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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정각도량 / 5월호 / 통권 31호 / 불기
2541(1997)년 5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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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법어/불교수행의
핵심 배도원 큰스님
우리의
마음 자리는 그 밝은 것으로 말하면 해달보다
더 밝은 것이고, 그 덕으로 말하면 하늘
의의나 땅의 덕보다 훨씬 지나고, 그 포용력으로
말면 넓고 광대하여서 능히 이 법계를
싸고 있습니또 그 자체는 모든 만물에
두루 해서 있고 있지 않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나입니다. 이 우만물을
만드는 주인공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깨닫되면,
이 세상의 부귀영화나 오욕락이 도무지
소용없게 됩니다.
성불하는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사
수행이 따라야 합니다. 수행이 없는 불교는
참 불교가 될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하려면
우선 믿음 확실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뒤 ''내가체중생을 관찰해 보니까
다 이래와 똑같은 덕상(德相)을 갖추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망상 집착 때에 부처의
작용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도
부처구나' 하는 확신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것 신심이고 믿음입니다. 이 신심이
확고할 때 비료수행할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행은
망상 집착을 제하는 것입니다. 망상 집착
제하는 것이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계학(戒學)며, 하나는 정학(定學)이며,
하나는 혜학(慧學)입니다. 벌려 놓으면
계 .정.혜 삼학이 되지만, 좁혀 놓으한
마음 속에 다 있습니다. 마음 속에 그른
것이든 것이 계이고, 마음 속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이며, 마음 속에 어리석지 않은
것이 혜입니다. 마속에서 번뇌 망상과
집착만 없어지면, 계 .정 .혜 .삼학을
한목에 닦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마음을 반주해 보는 한 법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한다'' 고 한 것입니다.삼학
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계입니다.
계의 그릇이 튼튼하고 완전해야 그 속에다
물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 물은 뭡니까?
정수(正水)입니다. 그런데 흐린 물을 갖다
놓고 자꾸 흔들어 버리면, 흐린 물이 맑아질
수 없습니다. 가만 안정을 시켜놓아야
차분하게 앙금이 가라앉아서 맑은 물이됩니다.
맑은 물이 되어야 허공에 있는 달이 비추게
됩니다. 심월(,已,月)이 비출 수 있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주력을
하든 경을 보든 어떤 수행방법을 선택하든지
계만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계를 안
지키면서 하는 수행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정과
헤는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을
항상 비워야 합니다. 잠시도 생각을 쉬지
못하고, 그 생각이 망상인 줄 알지 못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쫓아가고 있습니다. 조사스님 말씀에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망상이구나 알면, 망상이 사라집니다.수행하는
방법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 이
말입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을 망상인 줄
모르고 흘러가고 있는 것은 공부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말씀은 공부하는 사람이라야
절실히 이해될 것입니다.
무심합도(無,已,合道)라,
마음을 텅 비워놓는 것이 도입니다. 마음을
본바탕 자리에 놓아두자는 것이 정입니다.
왜 정이라 하느냐? 마음 본바탕은 동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단(形f퓻)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공적(空寂)한 자리입니다. 마음
본바탕을 관찰하는 그 속에 모든 수행이
다 포함됩니다.여러분의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자기 주인공을 잃어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그것이 곧 정혜쌍수(定慧雙修)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허망되게 과거법을 취하지 말고 미래의
일에도 탐착하지 말라. 현재 하는 일에도
머물지 말고, 삼세가 공적한 줄 요달하라.
『화엄경』의
이 말씀은 마음을 비우는 요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스님은 마음 공부하는
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익숙한 것은
놓아서 설게 하라''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은 하도 오랜 겁을 두고 친해져서
친해도 친한 것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내가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그것은
놓아서 자꾸 멀리하라는 것입니다,''설은
것은 놓아서 익숙하게 하라,'' 마음 비우는
일은 나하고는 전혀 생소하다는 겁니다.
생소한 것은 친하려고 자꾸 애를 써라
이겁니다. 생소한 것은 친해지고, 친해진
것은 생소하도록 만드는 것이 공부입니다.
과거의 일곱 부처님이 공통적으로 말씀하신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는 부처님교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선봉행(衆善奉行)하고
제악막작(諸惡莫作)하라. 뭇 착한 일은
다 받들어 행하고 모든 악한 일은 행하지
마라.'' 선이라 하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하고, 악이라면 터럭만큼이라도
'안 지은 분이 부처님입니다. 나는 부처님이
그런 분이라고 봅니다. 마지막 구가 더욱
절실합니다. ''자정기의(自淨其意)가 시제불교(是諸佛敎)라,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 뜻을 깨끗이 한다는
말이 마음 비우라는 소립니다. 마음을
비워버리면 저절로 선을 행하게 되고 모든
악을 짓지 않게 됩니다.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그치지 못 하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탐.진.치가 잔뜩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내내 말을 해봐도, 마음 비우자는 이야기
하나 뿐입니다. 무수겁(無數劫)을 두고
익혀온 습기 버르장머리가 누룽지가 되어서,
그것이 그만 천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천성을 뒤집는 데는 한바탕 야단을 쳐야
될 것입니다. 그 일을 황벽스님 같은 분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부디 부지런히
정진하여 매화 향기를 맡으시길 빕니다.
