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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5월호 / 통권 39호 / 불기
2542(1998)년 5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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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
봉축법어/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오녹원
큰스님(동국학원 이사장)
부처님께서
이 사비세례에 應化하신 것은 多劫生來로
쌓여 온 중생의 無明을 거두고자 하심이니,
天上天下 唯我獨尊이 그 첫 소식임을 오늘날
人類大衆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천상천하에
홀로 존귀하다 함은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임을 뜻하는 大乘의 眞理를
그렇게 말씀하신 바이니,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오늘 우리 인류는 自性佛을
깨치고져 하는 원력을 더욱 굳게 하여야
되겠습니다.
如來는
본래 不來不去라,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지만 부처님께서 몸을 나투시고
@行精@과 佛果를 보이심은 중생으로
하여금 이 세계의 생멸이 곧 @起임을 알게하고,
우주 살라 만상이 하나의 참다운 법계,
즉 一眞法界임을 깨닫게 하는 길을 여시기
위한 것입니다.
一眞法界는
바로 一心이니, 萬象이 一心 아닌 것이
없으며, 萬法이 또한 마음 밖에 있지 아니합니다.
한 마음이 열리면 무량한 세계요, 무량한
세계가 合하면 한 마음이니, 이 마음을
떠나 어디 따로 두고 존재하는 세계가
있겠습니까.
一卽多
多卽一은 마음과 세계의 이와 같은 관계를
설파한 말이니,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요
眞俗이 不二하며 이 한 몸이 이웃과 인류와
다르지 않고, 나의 이 한 생각과 저 생물들의
한 의지가 서로 상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음의 大悲와 보현의 行願이 자비실천의
모범일진대, 이는 바로 부처님 一心 大覺을
보살도로 行하는 것인지라,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우리가 다시 서원을 굳게
할 바 그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하신 四部大衆 여러분!
지금
우리는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경제적인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힘겨운데 거기에 더하여
정신적인 자기 正體性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가피가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한
시기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바세계에서
살고가 신 부처님의 일생을 회고해보면,
부처님께서는 길에서 나셔서, 길에서 열반하셨습니다.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원력이
너무나도 크셨기 때문입니다.
四部大衆
여러분!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그리고 성불의 길은 바로 이 중생 속에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無明을 거두어
부처님의 ''길''을 따라 나를 찾고 나라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의 큰 뜻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 한국불교의 未來를 위한
뼈아픈 自省과 自覺으로 새겨짐은 물론,
부처님의 크나크신 지혜와 복덕을 얻어
여러분의 가정과 온 누리에 자비 광명이
가득하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나무
서가모니불!
나무
서가모니불!
나무
서가모니불!
佛紀2542年
4月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學校法人
東國學園 理事長 吳綠園
총장봉축법어/민족적
위기를 보살행으로 극복합시다. 송석구/동국대학교
총장
존경하는
원로 대덕 스님, 그리고 사부 대중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불기 2542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자리에 모였습니다. 해마다 이 땅의
불자들은 이 날을 맞아 스스로의 신행을
다지고 부처님의 태자비심과 원만 구속한
지혜를 찬탄하지만 오늘처럼 부처님 오신
참뜻이 가슴 깊이 다가오기는 드물었습니다.
2천5백여
년 전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이 헛된
욕심을 버리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진리의
경지를 깊이 깨달으면 성불에 이르리라고
깨우쳐 주셨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탐욕과
무명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탐욕의 물질문명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동안 우리에게는 실로 걷잡을 수 없는
국가적인 경제 위기가 닥쳤고, 너와 나를
구분하는 이기적인 삶을 영위할 때 우리민족에게는
남과 북으로 나뉜 분단체제가 반세기가
넘도록 고착되어 왔습니다. 어리석은 우리의
무명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청정국토를
아무런 생명체도 살지 못할 죽음의 땅으로
변하게 해 왔고, 사회는 점점 더 도덕성이
파괴되어 폭력과 타락의 그림자 속에 침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부 대중 모두가
사회를 향도하는 종교인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한 참회와
투철한 책임 의식을 가질 것을 호소합니다.
지금
민족의 북단에서는 지금의 한 끼니를 걱정하며
남녀 노조를 막론하고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도
내 몸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같은 피를 나눈 내 동포가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려 죽어가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 이 겠습니까?
남한은
남한대로 건국 후 최대의 경제위기를 맞아
나라를 지탱하던 기업들은 하나, 둘 도산해
쓰러지고 100만이 넘는 내 이웃이 다니던
직장을 잃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날마다 물가가 치 솟고 삶을 비관한 가장은
가족과 더불어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현재까지 벌어진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 불교인에게
주어진 사명과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자명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불자들은 모든
경계와 차이를 넘어선 지혜 광명에 눈을
뜨고, 부처님 태자비를 따라 실천할 의무가
있습니다. 바로 요익중생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나눔과 헌신과 희생의 정신으로
보살의 삶을 살아가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면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민족적인
위기가 더 이상 위기일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같은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 과제를 제안하고
이를 충심으로 호소하고자 합니다.
첫째,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 남과 북이 한 민족,
한 핏줄임을 확인하는 북녘동포 돕기 운동에
사부 대중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둘째,
불자 모두가 탐심을 버리고 개인보다는
공동의 이익에 따라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제반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합니다. 셋째, 돌맹이 하나, 풀 한포기도
내 몸처럼 여기는 동체 대비의 마음으로
내 스스로 보살행을 실천하고, 이웃에게
이를 권하는 포교사로서의 삶을 살아 나가길
호소합니다.
2천5백년전,
부처님 오신 참뜻이 오늘 다시 실현될
수 있도록, 여기 모이신 사부 대중이 부처님
좌우 부처 보살로 다시 태어나 화합과
평등의 사회를 이루며 나가시길 간곡히
기원합니다.
불기
2542년 부처님 오신 날
동국대학교
총장 송석구
정각도량/요익유정계 최법혜/경주캠퍼스
정각원장
6.25
동란 이후 최대의 국난(國難)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은 모두가 힘에 겨운 세상살이를
하고 있다. 보리 고개의 배고픈 시절도
있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내일의 희망에
신념을 걸고 살았던 때라고 시절을 추억하면
오히려 애틋한 정(情)을 느낄 수가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의
얼굴과 정서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과거
중국의 불교 역사 속에는 말법사상(未法思想)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은 폭군에 의한 종교
탄압과 학정(虐政)이나 전쟁, 기근, 질병
등 생존에 대한 삶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참으로 이 사비세례는 고통으로 구성된
감인(堪忍)의 세계라는 실감을 느낀다.
이러한
상황, 이렇게 모든 국민의 마음과 정서가
불안할 때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매스컴들과 여론들은 그 원인을
누구누구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 과연
이렇게 탓으로 돌리고 책임을 추궁하고
그리고 벌을 주면 나라가 안정되고 우리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될까?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신라
경덕왕 대(代)의 충담스님의『안민가(安民歌)』는
어쩌면 이 시대에 알맞은 노래인지도 모른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사랑스런 어미시라.
백성을
어린 아이로 여기시니 백성은 사랑을 알리로다.
구물거리는
물생(物生)들 이 녹을 먹여 다스리니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소냐.
나라를
거닐 줄 알리로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로다.
(金雲學
스님 역)
대승계(大乘戒)의
근본이 되는 삼취정계(三聚淨戒)에는 유정(有情
: 衆生)을 요익(饒益)하게 하라는 계(戒)가
있다. 깨달음을 향하여 6바라밀을 닦는
원력을 세운 보살은 이 계를 지켜야 한다.
보살들은
중생을 위하여 도움이 되는 생각을 하며
봉사를 하며 고통에서 구제를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이며 이와 반대로
하는 것은 계를 파하는 것이다.
만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백성이 백성답지 못하다면 그
나라는 절대로 태평할 수가 없다. 바로
「요익유정계」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유정, 즉 중생이란 우리 인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정식(情職)이 있는 모든
생류(生類)를 말한다. 이러한 해석에서
유정계를 본다면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류와 이 생류가 살고 있는 자연환경까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신토불이(身土가깆二)」라는
경전의 구절이 국산 농. 축. 수산물 애용의
선전용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생명을
중시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보존하는
것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며, 바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경시하고 자신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며, 자기마저 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에서 빚어지는
실수는 그 과보가 끝간데가 없다. 이것을
보시와 자비와 정견(正見)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바로「요익유정」의 보살의 주처(住處)이다.
보살은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항상 손해를 보는 것이다.
서로 손해를 보려고 하는 세상, 이것이
보살들이 사는 세계라고 하였다.
꿈틀거리는
미물 하나라도 우리와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그 배경에는
무수한 중생의 은혜가 스며있는 것이다.
