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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4월호 / 통권 30호 / 불기
2541(1997)년 4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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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어/생명
사랑, 주는 마음 오녹원 큰스님
동국
가족 여러분!
대망의
새 홈을 맞아 송석구 총장님을 위시한
여러분과 함께 개강법회를 갖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그리고 이 생동하는 봄의 기운과
더불어 개교 91주년을 맞는 우리 동국대학교도
올해에는 더욱 활기가 넘쳐 흐르게 될
것을기대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무엇이 이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나旦色게도 만드는지, 그 원인자는 누구이며
그렇게하는 에너지가 무엇으로 말미 암인지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가르침을 정도라 말하는데 순리(巡吏)란
여기서나오고, 역리(逆理)란 올바르지
못한 외도에서 유래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순리에서는 즐거움을 얻게 되고, 역리에서는
고통을 갖게 되는 것이 만물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법칙을 설하는 불교는 정도(正道)
입니다. 대학생활이란 이 정도를 찾는
길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혹자들은
불교를 어려운 종교라고 말하나, 이는
아주 잘못된 견해입니다, 불교는 만물의
법칙과 이치에 순응하여 사는 길을 가르칠
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우리의 삶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둘이 아니라고 한 것은 삶의
현장을 떠나 따로 불(佛)이 있지아니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모든 생명에는 다 살려고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한자로 표기하면 생의(生后)가
되겠는데 이것이 삶의 의지입니다.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뭇 중생들의
마음이라 할진대, 이것은 생길 때부터
차별이 없고 평등한 것입니다. 일체 만물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이 평등한 쟁의를
잘 복돋우어 하나 하나의 모든 생명을
온전히 가꾸어 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실천윤리에서
자비를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있습니다,
자비는 생명을 기르는 정신입니다.유정,
무정의 일체중생을 보살피고 살리는 것입니다.
불교가 중생의 삶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생명을 기르는
일이 중생의 삶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여러분들이
팔만사천의 법문을 다 읽지 않더라도 남의
생명을 나의 것 이상으로 존중하고 아낀다면
이미 보살도(菩蔯道)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양 종교와 달리 불교의 역사에는 피를
흘린 일이 없습니다. 삼라만상을 똑같이
평등한 존재로 보고 그 본래의 생명가치를
지극히 존중해 온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악(惡) 중에 제일 큰 악운 성명을 해치는
일이고, 선(善) 중에서 제일 큰 선은 생명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교수,
직원, 학생 여러분!
우리가
이 자리에서 법회를 갖는 것은 악을 짓지말고
선을 행하자는데 근본 뜻이 있습니다.생명을
사랑합시다.
그런데
생명을 사랑하려면 마음을 써야 합니다.
마음쓰는 공부가 바로 불교 공부입니다.
이 마음은 형태가 없습니다. 화엄경에는
''부처님의경계를 알려고 하거든 저 허공을
관찰하는 것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텅 비니 걸림이 없는것이고, 그러니 만물을
다 수용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텅빈 마음」에다 무엇을 자꾸 채우려
하는데 그것이 병통입니다, 불교의 참선공부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공부입니다.
마음에 채우려하면 거기에 들어 가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탐(貪) .진(眞)
.치(癡) 삼독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마음 속의 이 삼 독인데
채워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니 텅
비워서 맑게 하여 생명의 근원자리, 불생불멸의
마음 자리로 돌아가야한다, 이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어느날 누군가가 부처님께 여쭤
봤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가는곳이 없지'' 이
대답을 알아듬지 못하자, 부처님께서는
장작을 가져오라 하여 쌓아 놓고 불을
지피시고는 ''이 불이 어디서왔는고?''
''장작으로 부티 왔습니다.'' 그런 다음
장작이 다 타서 불이 꺼지자 ''불은 어디로
갔는고?'' ''장작이 다 타서 꺼졌을 뿐
간 데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이와 같아서 잠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삼독을 쌓으려 하는가.
생명의
중심되는 자리에서 보면 마음의 작용에
따라 극락도 되고 지옥도 되고 사랑도
되고 미움도 됩니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마음을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 하여 진여심(眞如心)과
생멸심(生滅心)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진여 심은 일심의 본체가 평등하고 차별성을
여윈 것을 말하니 시공에 구애되지 않음이요,
생멸 심은 연(緣)을 따라 생멸하여 차별성을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육근.육식의 모든
알음알이가 이 생멸 심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진여심에 귀의해서 수행을 하게
되면 안심임명할 수 있습니다. 참선은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심(一心)에는 세 가지 큰 게 있습니다.
체대(體大) . 상대(相)枕) , 용대(用大)가그것인데,
체대는 중생심의 실체, 진여 자체를 가리키며,
상대는 진여가 갖추고 있는 우량의 덕성을
가리키고, 응대는 그 진여가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출세간의 선인(善因)을 닦게
하여선과(善果)를 얻게 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음을가리킵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마음 속에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도리를
어찌 아느냐? 우리 마음은 이 지구를 다
집어 넣어도 한 곳도 차는 곳이 없습니다.
허공이 모든 것을 다 수용하되 채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진여 자리를 깨닫지
못하면 중생의 마음이고, 깨달으면 부처의마음입니다.
그 근원 자리는 하나입니다. 얼음은 고체가
되든 안개 같은 기체가 되든 그 변하지않는
근원은 바로 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형태의 물건이 생겨나든 그 근원은 마음인데
그 마음이 모든 입력에 따라서 중생심도
되고 보살심도 되고 불심도 되는 것입니다.
중생심이라는 것은 중다한 생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생심을 한 껍데기
벗기고보면 생멸이 없는 일심으로 돌아가는데
그 일심 자리가 곧 자기의 체성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 우주와
지구촌과 생사 전체를 부처로 보고 보살로
보고 청정 법신 비로자나불로 보는 것입니다
이 정도 의식이 수련 되어야 진짜 신심이
나와서 모든 사람을 타부처로 보고 모든
중생을 모두 보살로 볼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평등이 나오고 평화가 나오고 신뢰가
나오고 하나로 결합을 안시키겠습니까?
불교는 모든 생명체가 한 가족이라 합니다
제도할 사람, 제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본래의 청정한
광명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불가능이 없는 모든 가능의
덕성을 우리의 일심이 구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 밖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심안에 만물이 존재하고,
무량한 덕상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相大)라고
합니다 모양이 가장 큰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마음은 적은 게 아닙니다.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사물은 마음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응대가 되는 것입니다 작용이
큰 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이나 인생이나
영묘한 작용이 있고 신령스런 성품이 있습니다
마음이 박아져서 보게 되면 열성계가 보이기
때문에 그대로가 극락입니다. 이것을 법계의
모습을 본다고 하죠.이런 실천이 진여(진리)입니다
그러면 불.법 .승을 믿는 것이고 일심과
이문(진여문, 생별문)과 삼대(체대 .상대
.용대)의 의미를 알게 되고 만유의 근원과
우주의 생명이며 대자연의 실상인 진여에
대해서 저절로 합장 정배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육바라밀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니 곧 실천입니다. 실천이 있을 때 불교를
믿는다 할 것입니다. 육바라밀의 실천
행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보시입니다.
보시란 주는 마음이고 주는 행위입니다.
진리가 되었든, 재물이 되었든, 미소가
되었든 내게 가능한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베푸는 것이 보시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
진여를 가리는 탐.진.치 삼독이 깃들 게
되는 것은 집착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는
마음, 주는 행위는 이 집착을 끊어 내는
가장 첩경의 길입니다.우리가 인생을 주는
마음으로 산다면 무슨 근심과 걱정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일생도 따지고 보면 주는 마음,
주는 행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인륜 도덕이
무너지고 세상이 어지러운 것도 그 원인은
각자가 이기심으로만 집착되어 주는 마음,
주는 행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나는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나쁘게도 하는
그 원인자는 누구이며 그런 에너지는 무엇인가
살펴보자고 하였습니다. 이제 결론을 지어
말한다면 주는 마음은 세상을 좋게 하는존재고,
집착하는 이기심은 세상을 나쁘게 하는
에너지와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주는
마음 자세가 확립되면,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문은 쉽게 닦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주는
마음 이두 가지 마음 도리를 한번 더 여러분께
일깨워 주는 것으로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여러분들의
끊임없는 정진을 부탁합니다.
일주문/조용한
변신의 징조 윤호진 스님 / 불교문화대학
교수
1981년의
일이었다. 인도 여행길에 델리에 들려
우리 나라 대사관을 찾아갔다. 불교와
인도철학 등을 연구하는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 그 곳 대학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의 말은 실망스럽게도
불교나 인도 철학연구를 하고 있는 학생은
고사하고 인도 전체 에우리 나라 유학생이
3명뿐이라고 했다. 그것 도도 사람은 부부학생이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91년에 다시 인도에 갔다.