번뇌 망상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네. 간절히 화두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라.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매화 향기 어떻게 코 끝을 찌르리오.
『요약정리
: 김호성』
정각도량/ 난(蘭)에서
배운다 이도업 스님 / 경주정각원 원장
4년전
어느 겨울날 신도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두 번씩이나 실패한 후의 합격이라서,
아무나 붙잡고 자랑도 하고 싶고 소리도
지르고 싶고 감사도 하고 싶은데 .....
. 그때 내 생각이 나서 왔뇨라면서 놓고
가신 난(藺)이었다. 동양난이었다. 난의
이름도 모른체 받아 놓고, 강의다 연구다
잡무 다해서 혼자만 바쁜 척하면서 난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살아 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물주는 일은 공양주의 수고였다.
지난
겨울방학 모처럼 기도를 시작했다. 문밖
출입을 삼가고 방에 있는 시간이 많게
되니 자연히 난과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새벽예불에서 돌아오면 엄지와 검지로
난잎을 훑어 주기도 하고 창쪽으로 위치를
바꿔 주기도 하면서 마음을 보냈다.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던 난이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잎이 윤기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날 갑자기, 정말 갑자기 난은 꽃대를
내밀기 시작했다. 두줄기였다. 4년동안
그날이 그날같이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던 난이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네 마디에서
앙증스러울 정도로 작은 꽃잎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도가
끝나던 날 우연하게 또 한 그루의 난이
들어 왔다. 서양난이었다. 이파리 못지
않게 꽃잎은 컸고 향기도 방안 가득 진했다.
꽃잎은 봄날 상다리 밭에 노니는 노랑나비의
날개보다 더 노랬고, 향기도 샤넬 화 이브보다
더 진한 듯했다. 그러나 며칠도 안되었는데
꽃잎도 향기도 그만 사그라져 버렸다.
화려하고 진한 향내를 뽐내던 서양란은
파장 후의 시골 장 같이 허전함만 주었다.
지금 내방에 있는 이 동양란은 다르다.
첫째,
호들갑스럽지 않아서 좋다. 잎은 어제나
오늘이나, 작년이나 금년이나 그 잎이
그 잎이다. 꽃줄기는 흙 갈색이고 꽃잎은
조금 흰색을 띠고 있는데 조금도 화려하지
않다. 그略]나 소박함이 있어 좋다. 둘째,
진하지 않아서 좋다. 자세히 보면 향기가
있는 둥 마는 둥 하다. 주위가 산만하거나
마음이 시끄러우면 느끼지 못 할 정도다.
새벽예불 후 좌선의 자세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 은은함이 좋다. 셋째, 깜짝쇼와
같지 않아서 좋다. 순간적으로 입안을
화-하게 하는 박하사탕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무미건조하지만 씹고 씹어 음미할수록
그 맛이 우러나는 건빵과 같이 몰1고 오래가는
맛이 있어 좋다,요즈음 사람들은 서양란과
같이 호들갑스럽고 자극적으로 진한 것을
좋아하고 박하사탕과 같이 순간적으로만
화-한 듯 해서 유감이다.
동양난과
같이 소박하면서도 은은하고 씹을수록
갚은 맛이 나는 그런 사람이 그리워지는
때다. 6.70년 살다가는 사람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천년 만년 가야 할 종교에 있어서야
더 말해야 뭘 하겠는가.
일주문/ 마음의
등불 이법산 스님/불교대학 학장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눈빛이 맑고 빛나면
반갑고 정다워진다. 눈빛을 보면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욕심 .성냄 .어리석음.아만.의심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이 다섯 가지의 빛깔은
남에게 공포와 미움을 느끼게 하고, 외면하여
피하고 싶은 괴로운 심정을 자아내게 한다.
욕심이
없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성냄이 없으면
표정이 부드럽고, 어리석음이 없으면 얼굴이
밝고 아만(我'[曼)이 없으면 모습이 겸손하고,
의심이 없으면 자세가 반듯하게 드러나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만나는
이의 얼굴을 밝게 해 주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게 하여 만나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된다.
응공(應供)이란
공양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받을
수 있는 능력자는 자연히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분수에 넘치는 대가를 바라거나
능력 밖의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탐욕이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얻어지는 이득은 탐욕이
아니며, 자기의 이익을 남과 더불어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욕심 없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공무원이
자기 직분에 준하는 급료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응공이다. 만약 정당한 수익 외에
뇌물이나 횡령으로 재산을 챙긴다면 이를
탐욕심이라고 한다. 욕심은 반드시 마음을
어둡게 한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화를
많이 내고, 마음이 어리석어 실수를 많이
하고, 남을 무시하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허세를 부리고, 남을 의심하여 마음이
항상 불안하게 된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항상 마음이 밝고 맑아서
기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일하므로 일에
능률이 오르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때때로
새롭게 약진할 수 있으므로 나날이 향상(向上)되어
출세와 성공의 큰길을 자유롭게 행진할
수 있다. 뽐내거나 남을 업신여기지 않으니
모든 사람이 반겨하고, 남을 의심하거나
시기 . 질투하지 않으니 누구나 신뢰하게
된다.