보살의 큰 서원인 사홍서원(四弘誓願)
가운데
제일 첫째에는 ''가 없는 중생을 다 건지
오리다(衆生無邊誓願度)''라고 하였으며,
저 유명한 유마거사는 병문안을 온 문수보살에게
''중생의 병이 다 나아야 나의 병도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불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들이 다 함께 깨달음을 얻는 그날이
보살의 큰 원이 하나 이루어지는 날이며,
삼취 정계의 하나인 「요익유정계」도
수지(受持)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집1
불교와 교육 禪問答과 문답법/고진호/교육학과
교수
佛敎의
禪問答은 교육학계에서 그동안 크게 주목받아
오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교육학이
인식론적으로 일방적으로 서양적 진리관에
종속되어 왔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최근 이러한 서양의 眞理觀이 전반적으로
비판되면서, 그 대안으로 동양의 사상
특히 불교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禪問答과 서양의 問答法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禪問答에 내재한 교육학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교육학의
핵심과제는 진리의 파악 혹은 理解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교육학에서는 학생이
지식 혹은 경험내용을 어떻게 올바로 인식케
할 수 있느냐? 라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어왔다. 이 점에서 희랍시대 이래로
문답법은 교사와 학생 간에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대화의 전개과정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禪問答은
이성적 사고 혹은 논리를 초월하는 破格을
통해 實相을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문답법과는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문답법에서는
대화의 진행과정을 통해서, 학생의 이해를
체계적으로 深化하고자 하지만, 선문답에서는
학생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선문답에서는 話頭를
제자가 言不@@(말하자마자 알게 되면)하면,
그것은 이미 話頭가 아니라고 본다. 선문답이
종종 무의미한 言辭, 雖解한 奇語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선문답이 이러한
특성을 보이는 이유는 문답법에서와 같이
언어적 전달체계와 共有적 의미를 중시한다기보다는,
일정한 계기를 통해 학생 스스로기 疑心을
발하고 문제를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데
그 본질적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禪問答과 서양의 문답법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불교적인 사유방식과 서양적 진리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禪佛敎에서는 언어를
통하여 사물의 본질에 穿鑿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 實相과는 멀어진다고 본다.
선불교에서 특히 '言賠道新', '不立文字',
'見性成佛', '直指八心', '敎外別@' 을
모티브로 하고, 규격화된 의미전달 수단을
금기시하고 있는 것도, 言語와 文字에
내재한 이러한 한계성을 자각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서양의 인식론에서의
冥理는 '신의 말씀', '영혼의 소리', '의식'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신의
말씀', '영혼의 소리', '의식' 등은 근본적으로
音磬(意味)中心的 屬性을 띠고 있기 때문에,
문답법에서는 교사와 학생 간의 언어적
전달체계와 공유 적 의미의 형성을 중시한다.
그러나
서양의 어떤 학자도 說破한 바와 같이
''言語는 채워지지 않는 慾望이다''.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말할 때, 항상 본질을 설명하지
못하는 일정부분의 殘餘를 남기기 마련이다.
일정부분의
잔여는 새로운 언어의 창출을 대기한다.
따라서 언어가 달(月)을 가리키는 손은
될 수 있을지언정 달의 眞面目이 아닌
한, 言語的 循環은 끝없이 지속될 수밖에는
없다.
서양의
문답법에 내재한 인식론적 가정은 바로
존재론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내면적
의식을 갖는 言忍識主體의 설정 없이는
서양의 眞理觀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러한 주체는 단지 我想에 집착해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我想의 존재성은
非我의 존재성과 비진리와의 대립적 관계
다시 말해서 我/非我, 眞理/非眞理의 이분법적
관계를 상정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적 이분법의 구도는 교사/학생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교사는 일종의 '진리의 대변자'
혹은 '의미의 보증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은 지적권위자인
교사와의 '一致의 體毅' (내면적 의식의
동일화)과 '同調'(목소리를 일치시킴)를
추구함으로써 만이 진리에 근접할 수 있다고
본다. 종국적으로 문답법에서 추구하는
진리는 一字의 진리관이며, 진리 바깥에
머물고 있는 주변부 자체를 특유의 구심력으로
無化시키는 지적 권위자인 나르시스 적
진리관이다. 그러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祖師를 만나면 祖師를 죽이라''라고
하는 말에서와 같이, 선문답에서는 도그마로서의
일체의 권위를 부정한다. 이러한 사실은
선문답에서의 진리는 지적권위자인 교사의
언어(음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학생
스스로의 문제해결과 체험을 통해서만이
證得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흔히 禪問答에서 反語法적으로
표출되는 부정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大肯定으로나가기 위한 불교적인 순서
혹은 방략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禪問答은 언어 중심적 의미론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 없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선문답도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가에서는 선문답을 불요불급의
方便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선문답은
언어를 초월하는 '메타언어'이다. 따라서
禪問答에서의 話頭는 @@해야만 하는 언어적
'意味' 가 아니라 解@해야 할 일종의 '@@'로
볼 수 있다. 기호로서의 화두는 언어나
문자와는 그 성격을 달리 하는 지시부호일
뿐, 그 자체에 절대적 의미를 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話頭는 일종의 답 없는 문제이며,
暗號이다. 화두는 일정한 시 .공적 맥락
속에서, 특정한 계기를 통해서, 특정한
사람에게 內住(indwelling)한다 따라서
화두는 일정한 시점과 계기가 지나면,
소멸하고 또한 새롭게 생성된다는 점에서,
화두는 그 자체로 無常이며, 緣起法적
텍스트의 관련성에서만 통찰되어지는 일종의
浮遊하는 記標(언어학적 용어로 記義(尨味)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개념을 지시하는 외면적
부분)이다. 따라서 화두는 단 一回的이며,
생생한 자기체험에 바탕을 둔다. 가령
''개에게도 佛性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無''라고 답한無자 話頭의 예에서
저럼 화두는 학생 스스로가 제기하고,
자기의 것으로 體化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禪問答은 교사와 학생의 의식의 동일화
혹은 일방적 동조를 강요하는 의미론적
진리관과는 분명히 다른 패러다임을 내재하고
있다. 서양의 문답법은 의미중심적이라면,
선문답은 永彖起法적 텍스트 속에서 해독되어야
할 지시부호라는 점에서 기호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禪問答은 기존의 이해방식에
대한 解體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보다
큰 세계의 존재성을 깨우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학적으로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집2/불교
종립 대학에서의 학생상담 불교 종립
대학에서의 학생상담 곽준규/교육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학교가
갖고 있는 상담활동은 현대교육이 낳은
독특한 교육활동으로서 지난 수십 년간
학교라는 조직 속에서 발전되어 온 교육활동이다.
특히 중등학교는 학생들의 인성과 도덕
및 윤리교육의 대부분을 이 활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학도 학생들이 당면하고 있는
개인적 심리적인 문제의 해결을 돕는데
이 활동이 필요한 활동임을 인정하여 이
활동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어 행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학교
조직 내에서의 상담의 역할과 기능은 형성기에
처한 학생들의 건전한 성장과 발달의 촉진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그
전문성이나 학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며
현재까지도 학교교육의 주요기능으로서
상담활동의 성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활동의 교육적
필요와 기여는 물론이며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서
상담활동에 대한 기대와 인식은 더욱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학에서의 상담활동은 1960년 서울대학교가
아세아재단의 재정적 후원으로 학생생활연구소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심리검사, 진로 및
교육정보제공, 심리상담활동을 두어 대학생들의
개인적, 정서적, 심리적 문제에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의
학생생활연구소 활동이 성공을 거두게
되자 교육부는 학생생활연구소를 법제화하였고
다른 대학들도 이 기관을 통하여 대학생들의
학업 외적 문제에 대하여 조력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서울대학교의
학생생활연구소의 성과에 따라 60년대와
70년대의 정치적 혼란기에 거의 모든 4년제
대학들이 서울대학교와 비슷한 조직인
학생생활연구소 또는 학생생활 지도연구소를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진로지도와 학업문제와
관련하여 행정이 취급하기 어려운 문제에
조력을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학에서의 상담활동의 위상은
확고히 정립된 것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의
필요를 발견하려는 시작단계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추세는 학생생활연구소를 이전의
연구위주의 활동에서 봉사중심의 활동으로
개편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따라서
그 명칭도 학생생활연구소가 아닌 학생상담소
또는 학생상담 및 검사기관으로 변경시키고
있음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은 외국학생들과는 달리 특이한
발달과정을 거친다. 학생들에 대한 인성교육이나
시민교육, 진로교육 등은 중등학교까지의
정규학교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치열한 대학 입학시험경쟁 때문에
중, 고등학교에서는 주로 대학입시에서
요구하는 지식교육에 치중하는 관계로
중. 고등학교 과정에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인성교육, 시민교육, 진로교육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이런 면에서 대학생으로서
달성하고 있어야 할 발달 과업을 이수하지
못한 채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다른 문화권에서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성취했어야할 과업을
대학에서 이수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대학들은 고등학교가 맑아야 할
이러한 교육들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대학은
중. 고등학교와 달리 훨씬 요구가 심하다.