놀랐던 것은 그 동안 우리 나라 불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인도에 다녀갔던지 불교성지
주위에 살고 있는 인도 사람들은 우리
나라 말을 한 마디씩 하기도 했고, 특히
장사꾼들 가운데는 서툴고 간단하긴 했지만
한국말로 기념품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3년
후에 다시 인도에 들렸다. 4대 성지에는
한국사원의 건립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보드가야와 바이샬리에서는 우리
나라 스님들이 시작한 학교도 있었다.
중부 인도에 있는 ''뿌나'' 라는 대학의
산스크리트와 빨리어 학과에서는 한국
학생들이 무려 16명이나 공부하고 있었다.16명
가운데 13명이 스님들이었다. 외국인으로서는
우리 나라 학생들이 가장 많다고 했다.
바라나시 대학, 마드라스 대학, 캘커타
대학, 델 리 대학, 이름조차도 생소한
마이소르 대학, 산티니케탄 대학 등에서도
불교. 인도학 관계공부를 하고있는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다.
작년과
이번에 스리랑카와 미얀마를 여행하면서도
놀랐다. 이들 나라에서도 가는 곳마다
우리 나라 스님들과 불교인들의 자취를
볼 수 있었다.불교관계 대학이나 사원을
찾아가면 대부분 한국승복을 알아 보았다.
미얀마 수도인 양곤의 한선(禪)센타에서는,
그 곳에서 수행하고 있는 20여명의 외국인들
가운데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13명이나
되었다. 양곤에서 북쪽으로 2천리나 떨어져
있는 만달 레이라는 도시의 승가대학의
법당 벽에 한국 스님들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도저히 한국사람들이
왔을 것 같지 않은 한 지방도시의 사원에
들렸을 때도 주지스님이 우리 나라 승복을
알아보면서 그 곳에도'코리언 망크'가
한 사람 와서 일주일쯤 선수 행을 하고
갔다고 했다.
넓어
보이던 세계는 이제 우리 나라 불교인들에게도
많이 좁아졌다. 불교와 관계되는 곳은
세계의 어느 곳이든 간에 우리 나라 불교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게 된 것 같다.이제
시야를 세계로 넓혀, 우리 것만이 아니고
남들이 이룩해놓은 것. 남들이 살고 있는
것도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현상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불교는 너무나오랫동안
고치 속의 번데기 같이 조츤i마한 둥지
속에 움츠리고 있었다. 그 결과 이미 오래전에
창조력과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우리 나라 젊은 스님들과
불교인들의 가슴속에서 일고 있는 어떤
열정과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날
서라벌의 청년 승려들이 미투리 한 켤레만
뒤 꽁무니에 찬 채로 중국으로 천축으로
내달렸던 그런 열정이 다시금 우리 젊은
불교인들에게 불붙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불교가 어떤
변신을 하기 위해 조용한 몸부림을 하고
있는 징조를 느낄 수 있었다.
정각도량/ 삼귀의 이법산
스님 / 서울 정각원장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불교에서
부처님(佛)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法)와
이를 실천하는 스님(僧)들을 세 가지 보물(三寶)이라
하여 가장 귀중히 모신다. 불교예식의
가장 중요한 경배가 이 삼보에 대한 존경이다.
부처님은
가장 으뜸가는 스승이며 믿을 수 있는
분이다. 불교의 신앙대상은 이 세상의
큰 스승이시며,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이신 부처님이시다.
부처님께서
우주자연의 진리를 깨닫고 보니 고통받는
중생들이 본래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라
맑고 밝은 부처임을 알게 되었다 중생이
자기가 전지전능한 부처인 줄 모르고 괴로워하는
삶의 현실을 보니 부처님의 마음은 더욱
안타깝고 애처로울 수 밖에없었다.
그래서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을 깨우쳐주고 중생이
자기가 본래 부처인 줄을 스스로 깨달아
번뇌의 뜨거운 불을 켜고(湍呈槃),고통의
묶임에서 벗어나는(解脫) 길을,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중생을 만나더라도 간절히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바른 진리의 말씀이다. 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열반의 언덕으로 가는
길이요, 대 자유를 얻는 아름다운 해탈의
세계를 실현하는 방법이다.
이
진리를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전수받아
실천하며 부처님의 세계로 모든 중생들을
안내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이스님들이다.
부처님이
없는 진리가 있을 수 없고, 진리는 부처님으로부터
말씀되었으며, 진리가 없이 부처님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부처님의 진리를
전수받아 실천하며 계승하는 스님들이
없이 불교가 전승될 수 없는 까닭에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네는 불교의 세 가지 귀하고
소중한 보배로 존중받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귀중한 보배가 있더라도 활용하여
쓰지 않으면 어떠한 가치도 없듯이 이를
믿고 배우고 따르는 신도가 삼보 못지
않게 소중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스님과 신도는 물론 이
세상 모든 생명 있는 본래 부처들의마음이다.
한 마음 일으켜 믿고, 배우고, 실천하면
부처님도 진리도 스님네도 존재하겠지만,
한 생각 무시해버리면 모두가 상관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불교의 목적은 부처님의 소망으로 일체
중생이 망상을 버리고 악업을 짓지 말고
빨리 깨달아 부처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귀의하는 부처님은 내 마음에 본래
갖춘 부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요, 배우는
진리는 본래 내가 알고 있던지혜방편이요,
존경하는 스님들은 망념을 일으키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깨달음의 길로 부지런히
돌아가는 실천수행이다.<육조단경>
참회품을 보면, 잘 설명되어있다.
첫째,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부처(矛弗)는
깨달음의 뜻이니, 깨달아 지혜와 복덕의
두 가지 구족 하신 임께 귀의한다는 것이다.''스스로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어리석음이
일어나지 않고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며, 능히 재물과 색을 여의는 것을 두
가지 만족(二足尊)이라 이름한다.
마음에
욕심이 적으면 아무리 바쁘고 어려운 일
속에서도 화낼 것이 없고 다툴 일이 없으므로
어리석지 않으며, 마음에 삿된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밝고 지혜로워 모든 고난에서 멀리
떠난 부처의 경지를 증 득하게 된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는불법(佛法)은
욕심을 여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욕심
때문에 성내고, 성냄으로 어리석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성내고, 성냄으로어리석으며,
어리석음으로 자신의 능력과 본성을 알지
못하고 옳지 못한 행동으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싸우고 파괴하여 괴로움의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가게 된다. 그러므로 가르침의
진리는 바른(正) 것을 의미한다,''스스로의
마음이 올곧음(正)에 귀의하여 생각 생각에
삿된 견해가 일어나지 않고, 삿된 견해가
없으면 '나'다 '남'이다 하는 고집과 아
만과 탐욕과 애착이 없어지므로 이를 이름하여
욕심을 떠난 것(離欲尊)이라 이름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팔만대장경의 모든 내용은 마음에
세 가지 독(三毒)을 완전히 없애라고 하신
것이다.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으면
아 만과 애착이 끊어진 무아(無我)의 경지인
부처의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스님들은
부처님의 계율을 지킴으로써 청정해질
수 있고, 마음이 맑고 깨끗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분별하여 알아 세상의 망상에
물들어 더럽혀지지 않고 깨달음의 길로나
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님들의
의미는 깨끗하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깨끗함(淨)에 귀의하여 일체 망상
번뇌의 애욕 경계에 자기의 본성이 물들지
않음을 이름하여 대중승가(衆中尊)라 한다.''
스님이란
한 개인의 스님이 아니다. 스님은 많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수행자이다. 세상을
버리고 독선에 얽매어 자기 고집대로 사는
것은 절대 스님이라 할 수 없다. 중중존(中衆尊)이란
이런 의미에서 승가(僧伽)혹은 스님 전체를
지칭하며, 이렇게 맑고 깨끗하게 수행을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삼 귀의는 자기 마음의 부처를 찾는 것이다.
부처님과 진리의 스님네는 깨달음과 올바름과
깨끗함의 상징이므로 스스로 이를 인식할
수 있다면 마음으로 귀의하고 행동으로
실천수행하여 성불할 수 있을 것이다,
정각논단/ 유아기의
환경교육 황옥자 / 불교아동학과
교수
물,
공기, 흙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자연물이며
생명 그 자체라고하겠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가 지 .수.화.풍의 사대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하는 불교의 생명사상에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확연해진다. 따라서
맑은 물, 청정한 공기, 깨끗하고 향기로운
흙을 가능한 친연성 분 그대로 보전하는
것은 곧 우리의 건강한 삶을 기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우주 전체를 하나의 생명현상으로
파악하고 인간과 자연을 이질적인 존재가
아닌 동질의존재라고 보았다. 중생을 비롯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체는 바로지
.수.화.풍의 인연에 따른 화합과 분리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되어 간다.물질의 형태가
인연의 화합 즉 연기의 법칙에 의해 발생되고
또한 흩어지며 끝없이 변화를 거듭한다는
불교의 연기론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이
상호의존관계에 있으며 동질적 존재임에
틀림 없다.