부처님
앞에 등불을 박히는 것은 내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는 지혜의 등불을 켜는 의미이고,
부처님께 향을 사르는 것은 나의 마음에
물들고 썩은 탐욕의 냄새를 쫓아내고 향기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뜻이다
부처님이
오신 뜻은 이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함에
있다. 내 마음의 등불로 세상을 밝히고,
한줄기 향으로 우주를 향기롭게 하자
나무석가모니불
정각논단/ 불경과
국어사 연구 김무봉 / 한국어문학부
교수
어떤
종교(宗敎)든 종교의 교리를 담 은 경전(經典)의
간행 .보급은 각기 그 종교의 특징을 가름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어 왔다.
이른 시기에 이 땅에 유입된 불교의 경우,
국교로서 번성을 구가했던 시대는 물론이고
유가(懦家)의 도(道)를 치국(治國)의 주요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조까지 불교 경전의
간포(刊布)가 끊이지 않아서 오늘날 우리에게
적지 않은 양의 법보(法寶)를 남겨 주었다.
간경불사는 주로 왕실이나 사대부 또는
스님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한편으로는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한 방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흥국이민(興國利民)의 이념
실현 및 대중교화를 위한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경전의 문자는 한자가
월등히 많았으나 차자표기(借字表記)까지를
포함한 국어 경전의 간행도 병행되었다.
국문자가 없던 시대에 이루어진 국어 경전은
한문경전에 토(口訣)를 달아 읽는 방법이
강구되었고, 국문자 창제 이후에는 경전(經典)
또는 경소(經疏)에 정음으로 토를 단 후
번역(盈令解)하는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이렇듯 불법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행해졌던
일련의 국어 경전 간행 사업의 결과물이
당시 한국어의 언어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
문에 한국어사 기술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면서 국어학의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이러한불경 자료들이 그 시대 언중(言衆)들의
생생한 구어까지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발굴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구결
불경들은 조선조의 불경 언해 자료와 더불어
국어사 기술에 적지 않은 성과를 가져다주었고,
자료 활용 여하에 따라서는 앞으로의 성과가
기대된다. 이상의 일별에서 보듯 불졈은
국어사 연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불교 경전을 국어로 읽기 위한 노력을
폭 넓게 해석한다면 그 始原은 고대국어
시기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7세기
경에 이미 구결 표기가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기록이 있다 7세기 중엽 의상(義湘)대사가
화엄경을 갈 의한 것을 그의 제자 지통(智逋)이
결집한 <요의문답> (要義問答>과
의상의 강의를 또 다른 제자 도신(道身)이
결집한 <일승문답> (一乘問答)이
'잡이 방언(雜以放言) '(신편제종교장총록,
대각국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시기적으로
뒤지기는 하지만 균여대사(均如大師)에
의해 10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화엄경기석(北釋)
가운데 <석화엄교분기> (釋華晸敎分記)
권3에는 실제로 구결이 나타난다. 오늘날
전해지는 자료만 가지고는 그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경을 읽는 사람들
나름대로 어떤 방법을 가지고 있었거나,일반화
또는 규범화하지 않은 구결을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어사의 고대국어 시기는
경전을 국어로 읽으려는 노력이 처음으로
가시화된 시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l973년
l2월 충남 서산시 운산면 문수사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복장품(腹臟品) 중 하나로 발굴된 낙장본
구역인왕경(舊譯仁王經, i2세기 중엽 완성)
상권(2. 3. 11. 14. 15)의 출현은 종래
전기중세국어 시기의 국어사 연구가 음운
및 어휘 연구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 이후 발굴된 <능엄경> 등의 다른
구결 자료와 함께 문자론적인 연구는 물론
문법론적인 연구(형태 .통사영역)까지
연구의 폭을 확대할 수 있게해 준 것이다.
구결 자료는 석독구결(釋릅賣口政)과 순독구결(順言賣口訣)로
나뉜다. 석독구결은 한문에 토를 달아
그 한문을 우리말로 새겨서 읽는 방법이고,순독구결은
음독구결(를言賣口訣)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한문의 원문을 순서대로 음독하면서 구독(句큽賣)에
해당되는 곳에 우리말의 토를 달아 읽는
독법이다.순독구결은 석독구결보다 한
단계 발전된 형태로 흔히 구결을 말할
때는 순독구결을 이른다. 현재 알려진
불경 구결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체로
14세기 이후에 간행된 것들이다.
1)
석독구결자료 : 구역인왕경, 유가사지론,
화엄경, 화엄경소, 금광거울 권3.
2)
순독구결자료 : 능엄경 4종 : 박동섭본(안동),
남권희본(대구), 기림사본,송성문본 직지심체질요절,
남명집 2종,불설42장경 4종, 법화경 2종,
범망경 4종,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3종,
자비도량참법, 영가진각선사증도가, 슴강경
2종등.