그런데도 대학생들은 이러한 환경적 요구에
심리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로 입학한다. 이런 상태에서 학교가
요구하는 끊임없는 도전에 응할 수밖에
없는 대학생들은 자연히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이러한 불안으로
인한 고통은 이들의 교육을 통한 자아실현의
실패에 대한 우려까지 증폭시킨다.
2.
오늘의 대학현실
사회가
고도의 정보화와 기술화를 요구함에 따라
대학도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개혁 작업이 한창이다. 더욱이
국가가 IMF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할
수 밖에 없는 위기사태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거나 떠나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들이 새로운 직장을 얻기 위하여
기술 습득이 필요해짐에 따라 이들의 재취업을
돕기 위하여 대학도 그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학자체가 예전의 상아탑 적 환경에서
다양성, 개방성, 협동성을 포용하는 환경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
동안 대학의 인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학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연령대의 학생이 주류를 이루어 왔기 때문에
대학의 교육 계획도 동일 연령 대를 위한
비교적 단순한 교육 계획으로도 큰 무리
없이 학생들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는 기성 직장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과 전문지식을 요구하게
됨으로써 이미 학업 적령기를 놓친 고
연령자들에 대한 재교육의 필요를 촉발시킴으로써
대학은 보다 다양한 연령층에게 그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다양화
개방화에 대한 요구에 따라 대학은 전입학,
재입학, 전과에도 문호를 개방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새로운 학생집단이 학교에 등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미 학생들의
연령층이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따라 대학은 몇 가지 새로운 문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만
요약해 본다.
첫째,
다양한 세대를 함께 수용하는데 따른 문제의
발생이다. 학생연령층의 다양화는 가치관과
필요 등이 다른 세대들을 같은 강의실에
몰아넣을 수밖에 없게 되어 강의실 내에서의
의사소통과 인간관계 등에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으며 세대 차에 따른 극심한 가치관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고
연령층의 학생들은 교수의 변화된 강의방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이에 따른
스트레스와 학습에의 곤란을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변화된 신분을 수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극심한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다.
둘째,
학생들의 연령계층이 다양해짐에 따라
캠퍼스에는 종래의 미혼학생 일변도에서
가족을 갖고 있는 결혼한 학생들의 수가
증가하게되어 학생들의 문제도 종래의
미혼학생 중심에서 결혼한 학생들의 경제문제와
가정문제 등 가정생활과 관련된 문제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학생계층의
다양화는 학생들의 필요를 다양화하여
학교는 이러한 학생들의 여러 가지 욕구와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셋째,
전공 선택이 다양화하고 복잡해짐으로써
전공 선택시의 혼란과 갈등이 예상된다.
2년전 까지만 하여도 학생들은 입학하기
전에 이미 자기가 전공할 분야를 결정한
후에 입학을 함으로써 대학에서는 학교가
정해준 순서에 따라 학점을 취득하게 되면
졸업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이 제도가
가지고 있는 완고성은 학생들의 시행착오와
시정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애초의 선택이 잘못된 학생들이 그들의
잘못된 선택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어 여기에 기인한 비용과
희생이 너무도 컸음이 비판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 위하여 대학은 선 입학
후 전공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학부제로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넷째,
학부제 하에서는 학생들이 입학 후 2년간의
탐색기간을 거쳐 전공을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전공 선택 시에 취업가능성이 높은 전공으로만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인기 있는
학과에 선발되기 위하여 학생들은 치열하계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친구조차도
자연히 잠재적 경쟁자로 치부하래 됨으로써
대학 캠퍼스는 이전에 비하여 훨씬 심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지배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새 시대가 요구하는 협동하는
인간의 양성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관계를 소원하게 하여 자연히
사회가 요구하는 협동하는 인간의 양성을
어렵게 하고 있다. 더욱이 비 인기전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은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되어 의욕을 상실하게
되며 이것은 다시 학생들 간의 경쟁에
그치지 않고 교수 사회의 전공 이기주의를
유발시켜 학부제의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학제간의 협동을 어렵게할 소지도 있으며
결과적으로 학문자제의 균형적 발전을
저해하게 될 우려마저 낳고 있다.
다섯째,
이러한 갈등은 학생지도를 훨씬 어렵게
할 것으로 보인다. 종전의 학과 중심제도하에서는
각 학과의 교수들이 각자가 소속된 학과의
학생들과 유대관계를 긴밀히 함으로써
학문적 지도와 아울러 진로지도를 포함한
생활지도를 가능하게 하였으나 대단위로
운영되는 학부제 하에서는 교수와 학생
간의 관계가 멀어질 수 있으며 오직 학문을
통한 의사소통 channel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생활지도 등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는 동안의
지도가 훨씬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여섯째,
이러한 변화는 체계적인 진로지도의 필요성을
증가시킬 것으로 보인다. 지식의 양의
폭증과 기술의 빠른 변화와 부침에 따라
옛날에는 사전교육만으로도 충분하였던
것이 앞으로는 현직에 있으면서 기술발전에
따른 재교육을 받아야 될 필요가 증가될
것이다. 이것은 자연히 고령의 직장인들이며
가장들인 기성 인들을 학교로 돌아오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또
현재에는 인기가 있어 각광받고 있는 기술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양화되어 쓸모없게 됨으로써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여 생활설계를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자주 발생하게 될 것이다.
또는 이미 종사하고 있는 분야가 본인의
적성과 흥미와 맞지 않음으로써 개인은
진로계획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발생할
가능성도 어느 때보다 증대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검사나 상담을 통한 새로운
진로계획을 필요로 하게 된다.
교육의
역할은 지적발달을 돕는 것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대학은 사회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최고의 학부라는 점에서 볼 때
지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배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격을 갖춘 전인의 양성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대학은 학생들의 지적성취와 아울러 인격적
성취를 위해서도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고르게 배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
동안 대학은 부족했던 교수 및 연구요원을
확충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오늘의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비교적
학문과 연구 분야에서는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가 요구하는 인성의 함양은 강의실이나
실험실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인간관계나 가치관 등의 지도를
위해서는 교수와 연구요원의 확충만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다.
3.
새로운 교육계획으로서의 학생 상함
앞으로
대학이 학생 개개인의 필요에 부응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맞는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교과 이외의 분야에 대한 대 학생 봉사계획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그 동안 소홀히
여겨왔던 상담활동의 강화가 앞으로 학교가
봉착하게 될 문제해결을 위한 교육적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은 고등학교까지의 정규교육을
통한 생활지도가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인성, 도덕성, 가치관의
발달이 미완성인 채 대학에 입학한다.
더욱이 이들은 체계적인 진로지도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지적성취만을
요구받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신들의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와 같은 자신들의 삶과 관련한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발달시킬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공을 하고 학점을 따고 취직을
하게 되면 결국 자아정체감을 제대로 발달시키지
못하게 되어 나중에 진로선택에서도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걱정된다.
현대교육은
소기의 교육과정을 통하여 학생들이 사회진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익혀서 전인으로서
성장하고 발달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학생 각자의 소질과
능력개발을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교육활동을
조직하고 운영한다.
학교가
학생들의 적절한 성장과 발달을 돕기 위해서
조직하고 운영하는 교육활동은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학습지도 활동과 생활지도
활동으로 대별된다. 학습지도 활동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학생들이 장차 진출할 사회환경을
조정하고 그에 적절히 적응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며 생활지도
활동은 학생들이 학습활동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과 기술을 개인이 자기의 완성을 이룰
수 있도록 통합하도록 하여 앞으로 이들이
각자의 생애를 영위하는데 소용되는 생활기술을
습득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능력,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적절한
의사결정 및 환경에 대처하는 등 능력은
생활기술의 습득을 통하여 배양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학습지도 활동이 아니라 오직 상담활동을
통하여서만 습득이 가능하다.
앞으로의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보다 급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와중에서
성장하고 발달해 가야할 학생들은 여러
가지 심리적 충격과 적응에 곤란을 당할
것임은 예상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이
이미 발생하고 있는 변화와 새로운 기술이
발생시킬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변화된 사회구조와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인생관이나 가치관과 삶의 형태를 발달시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상담활동을 통하여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다가올
세기의 변화는 훨씬 충격적일 것이며 산업구조의
변경은 직업의 성격과 구조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노동부에서 발간하고 있는 직업명 사전(Dictionary
of Occupation Title)에 따르면 직업의
종류만 하더라도 이미 십 야만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진로의 선택이고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 하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어려움은 이들의 능력
개발이나 전인으로서의 성장발달과정 또한
쉽지 않게 할 것이다.