인간이란
본래 자신의 삶을 슬기롭게 잘 헤아려
살아갈 줄 아는 분별력 있는 존재로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자연을 호흡하며 자연과 더불어
행동하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건전한 삶의
방식임을 안다. 맑고, 향기로워 포근하게
안길 수 있는푸른숲은그러한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찾고 그 안에서 피로한
몸과 마음을 생기 가득한 활기찬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싱그러운 자연을 즐길 줄은 알지만
내 몸과 같이 조심스럽게 가꾸고 보호하는
데는 매우인색하다. 그리하여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대우주의 법칙에 순응하기
보다는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인간
우위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데 더 익숙해
왔다. 그 결과 싱그럽고, 향기 가득한
자연환경은 더럽고. 오염되고. 악취가
풍기는 재앙의 환경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두고 생태계 질서가 파괴된
것이라고 일컫는가 하면, 불교에서는 우주
법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인간의 무명에
그 원인을둔다.
유아의
몸과 마음은 자연 환경을 무대로 성장해간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무한한
관심과 호기심을 보여주는 유아기는 산과
들과 바닷가를 마음껏 뛰어다니면서 즐겁게
노는 가운데 자연으로부터 많은 진리를
배운다. 우주의 질서와 법칙을 배우며
자연은 모든 생명체를 담고 있는 모체와
같아서 이 모체가 오염되고 파괴되면 그
안에 있는 일체의 생명체 또한 오염되고
병이 든다는 상황논리를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보고 배운다.이렇듯 자연은
유아가 한 인격체로 성장해 가는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며 삶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는 점에서 자연을 통한 교육적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유아가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하는 주요 인격적 요소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유아는 자연으로부터 아름다움(美)을 배운다.
인간의 창의적인 노력과 최선을 다해 만든
어떠한 인위적인 것도 자연적인 것, 천연적인
것 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인간이 만든
작품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 받는 것은
곧 자연을 모방한 것이며 자연에 가장
가까운 형상을 갖는 것들이다.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고 자연을 중심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 . 개발해 간다.
둘째,
유아는 자연으로부터 정직의미 덕을 배운다.
자연은 현재 있는 그대로를 꾸밈없이 솔직하게
드러내준다.더 잘 보이기 위해 덧칠하거나
가식적인 모습으로 변장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물은 무미(無味), 무취(無臭),
무색(無色)을 그 본질로 하며 이것은 영원한
물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물에
빨간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뭅은 빨갛게
변하고, 파란 물감을 떨어뜨리면 파란
물이 되며 오염 물질을 혼합하면 오염된
물로 화한다. 우리 나라 산천이 오염되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자연 경시 및 학대가 정직하게 반영된
과 보임에 틀림 없다.
셋째,
유아는 자연으로부터 질서와 규칙을 배운다.
자연에는 일정하고 엄연한 질서와 법칙이
있으며 만물은 이자연계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 순환하고 순응한다.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인한 밤과 낮, 사계절이 명확하다.
유아가 해가 뜨는 시각에 맞추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낮에 활동하며 해가 지는 시각에
맞게 하루 일을 마무리 하고 잠자리에
드는 일은 모두 자연의 질서에 따라 습득된
생활의 질서들이다. 그리고 질서는 삶을
안정되고 더불어 사는데 필요한 일종의
공동체적 약속임을 깨닫게 된다. 넷째,
유아는 자연으로부터 관용을 배운다. 자연은
일체를 수용하고 너그럽게 감싸안는 포용력이
있다. 인간이 자연을 향해 저지른 어떠한
무례함이나 파괴행위도 반박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주고 흡수한다. 예컨대 시냇물에
합류된 어떠한 물질도 곧 동화되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평온한 모습을 무언으로
드러내 준다. 유아가 자연물을 좋아하고
자연의 품안에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지배와 간섭이 없는
자연의 수용력과 관용 때문이다. 다섯째,
유아는 자연으로부터 지혜로움을 배운다.
지혜란 기억하고 가르침을 통해 학습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깨달아가는 삶의 자세이며
태도이다. 따라서 지혜에는 일정한 정답이
없으며 가능성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언제나
함축하고 있을 따름이다. 유아는 자연과
생활하면서 자연 속에 내재한 질서와 법칙을
통해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면서
자연 속에 내재한 질서와 법칙을 통해
자극받고 지혜로운 삶을 지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유아는 자연과의
교류를 통해 인격을 형성해가며 삶의 바른
태도와 가치를 터득해 나간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어야 하는 바른 생각이나
의식 둘을 깊이 심어주는 것은 바로 어른의
몫이며 성인의 모범적인 행동이다.
사찰에서
매일 새벽 목어, 운판, 법고와 같은 법규를
쳐 물, 대기, 토양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일체 생명제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안심시켜
주는 의식은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평등하게 관조하는 불교의
차원 높은 생명사상이며 환경교육의 모델임을
깊이 되새겨 봄직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아의 순수하고 청정한 마음이 오염되지
않도록 인도하는 일이 유아 환경교육의
기본이며 제 1과제임을 유념해야 한다.
신행상담/ 평등심
장계환 스님 / 불교대학 교수
우리
인간은 전통이라는 굴레와 과거라는 타성에
빠져 안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과감하게도 전통적인 신분의
차별제도, 즉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초기경전의 하나인 <슛타니파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 다.
''그의
출생을 묻지 말라, 다만 그의 행위를 물어라''
라고 하실 정도로 적극적으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신다면
모든 중생들은 한결같이 평등한 불성(깨달아서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소유자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등사상을
자칫 잘못 받아들이면, 질문한 것처럼
무엇이나 차별 없이 똑같이 나누어주는
배급주의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주장하신 평등사상이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많은 대가가
돌아가고, 게으름을 피운 사람에게는 그만큼
적게 돌아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높은 산을 허물어서 낮은 강의
높이로 한다든지, 긴 학의 다리를 잘라서
짧은 오리의 다리에 붙여 주는 것이 결코
평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높은 것은
높은 대로, 낮은 것은 낮은 대로, 길고
짧은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존재가치 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즘
사회 일각에서는 남녀평등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하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남녀의
구별 없이 똑같이 되자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어찌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다 할 수 있으며,
여성 또한 남성이 하는 일을 어찌 다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남성의 고유한 일, 여성의
고유한 영역, 그것을 서로기 인정해 주고
그 일에 각 자가최선을 다할 때, 보다
자연스럽고 또한 참된 의미의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에는 대원경상절친소(大圓炙蠱上絶毫毗疎)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큰 거울에 비춰지는
물체에는 친소가 없듯이,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려는 마음을낸다면, 그것도 또한
평등 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평등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송두리째 무시하고
단순히 외형적인 평등만을 주장한다면
그와 같은 행위는 올바른 평등 심이라고
볼 수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모든 사물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인정되고, 감정적으로도
치우치지 않았을 때, 그 마음이 바로 평등
심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리강좌/ 고행의
포기 정승석 / 불교대학 교수
종교나
철학에서 제시하는 이상향과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그 방법을
몸소 실행하여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모두수행(修行)이라는 말로
통칭한다 이러한 수행은 특히 종교적인
실천 노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리고
수행이 지닌 종교적 어감을 피하여 사람들은
보통 '도를 닦는다'라는 말로 수행이라는
관념을 대신한다. 수행이든 도를 닦는
것이든, 이 관념에는 불편을 감수하는
범상치 않은 각오로 특별하게 노력한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간결하게 말해서
수행이라는 말은 '불편' '고생' '어려움'
등의 관념을 먼저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말에 대해 고행(苦行)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상이다. 종교 중에서도
불교는 다른 종교보다도 더 고행의 어감이
어려 있는 수행을 중시하는 종교로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불교를개창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고행을 버리고 수정(修定)을
채택하여 위대한 깨달
음을
성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행과 수정은
전혀 다른 수행 방법인 셈인데, 수행과
고행을 유사한 취지의 방법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고행의포기' 와 '수정의
채택' 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교리적인
설명을 끌어들일 것도 없이, 초기 경전의
관련 대목을 음미함으로써 그 사실의 내막을
대략 이해할 수 있다. 팔리 어로 전하는
장부(長部)경전에는 부처님이 고행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은 이유가 천명 되어
있다. 한 이교도가 부처님에게 찾아와,
부처님이 고행을 싫어하고 고행자를 비방한다는
소문의 진위를 물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그것은 내 뜻이
아니오 또 내 말을
바르게
전한 것도 아니오. 나는 천안(天眼)으로써
고행 자가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보고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봅니다 이와
같이 고행자중에는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천상에 태어나는 일도 있는데, 어떻게
통틀어 고행을 싫어하고 비방할 수 있겠소''
''아무리 그와 환은 고행을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계율의 실천과 마음의 평정과
지혜가 없으면, 그것은 수행자나 바라문과는
멉니다. 화내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이
없
으며.