여말선초(斅末鮮初)의
구결 불경은 자료의 발굴만이 학계에 알려졌을
뿐 실물이 공개된 것이 적고, 아직은 구결자(口攷字)
해독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어서 국문자
제정 후 간행된 언해 불경들과의 연관성
구명(究明)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몇몇
단편적인 보고만 있을 뿐이다. 선초(鮮初)에
간행된 남풍현 교수 소장의 구결 <법화경>
1, 2, 3권이 <법화경언해> (1463)와
대체로 일치하며, 14세기 초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남권희 교수 소장분 <능엄경>이
간경도감본 <능엄경언해>와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것 등이다. <능엄경언해>의
각권 권말에는 '요해(要解), 의해(義解),회해(會解),
집주(集注)' 등 네 부분으로 나뉜 음석(音釋)이
있는데, 이 중'요해' 부분은 남권희본의
'음(뇹)' 부분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이로
미루어서도 알 수 있듯이 <능엄경언해>는
구결<능엄경> 여러 이본들을 통합해서
만든것이다.
이러한
구결 불경은 국문자(國文字)창제 이후에도
계속 되어 구결 <원각경>(1445),
구결 <지장보살본원경>(1558) 이현전한다.
구결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고 표기가 조금씩
달라졌는데 이 러한변화를 통해 전기 중세국어
시기의 국어사 기술(記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1446 A.D.)로부터 15세기 말까지
50여 년간 간행된 한글 문헌들은 새로
만들어진 문자의 보급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한글 문화 창출의 선두에 서게
된다. 이 시기에 간행된 한글 문헌은 39건에
달하는데, 이 중불교 관계 문헌이 20여
건에 이르러 수(數) . 양(暈) 양면에서
다른 분야 한글문헌을 압도했다. 초기(初期)
불가류(佛家類) 한글 문헌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불경(佛經)의
원문 또는 경소(經崍)에 한글로 토를 달거나
번역을 한 이른바 언해(諺解)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간행 양식은 언 해서들의
전범(典範)이 되어, 이후 간행된 언 해서들은
이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선초의
불경 언해 사업은 대부분 왕실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초왕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아울러
석보상절(釋譜詳節)처럼 전기문학({專記文學)의
성격을 띤 문헌도 있어서 국문학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 인출 과정에서
독자들의 독서 편의를 위해 끊임없이 체제의
변화를 시도하여 서지학 연구에도 기여하는
바 크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새로 제정된 문자의 보급에
불경 언 해서가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의 치국이념과 배치되는 것인데
언해 사업이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의 반영이면서 백성들의 뿌리 깊은
불심(佛,已,)을 대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우리말로 불경을 읽기 위한 일련의 노력은
한국어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해왔다.
특히 조선 시대의 한글경전 간행 사업은
중앙어의 보급 및 새로운 문자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바 크다.
교리강좌/ 불교
수행의 정도 정승석 / 불교대학
교수
석가모니의
성불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인 방법은 고행이
아니라 수정(修定)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정의 정(定)은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아
안정된 상태를 가리키므로, 수정이란 완전히
고요한 상태에 이르도록 마음을 닦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행은 육체, 특히 감각적 생리적
기재를 다스려 힘을 축적하는 노력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가 고행을 포기하고
수정을 채택하여 성불했다는 것은, 육체로부터
마음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생사의 문제를
해결했음을 의미한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 곧 이것이다.
마음을 닦아 적정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정은 불교 수행의 정도(正道)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일찍
이
고행을 대신하는 말로서 두타행(頭陀行)이
통용되었는데, 이 두타행에도 그 정도를
충실히 따른다는 정신이 깃들여 있다.
의식주의 모든 것에 걸쳐 간소하게 생활하는
수행자들의 전통적인 자세를 불교에서는
두타행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두 타라는
말의 원어(dhuta또는 dhuta)는 제거한다는
의미. 즉 마음에 부착된 때를 씻어 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 수행의 정도와
비교해 보면, 고행의 원어인 타파스(tapas)는
열을 의미한다. 이 열은 육체의 탄력을
통해 체내에 축적되는 열로서, 고대 인도의
전통에서는 초능력이나 마력과 같은 신비한
힘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으까지 간주되었다.
이에 의하면, 우주의 창조나 사자(死者)의
소생도 고행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고행은 또 사후의 생천(生天)을 보증하며,
다음의 생명체로 윤회할 때는 다른 경사를
보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고행의 효력이 신속한 동시에
집약적이며, 굳이 내세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현세에서 발휘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수행자는 고행을 실천하여
마치 재산을 축적하듯이 그로부터 발생하는
열 즉 타 파스를 저장해 간다. 이처럼
타 파스를 축적하는 사람을 가리켜
'파스를
재산으로 삼는 자' 라고 부른다. 타파스는
고행의 결과로서 저장되는 것이며, 고행
자체를 타파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같은
의미의 이전에 따른 것이다. 타 파스를
축적한 수행자는 전능한 힘을 얻는다.
그가 주문을 걸면 신들마저 그 힘에 구속된다.