학교교육은
이러한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 교육계획을
개발하여 학생들의 진로선택문제에 일찍부터
조직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들의 진로발달을
도와주어야 하며 학교는 상담프로그램을
통하여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교에서의 상담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종립 대학에서의 학생 상담
대학생들이
상담에서 제시하는 문제들은 개인의 가치관,
존재의미, 진로선택,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 등 개인의 성장과 발달에 관련된
의문이 대부분이다 이런 부분은 전문적인
식견과 조력기술을 요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학문에 정통한 대학자라 할지라도 조력이
쉽지 않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진로지도를
도울 수 있는 진로지도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동안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전인적 발달이라는 문제를 너무도
등한히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상담이
전문적인 훈련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전문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상담프로그램을
학생생활연구소라는 이름의 연구소에 두어
왔으며 상담은 연구소의 부수적 프로그램으로
비전문가에게 형식적으로 맡겨 왔다. 이런
현실은 결국 이 기관이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게 함으로써 얼마 전까지
대학의 학생생활연구소의 활동이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대학상담의
목표는 학생들이 최적한 발달을 이루도록
조력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상담은
인간발달의 이상적 개념과 인간행동을
지시하여 줄 윤곽과 지침을 세우기 위한
연구도 꾸준히 수행함으로써 인간발달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를 확인하여 상담목표에
반영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학의 상담프로그램을 강화하게 되면
강의실이나 실험실에서 어려웠던 여러
가지 교육적 지도가 용이해 질 것이며
위에서 열거된 대학이 봉착할 새로 운
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본교는
불교 중립 대학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적 이념에 근거한 학문의 연구와 발전
및 불교적 교리에 입각한 지도자의 양성을
교육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는
상담계획에 종교적 입장에 근거한 상담을
포함시킴으로써 대학의 설립 목적에 부합한
불교적 인격을 갖춘 지도적 인물을 배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의실에서 이루기
어려웠던 불교적 인성의 함양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는
인간이 성불할 수 있도록 돕는 종교이며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불을
어렵게 하는 것은 衆生垢心 즉 중생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고 보며 중생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누구나 성불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은 개인의 문제행동은
혼란에 기인한 실현경향성의 일시적 장애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며 혼란되었던 실현경향성의
회복으로 완전히 자아 실현하는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C. Rogers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불교적
상담 프로그램의 개발을 통하여 불성의
주인이면서도 이를 깨닫지 옷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불교적 상담을 통한 불성의
실체를 자각하도록 돕고 여러 가지 가치갈등에
따른 혼란의 지도를 통하여 중립 대학으로서의
사명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불교적
자아실현의 길을 단계별로 설명해 주는
팔정도의 개념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임으로 이러한 개념들을 상담의
모델로 채용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불교적 인격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우며
나아가 불교적 교리 속에서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훌륭한 불자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물론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이 일을 성취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일은 오직 새로움과
변화를 격려하는 상담을 통하여 개개 학생이
모험해 보게 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상담은 상담가와 내담자 간의 돈독한 인간관계가
가져오는 신뢰와 수용적 분위기가 개인으로
하여금 새롭고 보다 성숙한 성품과 행동을
모험적으로 시도하도록 한다. 이런 조력활동을
통하여 대학은 이전에는 어려웠으나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된다.
5.
맺는 말
학교교육은
학습지도와 생활지도가 기능은 비록 독립적일지라도
작용은 상호보완적일 때 비로소 교육이
지향하는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학습지도 활동은 이미 그 역할과
기능에서 중요한 학교교육의 계획으로
인식된 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목표를
세우는 일도 사회의 요구에 따라서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상담활동은
학교교육의 다른 하나의 중요기능으로
정의되어 왔으면서도 그 효과에 대한 논란이
정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활동의 성격과
기능, 역할 등의 기본개념의 정립이 늦어졌으며
활동의 내용과 방법의 정의조차도 늦어짐으로써
올바른 교육계획의 수립이 어려웠다.
상담활동은
학교교육계획의 양대 주류의 한쪽인 생활지도계획의
주요활동 중의 하나이다. 이 활동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자아에 관한 지혜를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와 도움을 제공하는 독특하고
고유한 기능을 담당한다. 뿐만 아니라
학교가 제공하는 다양한 활동과 학생 개개인의
결속을 촉진함으로써 이들이 전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더욱이
본교는 불교를 건학 이념으로 하여 설립된
중립 대학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적 교리의 성불개념은 현대교육이
지향하는 자아실현과 상통함으로써 저항
없이 교육의 목표에 통합될 수 있다. 따라서
본교는 현재 대학이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교육문제 특히 인성문제의 해결 방안으로서
상담프로그램의 강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전의
설화/볼교와 효행담 이 만/불교문화대학
교수
가정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하여 보면 일반적으로
동양사회에서는 어버이와 자식 간의 종적인
관계가 핵심이 되지만, 서양사회에서는
남편과 아내라는 수평적인 관계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개념이라 할지라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디까지나 가정이라는
한 집단의 화목과 번영 및 질서를 유지하려는
데에 초기의 목표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와 같이
유교적인 이념에 입각하여 가정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그 영향이 어느
종교나 사상보다도 지대하지만, 더러는
너무나 관념적인 것에만 사로잡혀서 이를
절대시함(絶對@@@念)으로써 오히려 부드러워야
할 가족 간의 화목이 경직되는 결과도
가져왔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불교에서 말하는 효 사상을 우리나라의
불교 신행 담 속에서 찾아보면, 적어도
삼국시대나 고려 때까지는 주로 귀족들을
중심으로 하여 삼자출가(三좋出家)나 사자출가(四子出家)라는
제도가 하나의 불문율로써 전해져 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사회제도의
변천과 함께 정치사상이 바뀌고 아울러서
종교의 교의까지도 변하면서 자연 사회의
제반 규범이 그쪽으로 강화되어 가정윤리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수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조선시대 이전까지 일반적인 사회윤리로써
널리 수용되던 불교적인 윤리관이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되었던가를 살펴보기 전에
불교의 제 경론에 설해지고 있는 효 사상을
간추려 보면, 먼저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에는
자부비모(慈父悲母)의
장양(長養)으로 일체 남녀가 다 안락함을
얻었으니, 자부의 은혜는 높아서 산왕(山王)과
같고, 비모의 은혜는 깊어서 대해와 같다.
고
하였으며,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천지간의 귀신들을 섬기는 것은
그 부모를 효순함만 못하나니, 왜냐하면
부모가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신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거나,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는,
부모님께
효순 공양한 공덕과 괘보는 일생 보처보잘의
공덕과 같다.
라고
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고려 때에 왕자의
신분으로 출가하여 큰 업적을 남긴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그의 글(문집 권 제3 講盂藺盆經發辭)에서
이르기를,
큰
자비심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고, 큰
효도는 친애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것만을 사랑하고 남이 사랑하는
것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큰 자비가
아니요, 현재의 친애하는 것만 친애하고
과거에 친애했던 것까지 친애하지 않으면
그것은 큰 효도가 아니다. 또한 다섯 가지의
형벌이 삼천 가지이지만 불효만큼 큰 죄가
없고, 여전 가지의 열반에 이르는 방편이
팔만 가지이지만 효도만큼 큰 복이 없다.
라고
했는데, 의전 스님이 이와 같이 효사상을
일반인들에게 강조한 것은 당시 출가했던
모든 스님들의 의도를 대변한 것으로 보아서
이 효 이념이 그때의 사회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었던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내용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경론에 설해져 있는 불교의 효사상은
일부 유생들과 출가 자체를 벽안시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사회윤리를 배반하거나
가정윤리를 저버린 비윤리적인 내용이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이념들은 어느 종교인들보다도
가정의 화목과 질서 등을 우선적으로 꼽고
있는 불교인들의 가정에서는 더욱 권장되어야
할 덕목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이 설해진 효사상이 실제로 우리나라의
역사상에서 어떻게 실천되어 왔던가를
살펴보면, 우선 삼국유사 권 제5의 효선편에
의하면 당시까지 전해져 오던 다섯 편의효행
담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설화와
손순매아(孫順埋兒)의 내용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즉 진정사효선쌍미의 내용은
옛날 신라시대에 한 노총각이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집이 가난하여 장가도
못 가고 부역을 하면서 여가에 품팔이를
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노총각은 밥상머리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자기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공부를 하겠다고 무심코 말하니까,
이 말을 들은 어머님은 공부라는 것은
때가 있는 것인데, 네가 만약 나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친다면 그렇지 않아도 장가를
못 보내서 너를 볼 때마다 이 어미의 가슴은
미어지는데 두 번 이상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으니 지금 당장 집을 떠나 출가를
하라고 강권함으로 할 수 없이 출가했다는
것이다.