자비심을 기르고 번뇌가 없어 현재에 깨달아
있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요
바라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에 의하면
당시의 많은 수행자들은 고행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정신적인
자세에서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실행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석가모니 자신도 수행 시절에 가장 어려운
고행만을 골라 실행한 적이 있으므로,
그의 평가는 신뢰할 만하다. 고행이란
육체를 괴롭히는 수행이다. 그 실태의
일면은 위의 대화 사이에서 이교도의 입을
통해 언급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알몸으로
지내고, 단식하고, 쇠똥을 먹고 나무 껍질이나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가리며, 학 상 서
있는 것'' 등이다.
석가모니
자신이 극심한 고행을 실행했다는 사실을
불전에서는 다음과 같이전한다.
''먹고
자는 것도 잊어 버릴 정도였다.몇 톨의
낟알과 한 모금의 물로 하루를 보내는
때도 있었다. 그의 눈은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고 뺨은 가죽만 남았다.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로 변해 갔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부처님은 위와 같은 고행이 전혀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보다
근본적인 목표, 즉 육신의 번뇌와 망상과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자유와 평화의 경지에
이르는 데는 고행이 불충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에, 고행을
최상의 수행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것이다.
''이따금 모든 고뇌와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삼매경에 들어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삼매는 곧 흩어지고
현실의 고뇌가 파고들었다.''라는 고행의
체험은 당연히 고행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드디어 고행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다음과 같은 이유는 참으로 간단 명료하고
타당하다.
''육체를
괴롭히는 일은 오히려 육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를
괴롭히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맑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고요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고행의 폐단은 ''수행의
방법에만 얽매인 나머지 점점 형식에 빠져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가지는 일에는
소홀했던 것이다.'' 라는 체험에 집약적으로
시사되어 있다. 결국 수행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는 '마음의 고요'이지만고행은
육체를 괴롭히는 형식적인 면에 치중함으로써
'마음의 고요' 틀 우선적으로 도모하지
못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최종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수행에서는 형식적인 면을 걷어 치우고
곧바로 핵심으로 가로 질러가는 것이 더욱
현명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방향을 바꾸어
직접 '마음의 고요'를 성취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고, 그 결과 목적을 달성했다.
바로 이 노력, 즉 곧바로 '마음의 고요'(定)를
성취해 가는 노력을 '수정(修整)'이라고
한다. 따라서 고행의 포기란 육체적 노력을
정신적 노력으로 대체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경전의
세계/ 유교경 이만
/ 불교문화대학 교수
이
유교경(遺狼經)은 부처님께서 입멸에 즈음하여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유계(遺戒)를내용으로
한 경전으로써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설법하는 정경을 그리고 있다 이를테면
부처님께서는 녹야원에서 최초의 설법으로
다섯비구를 교화했고, 최후의 설법으로는
수발타라(頁跋陀羅)를 구제하여 중생제도의
모든 사명을 마치면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곧 열반에 들것임을 미리 알린 것이다.
그때에 부처님은 여러 제자들에게 입멸
후에는 바라제목차(戒經)를 스승으로 삼고
계를 지키며, 신심을 잘 다스려 다섯 가지의
욕망을 살가하고, 정적을 얻도록 노력하며,
선정을 닦아 깨달음의 지혜를 얻을 것을
부축하신 것이다.
이
경전이 중국에서 한역 된 것은 만세기
초에 구마라집에 의해서 이며, 단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영으로는 불수반열반약설교계경(矛卵垂般涅槃略設敎戒經)이라고
하거나 불임반열반약설교계경(佛臨般涅槃若設敎戒經)
또는 불임반열반경(f羚臨般涅槃經)이라고
하며, 줄여서불유교경(佛遺敎經)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스트본이나 티벳트본 등은
없고 오직 이 한 역본만이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데, 역시 부처님의 만년(晩年)의 사적을
내용으-로 한 아함부의열반경 혹은 마명(馬鳴)의
불소행찬(佛所行讚)등과 문체상의 유사점이
많아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불소행찬의 제26품인 대반열반품(大嶺涅槃品)과는
운문과 산문의 다름이 있지만 내용상에
있어서는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이
경전은 또한 일찍이 선가에서 그 교훈적인
내용 때문에 사십이장경 및 위산경책(僞山磐策)
등과 함께 불조삼경(뷩羚祖三經)중의 하나로
애독되어 전해지는데, 이에 관한 주석서로는
불수반열반약설교계경보주 1권을 위시하여
당 태조의 어주(御읔主) 1권,지원(智園)의
소(殮) 2권, 과(科) 1권, 정원(淨源)의
논소절요(言侖疏節要) 1권, 광선초(廣宣鈐)
1권 및 절요과(節要科) 1권 등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이
한역경전은 어휘의 구사나 문체에 있어서
매우 유려하며, 또한 부처님의 임종이라는
극적인 무대를 배경으로 하여 불교의 근본문제인
계율의 지킴과 욕망의 단절, 음식의 섭취,수면문제,
성내는 것, 교만하지 말 것 등 열 대여섯
가지의 항목에 걸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열거하여 교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때문에 윤리성을 강조하는 불교계에서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이 경전을
정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그 교설 내용의 대강을 간추려 보면, 첫째
계율문제에 있어서는 계졍(戒經)을스승으로
삼도록 부축하신 말씀과 같이 자신의 수행이나
승단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를 가치로
보면 마치 길을 잃은 사람이 어두운데서
불빛을 만난 듯하고 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은 듯할 정도로 값진 것으로서 스승이
없을 때는 계율이 스승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을 지킬 때는 단순히 지악(止惡)의
입장에서 이를 단속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림이 없는마음에서 우러난 지킴
즉 지선(至善), 작선(作善) 봉선(奉善)의
입장에서 이를 실천하면 계율이 곧 생활이어서
갈등이나 어떠한 고초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나 돌아가시고 안
계실 때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하시면서
간곡히 서두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욕망의 조절문제를 설하시고
계시는데 이미 계율을 받은 사람을 마땅히
오근(五根)을 잘 다스려서 분별심을 내지
않게해야 한다고 설하시고, 마음을 방종하여
다섯 가지 욕심에 물들게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단속하기
위해서는 마치 소를 먹이는 사람이 회초리를
들고 소에게 보여 남의 곡식 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하나니, 만약에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하는 대로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올라서 자신은
물론 승가 전체를 병들게한다는 것이다
음식의
문제에 있어서도 단순히 이를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먹는 정도로만 생각해야지,여기에
분별심을 내어서 음식 자체를 좋은 것이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맛이 없는 좋지 않는
것 등으로 헤아린다면 이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먹는 것이 되기 때문에
수행 인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먹는 문제에 관하여
부처님 당시나 그의 입멸 직후에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에서 격론의 대상이 된
것은, 그만큼 그때 당시에 식량문제가
어려웠다는 사실성도 시사해 주지만 나태하고
분별심을 잘 내는 수행자에게는 이로 말미암아서
여러 가지의 장애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음식 그 자체를 약과 같이
자기 몸에 좋은 것으로생각하고, 자기를
지탱해 주는 유일한 외부의 물질로 인식해서
거친 것인지 좋은 것인지 분간하지 말고
이왕이면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를
섭취하라는 것이다.
잠을
자는 것도 하나의 습성이므로 지나치게
적게 자는 것도 몸을 유지하기에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너무나 많이 자는 것도 나태함을
기르기 때문에 정진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수면은 유지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도하는 사람들은 하루 중에서 어느 때
보다도 초저녁과 새벽녘에 자기 전공분야의
졈전 등을 열심히 읽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진취적이라는 것과 함께 무상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잠을 잘 조절해서 이를
아껴 해탈의 길로 빨리 가라고 당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어서 백 가지의 장애물인
성내는 문제와 교만하지않고 겸손히는
문제, 아첨하지 않고 마음 곧게 먹는 문제
등 십여 가지가 더 교설 되고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결론적으로
이 유교경은 부처님께서 자신의 입멸을
제자들이 슬퍼하지 말고 계율 등을 잘
지켜서 지혜를 얻어 무명의 어둠을 떨쳐버리고
해탈하라는 최후의 스승다운 부축의 말씀들이
절절히 엮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수행자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이 이 경전을
한번쯤 읽는다면 아마도 그전 보다는 새로운
안목의 지혜가 홀연히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다.
동국과
불교/ 4월혁명에 선두에 선
동국 이봉춘 / 불교문화대학
교수
학대의
시설확장과 학과의 증설 등으로 동국이
힘찬 전진을 계속하고 있던1960년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중대한 변혁의 계기를
맞는 한 해였다. 우리 역사의 방향을 크게
전환시킨 4.19학생의거가 바로 이 해에
일어났던 것이다.이승만. 이기붕을 중심
인물로 한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가지가지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빈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국민이 국가의 암담한 앞날을
비관하면서 정계의 추이를 잠자코 지켜보던,
서글픈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정과
불의를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려는
의지는 이미 알게 모르게 집결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기류는 남산 기슭에서
새로운 문화창조의 꿈을 품고 전진하던
우리 대학에도 점차 비만해져 갔다.
