리 개개인이 속해 있는 가족이나 단체는 우리 스스로의

생명임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개개인이 모여서 형성된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우리가 소속된 곳이기에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함이 우리의 사회적 자세이다. 반면 그 단체를 스스로 떠날 수 있는

선택권도 항상 주어져 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하여 가정이나 직장,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생각하라 나는 어떻게 살

아야 하는가? 그리고 실천하라. 오직 한 마음으로 성취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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