또한
손순매아의 내용은 어느 해에 심한 흉년이
들었는데, 손 순 부부는 자기들이 봉양하고
있는 늙은 어머님이 적은 음식인데도 불구하고
손자들에게 항상 이것을 양보해서 기진
상태에 이르렀으므로 자식은 한 번 이별을
하더라도 다시 나면 되지만, 부모님은
한 번 이별이면 영영 이별이므로 어머님을
위해서 우리 애들을 매장하자고 의논한
뒤에 아이들을 하나씩 등에 업고 뒷산으로
가서 땅을 팠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은 그때 마침 땅속에서 나온 돌종
덕택에 목숨은 건졌지만, 이와 같이 효의
절대적인 보은관념에서 자기의 아이들을
죽여서까지도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강하게 작용하는 것이 유교의
감지효(甘詩孝)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인
입장에서는 누구를 위해서 누가 희생된다는
것은 불살생의 계율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인 것이며, 설령
아이들이 죽어서 그 할머니가 배부르게
산다고 할지라도 자기 때문에 어린 손자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도
어떤 할머니 치고 이를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는 진정한 효도
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사효선쌍미
설화에서 홀어머님을 혼자 두고 떠나는
자식이 언뜻 보기에는 일반윤리에 어긋나는
행위 같지만 사실은 부모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안심효(安心孝)가 되어서 오히려
더 효자라는 것이 불교적인 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사의광경(不思議光經)에서는,
맛있는
음식과 값비싼 진보로는 능히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을 못하나니, 인도하여 올바른
법에 들게 하면 이것이 부모님을 진정으로
공양하는 것이다.
라고
한 내용에서도 안심효의 참뜻을 알 수가
있다.
아무튼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부모님께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은 남이 안 하는 귀한
선물이나 맛있는 음식 등을 해드리는 것도
좋지만, 항상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사전에 근심과 걱정을 안 끼쳐 드리는
것이며, 함께 동고동락해서 서로 간에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게 하는 것 외에
더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불교와
어문학/간경도감 간행 불경언해 김무봉/국어국문학부
교수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는 즉위 초의 숱한 난제들을
해결하고 강력한 통치권을 확립하게 되자
불전간행 사업에 온 정성을 쏟았다. 유교를
치국의 중요 이념으로 삼았던 당시에 유신(儒臣)들의
거센 저항을 독단으로 제압하면서까지
경전간행 사업에 열중했던 것이다. 세조가
불전간행 사업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무엇이든 세 조대에 조성된 불전,
특히 한국 불경들은 15세기 중반 한국어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이 한글경전들이
국어사 자료로서 가지는 가치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당시의 연해불전들은 주로 관판본(官版本)이어서
새로 제정된 문자 및 중앙어의 정착. 보급에
기여한바 컸다.
세조
즉위 초에 교서관(校書館) 등에서 단편적으로
간행되던 불경언해류는 세조 7년(A.D.
1461년) 6월 간경도감(刊經都監)이라는
불전간행 목적의 국가기관이 설치되면서부터
방대한 양의 불전들을 짜임새 있게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간경도감 간행의 불전들이
한글 불경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간행
건수(件數)로 단순하게 비교한다면 한문
불경이 한글 불경보다 3배 정도 많지만
국어사 연구를 위해서는 그만한 자료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다만 500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원간본 중 일부의 일실(逸失)로 간행 당시의
언어 사실이나, 서지사항 등을 아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아쉬울 뿐이다.
간경도감은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을 거쳐 성종 2년(AD.1471년)
l2월 폐지되었는데 중앙에 본사를 두고
개성, 상주, 전주, 남원, 안동, 진주 등지에
분사를 두었다. 간행에 간여했던 승려는
학승인 信眉, 守眉, 雪畯, 弘濬 등이고,
文臣은 金守乭益, 尹師路, 黃守身, 韓繼禧
등이다.
왕실에서는
孝寧大君이 동참했다. 그 외 다수의 승려들과
문신들이 참여했는데 각 책의 권두에 있는
조조 관이나 진전문, 발문 등에서 열함(列銜)을
볼 수 있다. 존속 기간 동안 29건의 한문불경과
9건의 한글경전이 간행되었다. 11년의
존속 기간 중 한글경전이 간행된 시기는
1462년 <능엄경언해>부터 1467년의
<목우자수심결>에 이르기까지 겨우
6년간이다. 그 6년동안 간행된 한글 경전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61(세조
7)년 간경도감 설치
1462(세조
8)년 능엄경언해 10권 간행
1463(세조
9)년 법화경언해 7권 간행
1464(세조
10)년 영가집은해 2권, 아미타경언해 1권,
금강경언해 2권 1책,
반야심경언해
1권 간행
1465(세조
11)년 원각경언해 11권 10책 간행
1467(세조
l3)년 목우자수심결언해 1권 간행, 사법어언해
1권 간행
1471(성종
2)년 간경도감 폐지
위의
일별에서 보듯 간경도감본 한글경전들은
대체로 대승불교 경전이거나 선서류이다.
이
경전들은 한국불교 사상 형성의 주류를
이루어 온 경전과 강원의 선수행(禪修行)
지침서 역할을 한 경전들이다. 모두 목판본으로
당시의 정연한 표기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간략하게 각 책들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간경도감본
불전언해류는 대체로 경(經)이나 경소(桎疏)에
한글 구결을 단 후 번역하는 방법을 취했다.
번역문의 한자에는 동국정운 한자음이
주음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언어 정책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구결문의
정음 구결에는 방점을 찍지 않아서 간경도감
설치 이전에 간행된 불경언해서들과 구분된다.
앞에서(전회) 언급한 바와 같이 <능엄경언해>
10권 10책은 간경도감본 언해서들의 전범(典範)
역할을 해서 이후 간행된 책들은 이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법화경언해>는
구마라집이 한역한 <묘법연화경써 온릉
계환이 요해하고 일여(一如)가 집주한
「법화경과주」를 합본하여 세조가 친히
구결을 달고 은사로 등이 번역하였다.
다만 번역은 경본문과 계환의 요해에만
국한하였다. 이후 몇 차례 복각 간행되었으나
원간본은 영본으로 전한다.
<선종영가집언해>는
당나라 영가대서 현각의 <선종영가집>에
송나라 행정(行@)이 주를 달고 정원(淨t原)이
수정한 과문에 구결을 달아 번역한 책이다
2권 1책의 목판본으로 세조의 구결에 신미,
황수신, 효녕대군 등이 번역을 했다. 원간본
중 권 상은 동국대, 권 하는 서울대 일사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아미타경언해>는
같은 내용이 월인석보 권 7에도 번역,
편입되어 있고 활자본(1461년간)으로도
간행된 바 있는데 간경도감에서 목판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아미타경언해>의
역기에 '어제역해'라 한 것은 「석보상절」이나
「월인석보」를 세조가 직접 찬 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마라집 한역 자미타경」에
천태대사 지의(智顎)가 주석을 붙인 책을
번역한 것인데 번역은 원문에만 이루어졌다.
건기에 판 밑을 작성한 안혜(安惠)가 명기되어
있다. 원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금강경언해>는
구마라집의 「금강경」 본문과 육조대사
혜능의 구결에 세조가 한글로 구결을 달고
한계희 등이 번역하여 간행한 2권 i책의
목판본이다. 권말에 「번역광전사실」을
두어 간행 경위를 밝히고 있다. 원간본은
일반에 공개된 바 없고 복간 중간본인
홍치판(1495년간)과 안심사본(1575년간)이
전한다.
<반야심경언해>는
당나라 법장 현수대사의「반야심경약소」에
송나라의 종회가 주해를 붙인 「반야심경현정기」를
저 본으로 하여 세조가 구결을 달아 한계희
등이 번역하였다. <금강경언해>와
같이 간행되어 두 책에 똑같이 「진금강경심경전」이
실렸다. 원간본은 서울대 일사문고와 소요산
자재임에 있다.
<원각경언해>는
당나라 규봉 종말의 「원각경대소초」에
세조가 구결을 달고 신미, 한계희, 효령대군
등이 번역하였다. 'ㆆ' 과 각자병서가
전면 폐지되어 국어사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분권이 복잡하다. 원간본은 영 본으로
전하교복각본이 있다.
<목우자수심결언해>는
고려조의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 결을 언해
한 책이다. 동궁 편당인비현합(丕顯閤)에서
구결을 달고 신미가 번역 하였다. 건기
다음에 판 밑을 작성한 안혜(安惠), 유환(柳晥),
박경(朴耕) 등을 명기했다.
<사법어언해>는
혜각존자 신미가 구결을 달고 번역한 책이다.
환산정응선사시몽산법어(晥山正耽禪師示蒙山法賠)
등 4편의 법어가 실려 있는데 10장 정도의
적은 분량 때문인지 현존 원간본으로 보이는
책은 <목우자수심결>에 합 철되어
전한다.