국가의
장래를 우려하던 국민, 특히 학생층의
감정은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
.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정권이 자행한
부정선거로 인해 드디어 폭발하고야 말았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첫 봉화는 3월 15일
마산에서 점화되었다. 다시 그것은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연의 참혹한
모습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됨으로써
군 중들에 의해 제2차 마산 긴급사태로
재점화되었다.
흥분을
가라 앉히고 조용히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전국의 학도는 이 2차에 걸친 마산사태에
큰 충격을받았다. 대학가의 공기는 제1차의
마산사태에 자극되어 새학기 개학일이던
4월 8일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4월 18일에 있었던 고려대학교
학생데모와 그 졸렬한 지지책으로 인해
극도의 긴장된 분위기로 치닫고 있었다.시내
각 대학의 행동통일이 대학생대표인 운영위원장들
간에 논의되고 있던 4월 18일, 한 걸음
앞당겨 행동에 나선 고대생 데모의 보도가
전달되었다.이에 우리 대학 학생운영위의
간부들은 이날 오후 3시 긴급모임을 갖고
동대생들이 취할 행동에 관해 토론하였다.화요일인
다음날 4월 19일이었다. 긴장된 표정들로
등교한 약 2천의 동국 인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석 조관
전면 불상 앞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의 이 집합에서는 공명직인 행동요령이라들가
장차 일어날지도 모를 어떤 불행한 사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언급도 없었다.
다만 대학생다운 이성적 자세로 질서정연하게
시위함으로써 우리의 참뜻을 충분하게
표현하자는 다짐들이 있었고, 그것은 이내
행동으로 옮겨졌다.우리대학의 데모대가
교문을 출발한 것은 상오 1시였다. 을지로를
구보로 달렸는데, 대열 중에는 여학생들도
끼어
있어서
당시 시청 건너편에 있던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든 타교 데모대와 합류한 것은 11시
반경이었다.
각
학교의 데모대들은 시위의 방법을 놓고
한참동안 옥신각신하였으나, 본교생들은
경무대로 직행하기로 하였다. 당시의 진상을
동아일보 월 간부 기자가 쓴 「4월혁명
후기」 예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경무대로
가자...
동국대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서울대,성균관대, 동성고
등 1만여명이 뒤따른 데모대의 주류는
경무대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제2선에
머물러 있던 서울대데모대는 달려 온 윤일선
총장에게 '사대생들이 앞에 나가 있으니
구하러 가자고 하여 학생들과 스크럼을
짜고 20미터쯤 나아갔는데, 이 일로 윤총장은4.19직후
일부 어용교수의 지탄을 받았다고 하며...
<신동아 1965. 4월>''이 비극의
날에 우리 동대생들이 선두를 달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어나서는 안될
사태가 이미 발생하고만 이상에는 하루라도
빨리 그것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의기로운 활동인 4.19의 학생혁명에서,
발포의 초연을 뚫고 경무대 데모의 선두에
섰던 것이 우리 대학의 학생들이었다.
현재도
4.19 당시의 화보에 이 데모의 극렬한
장면으로 반드시 게재되는, 경무대 앞에서
수도파이프를 굴리며 경찰의 발포에 대항하며
쓰러져가는 학생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동국 인들이었던 것은
태모 광경사진에 학교 플래카드를 지우지
않은 외국 잡지들을 보면 선명히 나타나
있다.
이
학생혁명에서, 데모대의 선두를 달리던
우리 동국인은 희생을 치러야만했다. 법학과
3학년 재학생 노회두군(당시 21세)이 산화하였고,
거의 재기가 불가능하게 된 중상을 포함하여
많은 부상자를 내고만 것이다. 실로 가슴
아프고 애석한 일이었다.
4월
19일의 동국인 부상자는 다음과같다.
이도인(법2)
진대가(경2) 김동섭(정3)강상학(경2) 이기원(영3)
정두훈(정3)정원영(법4) 김반우(농i) 김철정(연i)박종해(농4)
정형태(법1) 문경호(경4)김달호(영4) 남
일(정3) 심달호(농3)문정호(농3) 박창여(경3)
이정인(법2)박홍규(농2) 권태호(국4) 이태조(농2)전대길(농3)
이경구(경3) 이종학(농2)이봉구(국3) 라명희(정2)
김만영(상2)박종구(경2)
이밖에
박영환.신현식 .김용철.김용덕 등 다수의
학우들이 역시 크고 작은 부상으로 입원하였다.
한편 4.19 직후인 23일에 대한교육자연합회에서
주관한 4.19대책수습위원회의 식상에서
본교 백성욱총장은 「이번 데모는 시민들이
했어야 할 것을 학생들이 대신하였으니...」
라는 의미깊은 말로, 기성 인들의 자책과
학생들에 대한 애석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간 학생의거로 4월 26일에는 이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4월 25일에 있었던 교수단 데모 이후
사회 공안질서는 걷잡을 수 없는 마비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4.19혁명의 대열에서
목숨을 내던져 파사 현장의 의기를 보여
온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이에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26일부
터는
다시 질서의 회복에 나섰다. 흥분된 신경을
달래며 동국 인들이 다시 캠퍼스의 일상으로
돌아온 것은 4월 29일이 었다. 그러나
4. 19혁명 이후 사회혼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극도로 제약받던 자유가 거의
무제한으로 풀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에
본교 학생자치활동 기관이었던 학도호국단에서는
격동하던교내외의 제반 정세를 감안, 5월
5일 연합학회장회의를 소집하여 다음 사항을
결의하고 그 결의문을 공표하였다.
결의문
동국건아는
냉정, 침착, 자중하여 학
업에
진일보 매진하여 민주혁명의 기반
을
견고히 하는데 한 몫을 다하고자 다
음과
같이 선언한다
記
1.
학원의 자유를 사수한다
1.
편당 견파적인 학생과 교수의 행동을 배격하고
오로지 진리탐구에 매진한다
1.사제지간의
미풍을 선양한다
1.
改'虜함이 없는 政들에게 태도를 주시한다
1.공산伍의
침투방지에 적극 협력한다.
단기
4293년 5월 6일
연합학회장회의
결의문은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이
몇 개조의 짧은 글에서 우리는 격동하고
있던 당시의 교내의 정세를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비유와
설화/ 승방을 세운 공덕 조용길
/ 불교대학 교수
「장자
부부가 부도를 만들고 천상에 가 나다」
사위국의
어떤 장자는 부도와 승방을 만들었다.
그
장자는 병으로 목숨을 마치고 삼십삼천에
가 났다. 아내는 남편을 생각하고 늘 괴로워하면서
남편이 세상에 있을 때처럼 그 부도와
승방을 수리했다.
남편은
하늘에 있으면서 자신을 관찰하며 말했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이 천상에 와 났을까?''
하는 고민 끝에 인간 세상에서 탑과 절을
지었기 때문에 천상에 나게 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자기 몸이 확실히 하늘
몸인 것을 보고 기쁜 마음이 생겨 항상
탑과 절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만든 탑과
절을 지금은 누가 수리하고 있을까?' 하고,
천안(天眼)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아내가 밤낮으로 남편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면서 그 남편을 위하여 탑과 절을
수리하는 것을 보았다.
'내
아내는 나에게 큰 공덕이 있다. 나는 지금
가서 문안하고 위로하리라'고 생각하고,
곧 천상에서 내려와 아내 곁으로 가서
말했다.
''당신은
너무 근심하면서 나를 생각하는구료.''
아내는 말했다. ''당신은 누구시기에 그런
말을 하십니까?'' ''나는 당신의 남편이오.
나는 승방과 탑을 세운 인연으로 삼십삼천에
나게 되었소. 당신이 부지런히 청소하고
수리하는 것을 보고 여기에 온 것이오.''
''어서 가까이 좀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남편은 말했다. ''사람의 몸은 더럽고
냄새가 나서 가까이 할 수는 없소. 만일
내 아내가 되고 싶거든 오직 부지런히
부처님과 교법과 스님들에게 공양만 하십시요.
그리하면 목숨을 마친 뒤에는 내 곁의
천궁에 와 날 것이니, 당신을 아내로 삼겠습니다.''
아내는
남편 말대로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하고
온갖 공덕을 지으면서 천상에 나기를 발원했다.그리하여
목숨을 마친 뒤에는 곧 천궁에 태어날다.
그들
부부는 함께 부처님께 나아갔다. 부처님은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시어 그들은 수다원의
과 위를 얻었다.
비구는
놀라고 이상히 여겨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들은
무슨 압연으로 천상에 나게 되었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들은
옛날 인간 세상에 있을 때에 부도와 승방을
만들어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했다.
그 공덕으로 지금 천상에 나게 된 것이다.''