인도의 신화에서 세계창조는 고행으로
얻은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또 신들끼리의
싸움이나 신들과 악마들 사이의 전투에서
승패는 고행력에 의해 결정된다. 간혹
신들은 고행 자를 무서워하여 그 고행의
방해를 기도하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했다는 것은 고행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상과 같이 신비한 초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행이 인식된
데에 고행을 배제한 이유가 있다. 고행이
절대적인 가치로 인식된 상황에서 수행자들의
고행은 고행 그 자체를 위한 것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므로 석가모니가 배제했던 것은
고행을 위한 고행이었다. 심리적으로 보면,
자기 학대를 통한 쾌감을 자극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괴롭힐 수도 있다.최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것이 고행이지만, 그 실제에서는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고행에
대해 수정은 소위 선정(禪定)의 상태에
도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목적을 설명하는
장부(長部) 경전에서,우리는 불교 수행의
기본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선정의
성취란 눈으로 사물을 볼 때라도 강관을
잘 지켜 그 모양에 팔리지않고, 가나 오나
앉으나 누울 때도 항상 마음의 눈을 밝혀,
바른 마음과 바른 생각에 머무는 것이다.
새가 날개밖에는 아무 것도 갖지 않듯이,
몸을 가리는 옷과 배를 채우는 밥으로
만족하고, 나무 밑이나 동굴 속, 숲이나
묘지 등 한적한 곳을 찾아 고요히 앉아서,
탐욕과 성냄과 게으름과 의심을 버리고,
건강하고 자유롭고 안전한 사람이 되어
선정에 들어가는 것이다.''여기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이면서도 어렵고 특수한 것으로
인식되기 쉬운 선정을 현실감 있고 쉽게
설명하고있다. 이 선정을 좀더 전문적으로
설명하자면, 선정의 원어는 정려(精慮)라고번역된다.
장려란 사고 활동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定)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의
원어는 살매이무로, 선정은 '선'과 '삼매'를
합한 말이기도 하다.그러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선정이라는 말은 그렇게 구분하여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어를
번역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점에서 선(禪),
삼매(定), 선정은 모두 깊은 명상에 의한
정신 통일의 경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수행자들은 보통 선정을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서 실행하므로, 이
선정의 모습을 표시한 좌선(坐禪)이라는말도
널리 통용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선정이라는 말을 정려, 사유수(屆藉修),
기악(棄怒), 공덕총림(功乎念叢林)이라고도
번역하였는데, 이것들은 선정의 취지를
여러 가지 방면에서 표시한 번역어이다.
즉 장려란 선정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를
표시한다. 사유 수는 온갖 사고 활동을
가라앉히는 선정의 구체적 방법을 표시한다.
기악은 온갖 악심을 잠재우는 선정의 목적을
표시한다. 공덕총람은 선정의 효과, 즉
선정을 잘 실행함으로써 공덕을 쌓는 결과가
됨을 표시한다.
전등
이야기/ 약산유엄(藥山惟嚴)과 이고(李 ) 정성본
스님 / 불교문화대학 교수
약산유엄
(751-834)는 石頭希遷의 법을 이은 당대의
걸출한 선승이다. 유임선사를 그냥 藥山선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선사가 唐 念宗의 貞元初(785년)에
예향(澧陽)의 유약산(萸藥山)에서 신당을
열고 학인들을 지도하며 선풍을 떨쳤기
때문이다. 즉 약산의 유엄선사라는의미이다
藥山은
河庭湖의 서쪽에 위치한 명승지로 애향과
朗의 중간에 있는 산인데, 예부터 芍藥의
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선사는 석두희천의
가르침을 받고 법을 이은 뒤에 이곳 약산에
와서 머물면서 그 곳 마을 어른에게 소
마구간을 빌려서 僧堂을 만들어 찾아오는
학인들에게 禪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약산의 신당을 牛舍禪塞이라고 부르는데,얼마되지
않아 학인들이 많이 모여 장소가 협소해져서
뒷산으로 장소를 옮겨法堂을 짓고 많은
학인들을 지도하게되면서 유임선사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에 朗刺史로 좌천되어 내려온 이고(李輦弔)가
약산유엄선사를 찾아와 道를 묻는 유명한
이야기가 『祖堂集』 제4권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刺史
이고가 약산 선사를 찾아와서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마침 선사는 경음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고 지사가 왔음에 전혀 개의치
않고 돌아보지도 않고 태연히 경을 보고
있었다. 이러한 약산의 태도에 이고는
불쾌한 생각이 나서인 사는 올릴 생각도
않고 비꼬는 말투로 ''얼굴을 보는 것보다
멀리서 이름(소문)을 듣는 쪽이 훨씬 좋았네1(見面平如
千里聞名)'' 라고 말했다. 이에 약산은
당장 ''이고' ''라고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이고는 그만 ''예1 ''라고 대답하니,
선사는 ''당신은 어째서 귀만 소중히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가1''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공은 얼른 절을 하고 ''어떤것이 道입니까?''
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선사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다시 물병을 가리키고는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
(雲在靑天水在甁) 이라고 말했다.