법화경
공부/부모와 길 잃은 아들 안중철/서울캠퍼스
법사
''세존이시여,
대부호는 곡 여래이시여 저희들은 모두
부처님의 자식과 같고, 여래께서는 항상
저희들을 그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법화경 (신해품)
신(信)과
해(解)에 대해 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신이
있다고 해가 없으면 무명을 키우고, 해가
있고 신이 없으면 사견(邪見)이 커진다.'고
하였다. 이는 불교 신앙을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감정적인 믿음만으로는
참다운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믿음만 있으면 오히려 번뇌의 근본인 무명만
커질 것이므로 믿음과 더불어 해(解)가
필요한 것인데, 해만 있고 믿음이 없다면
그릇된 생각만이 왕성해진다는 것이다.
이
품에는 수보리, 가전연, 가섭, 목건련의
4대 성문이 법화경 설법을 듣기 전까지는
소승의 깨달음에 만족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어보려는
용기도 가져 보지 못하였는데, 앞서 비유품에서
성문인 사리불에게 수기(授記) 주심을
보고 성문도 성불할 수 있다는 세존의
선언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부처님께
크나 큰 고마움을 느끼고 구하지도 않은
한량없는 보배를 얻은 느낌이라고 하며,
자기들의 느낌을 장자궁자비유(長者窮子譬喩)라는
비유설화로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부호(長者)가 자식을 잃어버린 지 50년이
되었다. 그는 오직 아들을 찾아서 재산을
물려주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이
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잃고
초라한 거지의 모습으로 유랑하던 아들(窮子)이
부호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꿈에도
못 잊던 아들을 본 그 부호는 아들을 불러들이려고
했으나, 거지의 모습이 된 아들은 집사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는 아버지인 부호의 위풍을
보고 두려워하여 도망을 친다.
부호는
집사를 시켜 데려오도록 했으나 아들은
놀란 나머지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부호는
아들을 놓아주고 후일 집사를 초라한 모습의
유랑자로 변장시켜 아들에게 접근시켰다.
이윽고 아들을 부호의 집에 화장실 청소부가
되도록 권유하는데 성공했다.
장자는
그 아들에게 나는 이미 늙은 몸이니 나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아무 걱정 말고 있으라고
일렀다. 아들은 자신을 아들처럼 넉넉하게
대우해 주는 부호를 정말 아버지처럼 여기고
게으름을 피는 일 없이 만족하게 일을
했다.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 부호는 병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었다. 부호는 이제 죽을 때가 되었음을
알고 국왕, 대신, 일가친척을 불러 모아놓고
그 아들이 자신의 실자임을 밝히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준다.
이
이야기 속의 유랑하던 초라한 아들은 부처님을
우러러 아뢰고 있는 네 성문과 우리 모두의
상징이다. 부호는 물론 부처님을 가리킨다.
가난한 아들이 뜻밖에 부호의 재산을 물려받았듯이
성문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수기라는 보주(寶珠)를 받게 된 것을 이렇게
비유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천태대사는
이 설화를 근거로 하여 유명한 5시의 교상판석(五時.
敎相判釋)을 하였다. 교상판석이란, 부처님이
평생 동안 설하신 교설을 그 설하신 시기와
교설의 뜻이 깊고 얕음을 가려 분류하고
체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교상판석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천태대사는 5시 교판의
근거를 이 신해 품의 장자궁자 비유에서
구하고 있다.
이
비유설화에서 부호가 자신의 아들이 집
앞을 지나는 것을 발견하고 급히 데려오려니까
아들이 놀라서 기절한 것은 화엄경을 설하심에
비유된 것이라 하고, 행색이 초라한 집사를
시켜 그 집에 와서 화장실을 치우게 한
것은 아 함경을 설하신 것에 비유된 것이며,
부호 자신이 그 아들에게 접근하여 여러
가지 당부한 것은 방 등 경을 설하신 것에
비유한 것이라 하고, 재산 관리를 맡긴
것은 반야경을 설하신 것에 비유된 것이라
하며, 재산 상속을 선언한 것은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하신 것에 비유된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시인 소동파가 '계곡의 흐르는 물소리
모두가 부처님 말씀인데 산천초목이 어찌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이 아니겠는가'
라고 읊었듯이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이 본래 하나인 도리를 모르고
미망에서 헤매는 우리들 중생을 궁자로써
비유하고 있는 이 '궁자(窮子)의 비유'는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 중에서 가장
유명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그래서 백미에 꼽히는 비유로
알려져 있다.
불심의
창/알 수 없어요 정수현/일어일문학과
교수
아,
미륵반가사유상.
조계사
맞은편에 자리했던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이면
스케치하곤 하던 그 미소, 모나리자의
미소에서도 감흥을 못 받은 마음이 반가사유상의
불가사의한 모습과 표정 앞에서, 그 이미지의
완벽한 형상화에 충격을 입었습니다.
그후
일본의 국보1호인 반가사유상 앞에서 한번더
놀랐습니다만.....
이름
없이 작게 피어 있는 꽃을 보고 작은 미소가
떠오르면, 그 미소가 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로 연결될까요.
아름다운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山寺의 풍경소리,
그 풍경소리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목탁소리,
범종의 울림소리, 그리고 북치는 스님의
옷깃에 이는 바람소리......
이
모든 것에 정서적으로 美를 느낍니다.
아,
육신은 없다.
「이름
값을 하며 살고 싶다」는 친구에게, 아니야.
그것으론 안돼. 「이름은 없다」에서 시작해야지.
라며 대화를 이어가게 되는 오늘의 제
마음.
「마음」字가
들어가는 책을 찾아서 새삼 마음공부를
하며 느끼게 된 결과입니다.
지혜롭고
경이롭다는 지리산 자락의 맑은 호수 옆.
泉隱寺의 고요함같이.....
낭만어린
전설 속에 오랜 세월이 녹아 있는 무량수전
浮石寺의 적막함처럼......
땅끝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茶心같이 ......
제
마음도 그러하도록 새삼 바라며, 평온하게
제 마음을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또한 육신이 없으니 病도 없습니다.
아,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다.
정각원이
앞마당처럼 바라다 보이는 위치의 제 연구실
창문에 붙어있는 詩句입니다. 언젠가 제
강의를 듣던 스님 한 분으로부터 받은
글씨인데, 지금도 화두처럼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佛心의
窓」에 원고를 써라 하신 法山스님의 마음도,
끝없는 無明心인 저의 마음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제껏 제 옷깃을 스쳐 간 모든
분들과 앞으로 스칠 분들께 한없이 샘솟는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좋은 계기라는 소박함으로
이렇게 붓을 들었습니다.
아아,
참불자란
가을
선운사 코스모스 숲길을 붉게 태우는 저녁노을의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은 누구의 마음일까요.
한용운 시인의 마음인가요.
우리의
아름다운 유명사찰과 함께 일본의 여러
사찰들을 떠올려보며, 문득 芬道를 생각합니다.
일본
다도에서는 요란한 절차와 형식을 갖추고
末芥맛을 음미합니다만, 제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은 우리의 직지사 다실에서
였습니다.
한
비구니 스님이 마치 시골 초가집 아낙네가
부뚜막에서 숭늉 내오듯이 無心하게 타
주신 未茶의 맛이 그렇게 오묘했습니다.
삭발과 승복조차 정다웠습니다.
참불자도
이런 것이 아닐런지요.
IMF로
우리들 마음은 답답하지만, 피의 달이자
은혜의 달인 5월을 맞이하여 제 마음에도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願을세워
봅니다.
참선하는
도량의 시원한 정적만큼이나 제 마음이
이렇게 시원할 수 있음은 왜 일까요.
무엇보다도
마음이 우선이니 오로지 모든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불교의
상징들/코끼리와 부처님 김미숙/불교학부
강사
코끼리는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서도 부처님과 가장
인연 깊은 동물로 첫 손에 꼽힌다. 현재
인도에 남아 있는 초기 불교의 예술품들에서도
부처님의 좌우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조아리고 설법을 듣고 있는 코끼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불교 경전에서도
코끼리는 용왕과 더불어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인공들 중의 하나이다.
부처님과
코끼리의 인연은 불교의 출발점이 되는
때, 즉 구타마 싯달타의 탁태(托胎)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봄날, 편안히 쉬고 있던
마야 왕비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어금니가
여섯 개인 하얀 코끼리, 즉 육아(六牙)
백상(白象) 한 마리가 왕비의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이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싯달타 태자였다.
코끼리는 싯달타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도솔천에
머물던 보살이 하얀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서
마야 왕비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싯달타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부처님의 출생에 얽힌
연기설화 외에도, 경전에서는 마야 왕비의
뛰어난 미모를 코끼리의 코에 비유한다.