<雜寶藏經>
전등이야기/ 석두선사와
단하천연선사 정성본 스님 /
불교문화대학 교수
단하천연(丹霞入然)선사가
석두회천(石夏頁艦遷)선사의 법을 이은
馬薏代의 검출한 선승임과 동시에 대자이기도
하다 『조당집』 제4권에는 단하선사가
석두화상의 법을 잇게 된 인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乎霞선사는 어릴 때
유교와 墨子를 전공하고 九經에 통달한
천재였다. 처음 齟居와 함께 과거 시험에
응하려고 長安-에 가는 길에그奬南道 거리
주막에서 하루 밤을 묵게 되었다. 그 날
밤 꿈에 흰 明이 방안에 기찬 것을 보고,
解夢家에게 물으니, ''이는 空의 이치를
깨닫게 될 징조''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또 행각 하는 스님을 만나, 같이 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그 스님이 물었다, '秀才는
어디 가시오?' '거를 보러 갑니다.' 공부가
아깝구나! 어째서 부처를 뽑는 곳(選佛場)에
가지 않는가? '부처를 어디서 뽑는요?'
그러자 그 스님은 첫 잔을 들고'알겠지?'
하고 물었다. '높은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江西에 馬께서 지금 설법하고
계시는데 道를 깨친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소 그 곳이 참으로 부처를 이루는
곳이요'두 사람은 전생부터 착한 인연을
심은 것이 있었다. 즉시 과거보러 가는
길에서 마죠 화상이 있는 절로 가인사를
홀리니, 마주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왔는가?' 秀才(丹霞)가 두건을 치켜
올리니 마죠 화상은 단하기물을 살펴보고
웃으면서 '그대의 스승은 석두로 할까?'
하였다.
秀才가
'그러시면 석두화상이 계신 곳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요'
'여기서
南嶽으로 7백리를 가면 素遷장로가 돌
끝에 앉아 계신다. 그대는 그리로 가서
출가하라.'
秀才가
그날로 길을 떠나 석두화상을 찾아 뷩고
인사하니, 공양간(부엌)으로 보내, 나무하고
밥 짓기를 2년시켰다. 2년이 지난 어느날
석두화상은 내일 아침에는 저 秀才의 머리를
깎아 주리라. 생각하고 전날 저녁에 이들이
문안을 왔을 때, '佛殿 앞의 한 무더기
우거진 풀을 내일 아침 죽 공양을 마치고
깎아버려라!' 라고 지했다, 이튿날 아침에
아이들은 모두 낫과 괭이를 들고 나왔는데,
秀才만은 머리 깎는 탄과 물을 들고 석두화ㅅ앞에
꿇어 앉아 머리에 물을 적시고 있었다.
화상은 웃으시며 머리를 깎아 주었다.
그런데 秀才의 머리 정수리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화상이 이를 만지면서 '天然스럽다!'
라고 말했다. 머리를 다 깎고 나니 절을
하면서'法名을 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기에 화상은 재가 언제 그대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는가?' 물었다 '화상서 천연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했다
석두화상이
몹시 기특하여 설법을 해 주려고 하자,
단하선사는 귀를 막고, 외쳤다. '너무
말씀이 많습니다.'러면 그대는 도를 활용해
봐라'' 하자 단 하는 선원의 文殊菩薩f象(聖僧)의
목에 올라 탔다 이에 석두화상이 '저놈이
뒷날 佛像과 탁자를 모두 부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석두화상의 印可를 받고 다시 마죠 화상을
참 문하고 등주(鄧) 丹霞山에서 교화를
펼쳤다. 그 뒤 어주운 겨울날 惠林寺를
지나다가 하툿 밤을 지내게 되었다 방이
너무 추위 선사는 갸<季津를
쪼개어 불피워 추위를 막았다. 이튿날
주지스님이 이 사실을 알고 단하선사를
크게 꾸짖으니, 선사는 '火葬(茶毘)하여
利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었소' 라고 천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주지스님이 '나무토막에서
무슨 舍利가 나단 말이오!' 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꾸짖으시오!' 라고 대꾸했다.
이로 인해 주지스님은 앞 눈썹이 모두
빠졌다고 한단하선사는 부처를 태운 것이
아니라 나무토막을 태운 것이다 이로 인해
주지스님의 눈썹이 빠졌다고 하고 태는
것은 불법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잘못 說法한
자는 눈썹이 빠지는 法의 벌칙을 받았기
때문이다 단하천연선사는 科擧太욺으로
가는 길에서 選佛場으로 진로를 바꾼 秀才로,
風狂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전출한 선승이었다.
불자탐방/ 김설자
교수님 편집부
''먼저
동국대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어 기쁜 것이
소감이고, 학교의 분위기로 말하자면 여느
곳과는 다르게 평화롭고 대도시의 삭막함보다는
인정이 있어 참 편안하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알맞게 잘린 단발을 깔 금하게 빗어 넘긴,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체구에 부산하지만
몸에 배인 친절함으로 부임소감을 말하는
의과대학 간호학과 김설자 교수님.
교수님의
표현대로라면 스스로기 작정하고 원했던
대학이고 부처님 말씀 또한 곳곳에 스민
곳이라 마음이 앞섰지만, 막상 학과장이라는
자리에서 일을 맡아 하다보니보직이 주는
부담감과 분주함, 식사시간을 챙기지 못
할 만큼 바쁘기 한 일들을 치르어내다
보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민스럽고 벅찬
일들이 턱없이 많이 미루워져 있어 잠시
숨돌릴 엄두조차 삼가 할 수 밖에 없는
분주함이 여간 당황이 되지 않다. ''다른
분들은 간호학과가 너무 일찍 생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준비가 안되었다는
행정직으로나 교과 프로그램의 완벽하지
못한 부족한 점들을 우려하시는 말이겠지만,
솔직히 지금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언제 가도 준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간호학을 하는 저로서는 동국대학교에ㅅ)의
간호학과 신설은 상당히 늦은 출발로 봅니다.
왜냐하면 상식선에서 생각해 봐도 병원이
생기려면 그보다 먼저 간호사를 양성,
준비하여 투입하는 순발력이 필요한데
그런 면으로 보면 동국대학교에서의 간호학과
신설은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사실 의료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이
간호학이 그 뒤에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의
과제는 신설학과인간호학과를 어떻게 하면
경쟁력을 지닌 질 높은 하과로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나머지 다른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이 문제인데, 혼자의 힘으로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것 또한 솔직한
심정입니다. 애로사항이라면 이러한 것들이지만,
앞으로는 현재의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
발전의 가속도가 붙기를 바랍니다.''간호란
환자를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것, 이것이
교수님께서 생각하는 간호의 정의이자
믿음이다. 그 즈+은믿음에 묻어 온 부처님과의
인연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 따라 다니던
기억으로 새롭기만 하지만, 스스로 발심할
수 있는 인연이 된 것은 허리가 아파서
고생하고 있을 때,어느 스님의 관세음보살을
염불 하라는 충고를 듣고 지극정성으로
염불 한 결과 허리의 아픔을 덜어낼 수
있었고, 이후로 부처님 의가 피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사무치게
정성스러우면 기꺼이 느낄 수 있음을 가까이
깊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마음이 깨끗해
지면 부처님의 지혜안이 열리고 그 지혜의
눈으로 살게 되었다고 하신다. 스스로는
인간에게나 사물에게니 부딪치지 않고
지혜롭고 평화롭게 극복하자는 것 또한
교수님의 생활철학이자 인생철학이기도
한 것이다. 교수님께서 발전시키고 싶은
간호학은 어떤 것입니까?
간호학
자체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불교가
더욱 긴밀하게 연계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동양적으로 간호학을 해석하는
이유는 사람 자체가 기(氣)로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빈다. 가령, 만약에 사람이
죽고 나면 기 자제가 흐트러져 버립니다.
인간은 혼령이나 영혼이 있을 수도 신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이 혼령 자체는 기가
왔던 곳으로 다시 우더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이 바로 여기에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기라는 것은 우주만 물에 싸이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기는 거기에서 생성해서
그 곳으로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우너적으로 오염되지 않고 본성
자체를 읽을 줄 아는 확장된 의식을 동양사상으로
승화시켜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싶습니다.
불교인의 편에서 보면 간호란 병자에 초점을
두면서도 죽는 일, 늙는 일의 모든인간고(人間苦)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 생명의 근원적인 고뇌에서 접촉하고
그 고민을 덜어 줄 출발점과 목표는 그
방도를 같이 하고 있는 듯하다. 생 .노
. 병 .사(生老病死), 어쩌면 불교의 출발점은
인간존재에 뿌리를 둔 본원적인 고뇌의
해결에 있을 것이고, 석 존의 큰 깨달음
또한 생사의 고뇌를 해탈하는 방편의 확립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 앞으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어떤 것이있습니까?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학생들의 임상실습지도를
보다 능률적이고 적극적으로 지도할수
있는 교수진들의 투입이 절실하구요, 행정수반이
보다 신속. 정확하게 처리되었으면 좋겠고,
간호학과에서 함께 사으이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저의 혼자 생각만으로는 힘이
들어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고 서로 토의해서
간호하김 앞으로 나한 수 있는 질 높은
아이디어를 같이 개발. 발전할 수 있도록
토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학교와
병원측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이루어
진다면 정말 좋은 제3의 의학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교수님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서양간호학에다가
한의학을 접목시켜 동양간호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시켜 학 문화 및 실행화시키고
싶습니다. 의학은 근대 과학을 기반으로
한 소위 서양의학도 있고 동양의 자연
철학에 입각한 한방의학과 혹은 중국의학도
중요하지만, 구제적으로간호학을 서양간호와
동양간호를 접목시켜 우리의 것을 발견해서
그야말로 질 높은 간호사들을 말이 양성해서
한방에서든 양방에서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원들을 인력수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의료진을 더욱 고급화하여
농대병원만이 치료할 수 있는 전문성이
있는 특수병원으로 환자들 스스로기 찾아들
수 있도록 하는데. 저의 자긍 힘이 보택이
된다면 최선을 다해 연구 노력 하겠습니다.