약산선사가
''당신은 소문만 듣는 귀만 신용하고,
사람을 보는 눈은 동태 눈처럼 썩어 빡졌군「'
이라는 의미의 비판적인 한마디에 이고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교의
질문에 약산이 대답한 ''구름은 하늘에,
물은 병 속에 있다.''는 말은 너무나 단순한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사실 도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이 한마디에 충분하다.
I中庸』제i2장에 「君子의 道는 작용(費)하면서그
본체는 보이지 않는다(隱)」라고 朱子는
주석하고 있다. 이어서 도의 작용을 실증하기
위해 『詩經』의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어 놀고
있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道의 본체와
작용이 보이지 않지만, 솔개가 하늘을
날아가고 있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어노는
그 모습에서 도의 작용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있다. 단순히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쉬운道의 실제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도는 어디에고
머무르지 않고 쉼이 없으며, 또한구제적인
형제를 취하고 있다.
이를
선불 교에서는 불성의 全體f乍用이라고
하는데, 작용은 반드시 작용할 수 있는
理致가 있다. 솔개가 하늘을 날고, 연못
속에 들어가지 않고, 물고기가 연못에
놀면서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이다. 도의
이치란 단순히 움직이고 작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분명한 平變의 법칙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가 각기
자기의 모양과 속성을 가지고 존재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불변의 속성인 이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치를 벗어나면
죽게된다. 솔개가 연못에 들어 가거나,
물고기가 였못을 벗어나게 되는 것과 같다.이고의
질문에 약산이 ''구름은 하늘에 물은 물병에
있다'' 는 말도 이러한 존재의 속성과
이치의 불변성을 직접 제시하여 보여주고
있는 말이라고 하겠다.약산선사의 이 한마디에
이고는 道의本旨를 깨닫고 찬탄의 게송을
지어 올렸다.
경전의
세계/ 불본행집경 이만
/ 불교문화대학 교수
초기경전의
내용을 살펴 보면, 대개는 일반적인 교의에
관한 것이 많이 설해져 있고, 부처님 자신에
관한 것은 비교적 시기적으로 조금 뒤에
언급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러한
이유 중의 하나는 부처님 입멸 직후의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부처님에 대한 기억
등이 생생한데다가, ''자기자신을 의지하고
남을 의지하지 말며, 진리를 의지하고
진리가 아닌 것은 의지하지 말라''는 이른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유훈에
따라서 우선 교설의 편집을 주로 하고,
부처님의 전기(傳記)같은 것은 당면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셨던
제자들도 더러는 입적하고, 한편으로는
부처님을 추모하는 정이 한층 간절해지자
이에 이르러서 부처님에 관한 전기 즉불전문학(佛革專文學)을
편찬하게 된 것이다,이들은 각종의 성전에
전하는 관련자료와 교단 내에 전해오는
이야기 및 당시에 이해되고 있었던 불
타관 등을 증빙자료로 하여 편집한 것으로써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불전문학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의 전기에는 여러 가지가있지만,
가장 상세하게 모든 자료들을 수집해서
집대성한 것으로는 이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이
단연 뛰어나는데, 이것은 전 기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처님의 과거 인연 담과
현재 본 행의 인연설 등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전은
한량없이 무수한 세월에 걸쳐서 수행한
부처님의 이력과 왕가의 계보에 관하여
서술하고, 이어서 도솔하생 및 탄생에
따른 출가인연 등을 매우 풍부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색일 뿐만이아니라, 끝 부분에는
전도기(專渲期) 즉 제자열전을 두고 부처님께서
교화한 제자들을 그 교화내용과 함께 일일이
기록하고 있어서 자료로써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아직까지 원본이 발견되고
있지 않아서 그 정확한 경전의 본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대중부(大衆部)의 마하승기사(箏訶僧祈師)는
이를마하바스투 즉 대사(天師)라 하였고,
법장부(法藏部)의 담무덕사(曇無不훙師)는
석가모니불본행(本行)이라 하였으며, 이외에도
대장엄, 불생인연, 비니장근본(毘尼藏t艮本)등으로
그 이름이 붙여지고 있지만, 이렇게 명칭이
다른 것은 율장을 소지하고 있는 다섯부파의
본행경이 각각 상이한데서 기인한 것으로써,
여기에서는 가장 완벽을 기하고 있는담무덕
소속의 법장부의 것을 채택하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이 불본행집경이 대사(大師)와
내용이 같지 않느냐 하는 경향도 있지만,대사가
설출세부(說出世部까 전하는 율장을자료로
살아 이 가운데서 불전만을 골라 본생
담과 비유를 주체로 발전 , 독립된 것으로써,
프랑스의 스나르(E. senart)가 네팔계사본
세 종류를 교정해서 출판한 범문 원전은
있으나 한 역본이나 티베트역 본은 없는데
비하여, 불본행집경은 그 주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불전이라는 데에 큰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본 경전이 율장이라는 웅대한