마야 왕비의 팔은 코끼리의 코보다 더
부드러웠고, 그 다리는 코끼리의 코보다
더 날씬했다는 묘사가 그것이다. 그 밖에도
불교에는 수없이 많은 일화와 비유들이
코끼리를 소재로 삼고 있다.
마야
왕비의 꿈에 등장했던 코끼리는 불전(佛典)에서
육아(六牙) 백상(白象)으로 표현되곤 하는데,
굳이 여섯 개의 어금니가 강조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흔히 보는 코끼리의
몸 빛깔은 회색빛을 띠기 마련이지만,
하얀 빛의 코끼리가 강조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코끼리의
이빨은 어금니 여섯 개와 앞니 두 개로
구분된다. 특히 강판 모양의 돌기 형태로
이루어진 앞어금니 세 개와 뒤어금니 세
개를 합한 여섯 개의 어금니는 질긴 식물의
섭취로 인해서 점차 닳아빠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닳아빠진 어금니는 여섯 번까지
새로 돋는다. 여섯 번째로 새로 돋은 어금니가
닳을 정도가 된 코끼리의 수명은 50살에서
60살에 이르고 음식물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까닭에 자연히 죽게 된다. 따라서
육아, 즉 여섯 개의 어금니를 지닌 코끼리는
성숙한 어른 코끼리임을 뜻한다.
어금니와
달리 앞니 두 개는 흔히 상아(象牙)라고
하여 코끼리의 상징처럼 되어 있으나 모든
암컷 코끼리와 수컷의 40%는 앞니가 없다
일생토록 예속하여 자라나는 앞니는 나이
많은 코끼리일수록 거대하여 그 위용을
상심하는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힌다. 흔히
이름높고 덕 높은 스님을 가리켜서 용상(龍象)
즉 코끼리라고 부르며, 스님들의 각자
소임을 분배하여 적어 놓는 명단을 용상방(龍象榜)이라하는
것도 모두 코끼리의 위용 넘치는 특징에서
비롯된 상징적 용례들이다.
코끼리의
피부는 어두운 잿빛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차 밝아져서 은빛 나는 연회색을 띠게
되며 흰빛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흰빛의 코끼리, 즉 백상이라 부를 만큼
맑은 빛의 코끼리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백상이라 함은 곧 고귀함을 뜻하는 상징이
되었다.
대개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훨씬 작고 가볍다는
아시아 코끼리도 몸길이가 3미터, 몸무게는
3톤을 넘기도 할 만큼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이 거대한
몸집의 코끼리를 길들여 부려왔다. 코끼리
한 마리가 사람 60경과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세심한 보살핌과 막대한 사료
등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람들의
생활근처에 머물러 있었던 동물이었다.
따라서 인도 종교와 신화 속에 코끼리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코끼리인 가네샤는 쉬바
신과 그의 아내 파르바티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본래 두 개의 상아를 지녔던 가네샤는
잠들어 있던 쉬 바를 만나러 온 파라슈라마를
저지하다가 서로 싸우는 사이에 상아 하나를
잃어 버렸다고 한다. 한 개의 상아를 지닌
가네샤는 그 팔이 네 개 또는 여섯 개로
늘어난 모양을 갖춘 채 환희천(歡喜天)
또는 성천(聖天)으로서 신봉되기도 하며,
지혜의 신이자 재물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하지만 코끼리의 생태라든지, 그
생김새를 토대로 성립된 상징 요소들은
지혜와 재물에 그치지 않는다.
일찍이
인도인들이 상정했던 코끼리의 보편적인
덕성에는 숭배할 만한 온갖 덕목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인내와 지혜, 뛰어난
기억력, 친절과 사랑, 활력과 위력, 무적의
힘과 용맹성, 불사와 장수, 온순과 순종,
자신을 보살펴 주는 이에 대한 한결같은
헌신과 충직함 등등, 코끼리는 최고의
성품을 두루 갖춘 동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코끼리에게 이와 같이 선한 성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코끼리는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동물로서 자신을 해친 이에 대한
앙심과 복수심을 가지고 있으며, 전투나
사냥에서도 큰 몫을 담당할 만큼 사납고
거칠며, 성마르고 반항적인 성질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난폭한 코끼리를 능숙하게
다루며 길들이는 재주는 매우 뛰어난 능력으로서
사람들의 찬탄과 선망을 자아내기도 한다.
경전에서는
데바닷타가 사나운 코끼리를 풀어 놓음으로써
부처님을 해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코를 높이 쳐들고
귀와 꼬리를 세운 채로 미친 듯이 부처님을
향해 돌진하는 코끼리를 보고서 사람들은
모두 숨어서 그 광경을 보며 부처님의
목숨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정작 부처님의
면전에 다다른 코끼리는 코를 축 늘어뜨린
채 무릎을 꿇고 마는 것이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게송을 남겼다.
''사람들은
코끼리를 다루는데, 몽둥이와 갈고리,
채찍을 사용한다.
부처님은
칼과 몽둥이를 쓰지 않고서도 지금 코끼리를
다루는구나.''
진정한
조어(調御) 장부(丈夫)였던 부처님.
일체중생,
모든 목숨들을 조복시키고 제어하여 열반의
언덕으로 이끌어 주는 부처님. 그는 동물의
제왕이라는 코끼리마저 감복시켰기에 코끼리
중의 왕, 상왕(象王)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신행상담/선지식 장계환
스님/불교학부 교수
가끔
교정에서 "**큰스님 초청 법회"라는
프랭카드를 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말하는 큰스님의 의미와 어머니가
절에 다녀오셔서 "오늘 **선지식의
법문은 참 좋았다."고 할때의 선지식이라는
칭호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대체로
선지식 하면 먼저 큰스님을 머리 속에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맞는 생각인지요.
선지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경상대학교
경제학부: '한 아름')
원래
선지식이라는 용어 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좋은 친구, 나를 잘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선우(善友)
심우(心友)라는 뜻이 있고, 둘째는 훌륭한
지도자나 덕망이 높은 스승을 가리키는
뜻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두 번째 뜻을
선지식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은 좋은 친구나, 마음의 벗이 선지식이란
말에 더욱 폭넓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엄경』 입법계품에 보면,
문수보살이 선제동자에게 내려준 가르침의
말씀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대가 구도의 길을 떠나 만나게 되는
그 누구도 모두 그대의 스승인 선지식이다''
이
말은 결국 어떠한 사람도 나에게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임과 동시에, 나 또한
누구에게나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우리는 상대로부터 반드시
배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볼까요? 화내는 친구의 보기
싫은 얼굴에서 화났을 때의 내 모습이
얼마나 추한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융통성 없고 이기적인 이웃 사람으로 인하여,
관용과 이해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통감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베풂을 받고도 배은망덕 하는 친구들로부터
무주상(無住相)보시의 실천 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할 패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선배들을
통하여 아 만과 자비심의 차이를 역설적으로
배우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들 모두 나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스승들입니까? 이들은 적어도 나의 생활에
자극과 활력을 주고, 또한 가르침을 베풀어주는
선지식들입니다. 그래서 법상에 앉아 법문
하시는 법사스님, 학식이 높은 학자나
사회적인 유명인사, 그들만이 결코 선지식이
아니라는 뜻 입니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만이 선지식이 아니고,
나 또한 그들에게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항상
존경하는 마음과 하심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할 때, 상대도 나를 선지식으로 대해
줄 것입니다.
근래에
접어들면서 스승다운 스승, 선지식다운
선지식을 찾기 어려운 시대라고 다들 한탄하고
있지만, 사실은 스스로기 진심으로 배우고자
노력할 때, 비로소 참된 스승과의 만남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끝으로
질문한 큰스님과 선지식은 '나를 이끌어
준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뜻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가람의
진수/관음성지 낙산사 유문용
우리가
절에 다니면서 많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모시고 공양을 드리고 있지만 관세음보살
만큼 많이 찾게 되고 수시로 암송을 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가 못하다. 관세음보살님은
우리 마음속에 항상 계시고 언제 어디서나
수시로 보살님께 기원을 드릴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해 왔다. 답답한 일이 생기거나
불행한 일이 닥치면 무심결에 나오는 말이
''관세음보살-''하는 암송이 저절로 나온다.
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말은 반드시 불자님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다 아는 말이다. 그만큼 생활화되어 있는
말이다. 아미타불은 극락정토의 추존이
되시는 분이고 관세음보살님은 그 자비가
한량이 없어서 우리가 극락왕생의 발원도
들어주시는 보살님으로 알고 있다. ''관세음보살님,
아미타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도록 발원합니다.''하는 암송으로
해석을 하고 싶다.
이런
관세음보살의 관음신앙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가슴깊이 새겨져 있었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극락왕생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좋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원시 사회에서부터 있어 왔다.