불심의
창/ 나를 친 종소리 황정일
/ 정각원 조교
내가
처음 불교를 접한 것은 '용문사'라는 작은
사찰을 찾아갔을 때였다. 봄바람이 아직도
차갑게만 느껴지던 초봄, 나는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산길을 오르고있었다 무거운
발걸음이라 그다지 높지않은 야산이었지만
나의 걸음은 더디기만했다. 산길을 몇
구비 돌아가니 작은 암자 같은 절이 성큼
다가섰다. 절이라고는 수학여행이나 등산
다닐 때, 아무런 생각 없이 언뜻 지나다니곤
한 것이 전부인 내가,절에서 생활을 하기
위해 산을 오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절
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나는 잠시 절이
정면으로 보이는 산등성이에 앉아서 이렇게
절을 찾아야만 하는 자신을 보면서 오래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형의 사고, 학교 중퇴, 방황...
이렇게 회한에 빠져 있을때, 절간에서
들려오는 고적넉한 목탁 소리가 나의 상념을
깨웠다. 그리고 내가 이 길을 올라야만
했든 일들을 다시 떠올리며 사뭇 비장한
마음으로 절을 향했다.10여분을 더 걸어서
절 입구에 들어섰지만, 막상 거기에는
고시 생들을 위한 단칸방들이 있어 절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앞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가자 경내가 환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이내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경내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화단에서 새봄의 새싹을 찾으시는
것인지 화단을 유심히 쳐다보고 계시는
단아한 차림의 스님 한 분이었다. 스님은
무슨 인기척을 느꼈는지 지그시 내 쪽을
쳐다보셨다, 그리고 함박꽃 같은 미소를
지으시며 무슨 말인가 했지만, 난 스님의
말을 들을 겨를이 없었다. 거기에 서 계시는
스님은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 내게는
너무나 친숙한,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얼굴이라는 기쁨과 놀람이 교차했다.
순간스님의 이름도 맴돌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이지만,
스님도 나를 처음 본 순간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셨다. 아마도 그때였을것이다.
내가 절과의 인연이 맺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든 것은...
처음의
절 생활은 나에게 맞지는 않았다. 낯선
공간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도 있었지만,
당시 나는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터라
쉽게 그 공간에 적응하지는 못했다.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이런 종교적인 괴리감도
보다도 내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에 천착하여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나의 심리적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절간은 나의
인생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적 장소일
뿐, 어떠한 종교적인 숭고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연유로 내가 법당에 처음
들어서게 된 것은 절 도착 후, 한 달이
다 되어서였다.한 달이 지날쯤, 난 스스로
법당의 문을 열었다, 집에서 우연히 가져온
'노자도덕경'이라는 책 한 권이 내 스스로
법당문을 열게 하는 동기를 제공한 것이다.
공부시간 틈틈이 읽기 시작한 것이 어느
사이에 공부보다는 '도덕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나에게는'무위자연'
이라는 화두가 잡혀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시간을 참선과 불교 공부로
보냈다. 차츰 그러면서 나에게 인생에
대한 새로운 의미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정문제와 나 자신의 방황속에서 갈피를
잡지못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과 회의로
일관했든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으며,
속세에 남겨두고 온 여러 사건들에 대한
이해와 용서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몇 개월 동안 나를 억누르던 일들이
하나씩 벗겨질 때, 나는 비로소 불도에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 이생 겨났다. 절
생활이 익숙해질 즈음, 나에게 잊지못할,
아니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지금의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힘과 계기를 만든 일이
생겼다. 그것은 절 생활을 한지 3개월이
지났을 쯤이였다. 스님은 나에게 아침,
저녁 타종을 맡기 셨다. 스님 한 분과
공양주 보살 한 분이 꾸리는 절이라 일손이
많이 부족하였기에 나에게 그 일을 맡기
신 것이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도량송을 하는 공양주 보살을 따라서 아침과
저녁에 타종을 했다, 그때, 그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6월 어느 날 새벽,
절간의 침묵 사이로 간간이 가랑비가 날리고,
소쩍새는 침묵을 깨기 보다는 정적감을
더욱 불러일으킬때, 나는 새벽 한기를
느끼면서 종두에 섰다. 그리고는 여느
때와 같이 두 세 번의 예종을 친 다음,
한껏 종을 쳤다. 그때였다, 종소리가 내
마음에 들어온 것은. 종을 친 것인지,
내 마음을 친 것인지, 잠시 넋을 잃은
듯이 나는 멍하게 그 자리에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그날 이후, 나에게 불교는 막연한
무엇이 아닌, 어떠한 절실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의 인생 목표는 바뀌어져 갔다.
절 생활을 1년 가까이 하고 난 후, 나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시험을 쳤다.
물론, 집안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부처님의 빽 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지금 나는 학교 내에 있는 '정각원'이라는
법당 일을 맡아보는 직무를 맡게 되었다.
학교 생활을 한지 5년이 넘었지만,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든 일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내가 또 다시 법당을 돌보는 일을
하다니...정각원 오른편에는 제법 큰 종두가
있
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있는 사무실 입구에
있다. 가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는 종
누 한 모퉁이에 선다. 그때마다 나는 옛날
용문사의 종소리를 떠올리곤 한다. 정각원의
종은 특정한 날에만 치기에 지금은 묶여
있어 칠 수는 없지만, 그 앞에만 서면
옛날 나를 이 길로 이끈 종소리를 떠올리며
나를 쳐본다.
생활
속의 불교어/ 탁발.걸식 편집부
대부분이
가난하게들 살았던 예전에는 거지가 많았다.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잘
살게된 것이다.
거지는
빌어서 먹는 사람이다. 그러나 비록 남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빌어 살아갈 망정
거지는 남을 교묘하게 속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는다. 그래서 군림하는
사람들과 도둑들이 끓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거지야말로 귀한 존재라고 거지를
예찬하는 사람도 있다.
관료들의
부패와 정치의 타락 등 세상 돌아가는
모양에 사람들은 가슴 답답하고 너무 화가
난이 때문에 차라리 거지의 순수함이 그리운
것일 뿐, 빌어 먹는 일이 예찬 되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이 약하다. 그런데 같은
비는 행위임에도 그것이 전혀 다른 차원이
되는 경우가 있다. 불교 수행자의 托巷,
즉 乞食이 바로 그러하다.
탁발이란
범어 핀다파타(pindapata)를 번역한 말이다.
pinda는 가루나 쌀로 둥글게 만든 음식,주먹밥(團食)이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음식물을
가리킨다. pata는 떨어진다는 동사에 파생된
말로서, 주먹밥을 발우 안에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같은 의미의 걸식은 파인다파티(pinndapatika)라고
하는데, patika에는 '얻는다' 는 뜻이
있다.
따라서
걸식은 수행자들이 발우(둥근 모양의 그릇)를
들고 집집으로 다니며 음식 등을 보시
받는 행위를 가리킨다. 탁발로 표현될
경우에는 발우에 의탁해서 산다는 뜻으로
역시 걸식과 같은 의미다. 이는 붓다께서도
몸소 실천하셨고, 모든 출가 제자들이
그대로 따랐던 불교교단의 중요한 생활식이었다.
현재도 남 방불교권에서는 이런 전통이
그대로 지켜져 오고 있다.
이
탁발이 최근 종단차원에서 전국적 행사로
실시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탁발은
지난 62년이래 유랑 승의 폐해 및 현대
사회적 여건과의 부조화 등을 이유로 종단차원에서
공식금지 해왔다. 이후 35년만에 재개된
이번 행사가 의외로 신선한 감동을 안겨
준 것이다. 탁발로 모이진 성금은 국제의
불우한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고, 최근
잇따르고 있는 탈북동포와 사기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동포들을 돕는데 쓰일
것이라 한다.
탁발.
걸식은, 수행자들에게는 청정과 무소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수행에 전념하라는 가르침이
자 자기를 낮추는 하심(下心)을 기르는
수행방편이다. 또 그것은 사람들에게는
불교와 인연을 맺어주는 주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탁발이 더욱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최근 우리 사회가 보여준 부패와
탐과 허위의식 때문일 것이다.
탁발.