자료를 간략하게 축약해서 불전에 대한
일반의 요망에 답하고 있는 점에서는 그
계기가 대사와 같으나 성립의 면에서는
다른 부피의 다른 전승에 의해서 이루어진
불교경전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대사의
번역 경전이라고 함은 잘못이다. 실제로
양자 간의 유사점은 많지 않으며, 비슷한
경우라도 그 목적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
경전을 번역할 때에 축어적(逐珞的)인방법을
매우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달의적(達意的)인
경우와는 달리 번역문 자체로도 원전의
모습을 유추할 수가 있을 정도이며,더
나아가서 다른 불전작품을 읽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이
불본행집경은 인도에서 불멸 후 각 교파
간의 분열로 말미암아 20여부가 대림 하고있을
때에 그 중 다섯 부피에서 행해지던 불전을
별찬(別簒)시대의 말기에 집대성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를 북인도에서 중국에 온사문
사나굴타가 수 나라의 개황 7년(587)부터
h년(5맛)에 걸쳐서 중국 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한역한 것으로써 다른 경전과 비교해서는,
헬 맨 처음으로 불타 계통의 전 기틀 든점과
②왕족 계통의 전기를 든 것인데, 이는
대중평등 왕과 감자 왕과의 두 고전을
종합하고 일련해서 고찰한 것이고, 또한
③ 많은 본생 담을 포함하고 있으며, ④여러
가지 다른 전기들을 참작해서 만들었다는
점 등이 그 특색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으로
석존께서는과거에 무량한 부처님들을 찬탄,
공경하고,선근바라밀을 담아 죄를 참회했으며,
그로 인하여 현세에도 보리심을 내어서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전도기에
교화한 제자들도 과거의 부처님들과 깊은
인연에 의하여 출가수행하게 되었다는
내용 등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 경전은 우리에게 깨달음의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일깨워주고 있으며,
불교를 접하게 된 인연이 비록 우연일지라도
그것은 이미 전생부터 맺어 온 결과라는
도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불전이라고
하겠다
이
경전은 전체가 60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또한 세분하여 제1부 전생기(前生期),
제2부 금생기(今生期) 및 제3부 전도기(傳道期)
등으로도 구분한다. 제1부 전생키는 부처님의
전생담요로서 보리심을 발하여 도솔천에
올라가 다시 마야부인에게 탁래하기까지의
5품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으로써 그것을
보면 불통보(矛津統3醬) 속통보(牙往統a替)
1품과 탁태전(託胎傳) 2품이며, 제2부
금 생기는 현세에 탄생하여 배우고 결혼했지만
세속의 향락이 오히려 죄업만 무겁게 하는
근본 원인임을 깨닫고 출가하여 선인들을
만나 도를 물었던 수행기록 등을 역시
셋으로 나누었는데,여기에서 재속기(在俗期)는
15품, 출가기(出家期)는 9품, 성도기(星圖期)는
8품으로 짜이어 있고, 마지막으로 제3부의
전도기(2]품)에서는 45년 동안 전도활동을
하면서 교화한 제자들의 열전(列傳)을
기록한 것으로써, 특이한 것은 이 제자들
역시 우연히 불법을 만난 것이 아니라
전생의 선입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불전문학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마명보살의 불소행찬(佛所t了讚)이
바로 이 불본행집경을 의지하여 성립되었다는
점에서도 이 경전의 우수성이 한층 입증된다고
하겠다.
동국과
불교/ 격동 이후 학원건설
노력 편집부
독재
타도를 위한 4.19학생혁명 대열에서 동국
인들이 선두에 서서 목숨을 걸고 파사현정
의의기를 불태웠음은 앞 호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4. 19 이후의 사회 풍조는
안타깝게도 데모 만능의 시대와도 같은
양상으로 흐르고 있었다.이유와 명분마저
불투명한 데모가 연일 곳곳에서 계속되었고
이 때문에 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학생데모의 참된
의미가 점차 희석되어 갔다. 학생데모에
대해 시민들의 빈축이 들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의시기에采 우리 대학은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 자중하며 평온을 유지하는데
성의를 다하였다. 본분에 충실하며 명랑한
학원을 건설하기 위한 지성적 노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더욱 대학의 내실을
기해 갈 수가 있었다.
1957년
9월 12일 교육부 제 525호로 인가를 얻어
발족한 우리 대학 출판부의 발전도 그
중에하나이다. 개소 이래 화판인쇄기 자동주자기
연판기구 등 일제의 시설을 완비했던 출판부
인쇄공장은 4.19 이후의 격동하던 정세
속에서도 더욱 내실에 박차를 가하였다.
1959년 10월에도 서독제 화판윤전기를
도입했던 인쇄공장은 1960년5월 중순에는
다시 서독제 동판기와 홉 세트 인쇄기를
도입하는 등 시설확장을 계속해 간 것이다.
한편 이 해 5월 하순에 발표된 계리사
전형고시에는 전국 합격자 18명 중 우리
대학의 민우강. 윤태중군 등 5명이 합격하였다.
이는 동국이 전국 수위 합격률을 기록한
것으로서, 우리 대학의 저력과 면학분위기를
짐작게 해 주는 일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이 무렵 학생들의 도서관 이용률 또한
매우 높았다. 특히 데모가 한창이던 4월의
도서관통계가 열람자 2,427명에 2,263책을
열람 및 대출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동대사보
127호),5월에 들어 28일까지의 통례는
열람 인원수가3,459명(남 2.922, 여 5377)으로
격증하여 도서관 직원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매우 반가운 현상이었다.