불교가 도입되면서 극락에 대한 동경은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동경의 대상이
된다.
부처님을
모시는 가람 말고도 관세음보살님을 주
존으로 모시는 도량이 조성되기에 이르러서
관음의 성지로 부각이 되게 된다.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보면 관세음보살님이
주처(住處)하시는 곳은 해상(海上)의 보타낙가산(寶陀洛迦山)이라고
되어 있다.
이
낙산사(洛山寺)는 3대 관음성지로도 유명하지만
관동팔경으로 유명한 의상대가 있고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절경에 홍련암이 있다. 여기
낙산사는 바로 해변에 위치하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경의 바위 위에 있는 의상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망망대해와 암벽에 부딪히는
파도, 그리고 절경의 바위가 갈라진 위에
있는 홍련암의 운치는 누가 봐도 매혹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창건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록에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가서 유학을 할 때 지엄 화상으로부터
화엄(華嚴)을 수학하고 귀국하게 되는데
그때가 670년의 일이라고 한다. 귀국해서
동해에 관음보살이 살고 계시다는 곳을
찾아와서 7일 동안을 염불을 하면서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천상에서 8부중이 나와서
굴속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고 하고 하늘을
향해 예불을 드렸더니 용이 여의주를 주었다고
한다. 이때 관음보살께서 나타나셔서 이
산 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날 것이니
그 곳에 불전을 이루라는 말씀을 했다고
한다. 이곳에 금당을 짓고 관음보살님을
모시고는 이 절을 관음보살이 계시는 절이라고
해서 낙산사라고 했다고 한다.
원래
관음보살이 계시는 보타낙가(寶陀洛伽)는
낙가(洛伽)라고도 하고 그 산을 락산(洛山)이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어느 산이던지 부처님과 보살님이 상주하고
계시다는 신앙은 전국에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신곡마다 절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의상대사가
이 절을 개산 한 이래 고려조에 와서 몽고란이
있을 때 큰 손실이 많았고 조선조에 와서
오대산에 자주 드나들던 세조에 의해서
1468년경에 많은 법전들이 중창이 되는데
이때 지금 남아 있는 석조물인 7층 석탑과
절 입구에 있는 홍예문도 이때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중창이 이루어
져서 대찰로 운영을 해 오다가 임진왜란
때에는 그야말로 이 엄청난 가람이 잿더미로
변하고 폐허 상태로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종년간에 1905년경에 다시 복원이 이루어
졌지만 옛 같은 규모의 절은 볼 수가 없고
1953년 6.25가 휴전으로 들어가던 해에
군인인 이형근 장군이 원통 보전과 범
종각을 세우고 가람을 정비하였다고 한다.
절
입구에 들어서면 성문과 같은 홍예문을
볼 수가 있다. 가람을 들어가는 입구에
성곽의 홍예문을 조성하는 것은 전북 김제의
금산사에도 성문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조성하는 일이 없다. 그 절에 국사나 왕사같이
국가에서 시호를 내리는 스님이 계실 때
나라에서 세워주는 일종의 정려문과 같은
기능인데 조선조에 왕실에서 오대산의
상원사나 월정사에 왕래가 잦던 시절이어서
가능학리라고 보여진다. 절 앞에 조성되는
홍예문으로는 가장 잘 남아 있는 문이다.
이
낙산사의 주존 법당인 원통 보전에서 담장
밖으로 나와서 왼편으로 보면 조그만 협문이
하나 서 있다. 이 곳으로 나가야 해수관음상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다. 왼편에 ''해수관음성상
조성 연기비''가 서 있는데 그 기록에
보면 해수관음성상이 1972년부터 l977년까지
5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좀 더 들어가 보면 굉장히 넓은
광장이 나오고 그 한 가운데 관음보살님이
서 계시는데 그 장대함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법의(法衣)의 선의 유려함과 크면서도
적절한 비례감각, 부드럽고 인자한 상호는
누가 보더라 툭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높이가 16미터가 된다고 하는데
16미터면 보통 건물의 5층 건물보다 더
높은 높이가 된다. 말로는 그 규모가 동양
최대라고 한다. 이 보살님을 조성하는
데는 가장 육색(肉色)이 도는 부드러운
돌을 구해야 하는데 전북의 익산에서 구해서
썼다고 한다. 이 보살님을 조성하는 데에는
그 돌의 무게가 750톤이나 된다고 한다.
10톤 대형 트럭으로 75대나 된다고 봐야
한다. 이 해수관음상을 조성한 분은 불교조각을
전문으로 하시는 조각가 권정환씨가 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관세음보살님을 그야말로 천상에
계시는 것처럼 볼 수 했게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지금 보살님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정면에 작은 연못이 있고 연못
옆에 유리 박스가 보인다. 이 연못 오른편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면 법당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법당의 오른편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서
보면 부처님은 모셔져 있지 않고 정면
벽의 높직한 자리에 유리창문이 보인다.
이 창문은 위로 경사지게 터널처럼 연결이
되어 있고 이 2중의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장면에 관세음보살님의 상체부분이 보이게
된다. 푸른 창공 위에 뭉게구름이 있고
거기에 관세음보살님이 우리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계신다. 우리들을 직접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 같아서 더 친밀감 이가고 아주
성스러워 보이는 장면이다.
거기다가
안팎으로 연결된 2중의 유리창 사이에
사방으로 벽화를 그려 놓았는데 천정에는
청룡과 황룡의 쌍룡이 구름 사이를 휘감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또 오른편과 왼편
벽에는 공양 비천상을 그려놓았다. 또
바닥 면에는 연화좌에 앉아 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다. 이 관세음보살님은 바다 가운데
계시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보살님이
좌정하신 연화좌가 바다에 파도를 타고
있는 것으로 봐서 분명히 해 중의 보타낙가산에
계신 것으로 해석이 된다. 이 유리창 밖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고 했는데 안에서 볼
때에 물을 건너 보살님을 뵐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을 상징해서 조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원통 보전 쪽으로 다시 잠깐 나가다가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내려가면 의상대로
가게 되고 거기서 왼편 길로 내려가면
홍련암으로 가게 된다.
이
의상대는 6각 정자로 조성되어 있는데
원래는 의상대 건물이 서 있는 바위가
의상대이다. 의상대사께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자 해서 좌선을 하던 자리라고
한다. 이 건물은 1925년에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는 건물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의상대사께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푸른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석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시고 이상히 여겨
석굴에 들어가 7일 동안 염불수행을 하셨는데
갑자기 바다에서 붉은 연꽃이 피어오르고
그 홍련 위에 관세음보살님이 계셨다고
한다. 이렇게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서
이 곳에 암자를 짓고 홍련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해안을 따라서 내려다보면 나지막한 암반
위에 홍련임이 있다. 의상대 보다는 많이
낮게 있지만 그 풍경이 또 절경이다.
이
홍련임의 초창(初創)은 신라 문무왕 12년
672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 영조 28년 1752년과 정조
21년 1797년 그리고 순조 2년 1802년에
중창과 중수가 거듭 되다가 1975년 주지스님이신
원철스님이 중창을 해서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의상대사께서
의상대에서 선정에 드실 때 용이 나타나
여의주를 주었다고 하는데 이 용이 암자를
수시로 드나들고 부처님의 불법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잡아주기 위해서 그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갈라진 바위 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보어진다. 법당 안에 들어가서
마룻바닥에 있는 구멍의 뚜껑을 열고 보면
아찔할 만큼 깊은 바닷물이 보인다. 아마
바다로 배를 타고 들어가서 보면 이렇게
갈라진 바다 위에 지어진 것을 실감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자리에 집을 짓느라고 꾀나 애를 먹었을
것 같다.
이
법당에 들어가는 것은 입지 여건상 측면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들어가서 정면으로
높은 수미단 위에 보궁이 있고 거기에
관세음보살님이 계신다. 물론 관세음보살님은
보처불이 없이 독존으로 계시고 뒤에 후불
행화가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다. 후불탱화는
다른 경우와 다르게 앞에 모셔진 관세음보살님이
본존이 되시고 탱화에는 광배만 그려져
있다. 위에 있는 보궁인 닺집도 격식은
아주 고식(古式)으로 조성을 했고 특히
보 궁 안의 쌍룡은 연륜이 많은 노룡(老龍)으로
조각이 되어 있다.
여기
법당의 보궁은 건물의 정면이 되는 부분에
또 하나의 보 궁이 있다. 이 보궁에는
제석도가 걸려 있는데 한 법당 안에 보궁이
2개나 있는 경우도 그렇게 많지가 않다.
주존으로 게시는 분이 대등한 위치에 계신
분들이 같이 계실 때는 더러 보궁이 3개인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는 보살님이 주존으로
계시고 제석은 탱화로 그려졌는데도 보궁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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