걸식의 정신은 수행으로 그것을 행하는
스님이나 보시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특히
요즘같은 세상에 깊이 음미해 볼 만한
것이다.
불교
건강법/ 속쓰림 김장현
/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인간은
잡식성 동물로서 지구 인류들은 인종에
따라 서로 상상도 못할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며 먹는 것을 즐기고 살아가고 있다
음식에 관하여서 가장 발달되어 있다는
중국의 경우 갖가지 요리에 사용되는 음식
재료의 가짓수는 가공할 만하다, 그런
만큼 우리의 위장은 엄청나게 혹사당하고
있다.속쓰림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을 대할
때 가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본다.
''우리가 먹는 요리중에 콜창전골이나
구이가 있는데 통상적으로 소화가 잘 되지요.
그런데 모든 음식이 그렇지만 곱창을 소화시키는
위장이 왜 자기 위장은 소화를 시키지
못할까요?'' 이런 질문을 받은 사람 중
대다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을 생각해
내느라 애를 쓰지만 ''그러고 보니 그거
참 신기하네요'' 한다.자기 위장을 자기가
소화시켜 버린다면 참 난감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실지로 자기위장을 소화시키는
법이 있으니 바로 위궤양이다.
건강한
위장의 내벽에는 위점막 장벽이라는 항
소화 장벽이 있어서 각종 음식물의 자극이나
자신이 분비해 낸 소화효소 등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작용을 한다, 이 장벽이 무너지면
자신의 위장을 자신이 분비한 소화효소로
녹여 버리게 되며 이럴 때 우리는 속쓰림의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이제 소화성
궤양의 증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화성
궤양의 가장 흔한 증상이 속쓰림, 심와부(명치아래
오목한 곳) 동통과 애매모호한 불편감
또는 아리고 타는 듯한 동통이다. 대개
식사 수시간 후 또는 공복 시에 나타나며
음식을 먹거나, 제산제 복용 또는 구토를
하면 수분 내 통증이 사라진다. 궤양으로
토혈이나 혈변의 증상이 보이는 경우는
궤양이 일어나는 부위에 헬관이 있어 협관이
손상되면서 출혈의 현상이 동반되는 경우이다,
통증이 심해지거나 등이나 어깨로 뻗치면
위나 십이지장위벽이 궤양으로 천공되는
졈우도 의심할 수 있다.
이
병의 발생은 유전적인 요인이 많이 작용하는데
0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발생빈도가
높다는 보고가 있고, 흡연 . 과음하는
경우, 아스피린, 부신피질호르몬이나 소염제
등의 약물을 복용하는 경우 또는 만성불안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악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 푸르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 되는 것이다. 마음을
곱게 쓰고 볼 일이다. 민간요법에는 오징어
뼈를 갈아서 마시는 방법과 민들레 뿌리를
달여서 마시는 방법을 쓴다. 그러나 대개
장기간의 치료를 요하며 음식조절과 규칙적이고
올바른 처방의 투약이 필요하니 섣부른
자가치료는 위험하거나 병을 오래가게
할 수 있다.
위장의
토혈은 폐에서의 토혈과는 달리 기포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므로 쉽게
구분할 수있지만, 출혈이 심하거나 장시간
지속되면 역시 출혈과다로 인해 생명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빠른 시간
내에 병원을 찾는 것이 안전하다
열린마당/ 정각원
근로 이선영 / 가정교육학과
2년
9月
1日...
내가
정각원 근로학생으로 선발되어 첫 출근하는
날이다. 새로운 날들에 대한기대감과 설렘으로
발걸음은 마냥 가볍기만 했다. 정각원에
도착해서 맨 처음 원장님을 만나 뵈었다.
불교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과 도움될 만한
좋은 말씀들을 해 주셨다. 다음에는 사무실에서교법사님과
언니들을 만났다. 모두 들 자상하고 너무도
친절히 대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수위
아저씨들, 아줌마 모두 좋은 분이셨고,
그 분들은 부처님과 함께 하고 모신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있고 즐거워하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정각원이라는 생소한 곳은
첫인상도 좋았고 작게나마 가지고 있던
불심도 키워준곳이다. 정각원에 오면 먼저
법당에 올라가 정성껏 향을 피우고 초를
밝히고 삼배를 한다, 삼배는 삼 보에게
하는 것으로 부처님(佛), 진리(法), 스님들(僧)이렇게
세 가지 보배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 원장님께서
설명해 주셨다. 다음에는 가져온 우편물과
신문을 정리하고철한다. 그 외에는 손님들이
오시면 차도 대접하고 언니들의 일도 도운다,
1학년으로서 아직은 좀 서툴고 학교에
대해 모르는 일도 모르는 곳도 많았다.
그중 정각원에 오면서부터 알게 된 정각원
옆 산책로, 숲 속의 시원하고 맑은공기,
고아한 연꽃, 정감있는 벤치, 신입생인
나로서는 우리 학교에도 이런 곳이 있었는지
미처 몰랐다. 아침 일찍 학교에 오는 날이면
혼자서 정각원으로향한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되고 시끄럽던 교정은 잠시 휴식을
취하듯 조용하고 적막감까지 느껴진다.
그 시간 정각원은 이른 아침 엷은 안개로
가리워져있고 때마침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질 때면 꼭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다,
정각원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치른 행사는
''교직원 개강법회''였다. 공문도 돌리고
불전에 음식도 올리고 다과도 준비했다.
법회가 끝난 뒤면 언니들과 떡과 과일을
나누어 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법회 준비의
힘들었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장 큰 행사는 ''전 동국인
수계 대법회''였다. 이 수계 준비는 보통
바쁜 일이 아니었다, 수계 첩도 정리해야
하고좌복(절에서는 방석을 좌복이라 한다.)준비,
공문 돌리기 등 언니들과 며칠씩 밤 10시가
넘는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기도 했다,
나 또한 이번 수계식때 부모님과 함께
수계를 받아 ''慈'陸心''이라는 어엿한
법명도 있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직접
겪어 보아야 잘 안다고 한다.매번 참석자의
입장에 있다가 이렇게 기획하고 준비하는
입장이 되니 큰 일에서부터 작은 일까지
몰랐던 것도 많고 생각보다 힘든 일이
많은 것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깔아 놓은
좌 복에 내가 쓴 이름표를 보고 찾아 앉은
사람들을 볼 때 비록 힘들었지만 뿌듯하고
보람있었다, 정각원에서는 매달 ''정각도량''을
펴낸다.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는 기사
하나하나에도 많은 정성과 노력이필요하다.
새삼스런 일이지만 정각원 일을 시작하고난
후부터 모든 신문이나,포교지, 전단지
등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정각원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가 있다. 녹차가 그것이다.
향기롭고 달콤한 커피맛에 젖어 있던 나였지만
다기에서 정성껏 우려내어 마신 차는 어느덧
내 입맛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이렇게
정각원으로 오는 발걸음이 마냥 가폅지만은
않았다. 무거운 우편물을 들고 올 때면
가까운 부서였으면 얼마나 좋을 까라는
생각도 했고, 햇볕이 쨍쨍 내려 쬐는 날이나
비가 주룩주룩오는 날이면, 사실 도망가고
싶기도 했으며 친구들과 재미있게 어울려
놀고싶은 생각도 많이 했었다. 물론 친구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소중한 부처님을 만나
뵙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아름답고 반가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의 짜증나는
더위가 약간 남아 있을 때 시작된 2학기는
어느덧 시원한 바랄 이 불더니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수업받고,정각원에 왔다가,
동아리 활동까지 하다 보니 벌써 한 학기가
지나고 말았다. 아등바등 바쁘게 지내다
보니 아쉽고 후회스러운 일도 없진 않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 정각원 근로학생이란
것이 뿌듯하기만 했다. 이렇게 한 학기동안의
근로는 끝났다. 비록 한 학기의 임기는
끝났지만 모두 들 잘 봐주셨는지 한학기더
하게 되었다. 부족한 것도 많은데 다시
또 기회를 주시니 고마웠고 그런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내가
이 곳 정각원에 와서 어쩌면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많은 것을 만났다. 산책로의 연꽃들,
언니들, 그외 정각원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부처님, 이모든 것들이
자칫 방종에 빠지기 쉬운 나의 대학 생활을
나름대로 잘 정리할 수 있게 해 준 것들이다.
그런 만큼 정각원에 대한 나의 애착은
점점 커져갔다.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 후임자로 오는 사람이
어느 학과학생이든 부처님을 잘 모시고
정각원을 위해 열심히 일 해줄 사람이
와서 내가 부족했던 점을 많이 채워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또 동국인 모두가 정각원을
잊지 않고 종소리에도 귀를 한번 기울여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학기에도
여전히 개강법회를 시작하여 종강법회까지
많은 법회와 가장 큰 ''부처님오신날''
행사 등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을것이다.
그때마다 언니들을 도와 더 열심히 일해야겠지?
물론 학생의 본연에 충실하면서... , 오늘도
난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행 냄새 가득한
정각원에서 녹차를 마시며 종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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