과학관과
실험실에도 학문탐구의 열기가 넘췄다.
그 가운데 4.19의 부상으로 당시 수도
의대부속병원에 입원 중이던 박종해군(농4)
하루 3시간의 외출 허가를 틈타 학꾜에
와서 의족을 이끌며 실험기구를 巳f지고
있는 광경은, 교수와 학우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5월
31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부질없는 데모를 자행하는 무대학회
데모중지를 권고하던 동대생 조형석(농1).
박치남(행1)군이 데모데에게 집단 폭했을
당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전 학우들이
달려가 실력행사로 데모를 저지하였고
데모에 지친 서울 시민들에게 그 실황이
전파를 타고 알려짐으로써 칭송을 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타대학과 마찬가지로 본교도 4 .19혁명에
자극되어 학원 내 민주화 문제가 일부에서
대두하고 있었던 것 또한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즉 5월 16일 학생자치 위원회간부, 각
학회 정.부회장, 각과 대의원 등 46명이
참석하여 교내문제콕신 14개 건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이를 학교당국에
건의하게된 것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그
내용은 편입생에 관한 문제가 1개항, 교수의
안일주의 강의 및 주기적인 교수회 개최
등 교수와 직원의 친절에 관한 사항이
4개항, 도서관개선문제 껴항, 과학관의
시설확충과 실험시간연장 등이 꺄항, 졸업
. 입학식과 학생복장에 관한 것이 3개항,
학생활동에 관한 것이 1개항, 총장의 3
중직 유임에 관한 1개항 등이었다
학생들의
이 i여항의 혁신적 건의안은 학교발전을
위한 사심없는 건설적 의견이었던 것은물론이다.
그러나 거의 황무지에서 출발하여 1462평의
석조 본관을 비롯하여 불과 5년 반만에
5동4,700평을 건설해 온 애로와 이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소의 무리도 이해해야
할 일이었다. 한 예로 교직원 친절 문제를
들어 그 증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당시
학교 예산이 제대로 학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까지의 증원은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학교 당국에서는 학생측의 이 건의안을
가능한 학교행정에 반영시킬 것을 약속하고
우선 당시로서 가능한 것부터 실천에 옮기기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과격파 학생층은
전면적인 실천이 즉시에 이루어지지 않은데
불만을 품국 본 대학 육영 사업에 4천5백만원을
쾌척한 손석재 여사의 동상건립문제와
불만을 결부시켜, 학사행정 책임자로서의
총장을 비난하는 학생도 없지 않았다.
한편
6월 l일, 재직교수 69명중 중 64명이 모여
전체교수회의가 열린 것도 4.19이후의
기류와 무관하지 않았다. 민주학원건설유지
교수 일동의 명의로 새로운 질서 모색의
목적하에 제출된 「동국대학교 교수회칙초안」의
심의가 이날 회의의 목적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제출된 초안을 놓고 약 1시간 반에 걸쳐
신중히 검토한 결과, 위원을 선출하여
현행 정교육공무원법, 재단정관 등을 참조하여
다시 초안을 작성할 것을 결의하고 폐회하였다
이에 따라 교수회칙 초안은 동년 8월초에
이르러 「교수인사협의회회칙」의 명칭으로
전문 11조의 회칙이 제정되었다 대학교육의
고도의 독립성과 안전성, 융통성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 회칙의 골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
①
앞으로 교수 . 부교수 . 조교수 및 전임강사의
임면은 각 단과대학별 「교수인사위원회」의
제청에 의하여 동 협의회의 심의 추천을
거쳐 임녕권자가 이를 집행할 것.
②
과 주임들로 구성된 「소위원회」와 단대별
교수회에서 무기띵투표로 선출하여 (대학당국
2명) 구성된 「협의회」 외 통과 없이는
임의로 임명할 수 없다
③
본 회칙은 단기 4293년(1960) 10월 1일부터
시행한다.
이와
같이 학생과 교수의 동향 등 4.19혁명이라는
일대 격동기에 있어서 우리 대학도 다소의
진통을 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교수와 전 학생이 이성을 저버리지 않고
명랑한 학원건설을 기대해 마지 않았던
까닭에, 다른 대학들에 비해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강의가 계속될 수 있었다
4.19
이후라 해서 대학이 온통 격동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담하게 단장된 무대와
66석의 관중석을 갖춘 소극장이 완성되어
연영과의 제1회 공연으로 양동근씨 연출의
「오! 머나먼 나라」를 공연하여 저명한
극예술 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것도
학내외가 격동기에 있었던 9월 7일에서
10일까지의 4일간이었다
신행상담/ 무상 장계환
스님 / 불교대학 교수
미희양이
질문한 무상(無常)이란 말은 삼법인(三法人)의
하나인 제행 무상을 해서도 잘 알려진
불교교리입니다. 그러나 잘못 이해되고
있는 용어 중의 하나 이도 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허무하다, 덧없다, 허망하다라는
의미로만 알고 있기때문이지요.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이란 '항상하지 않는다'
즉 '변한다' 라는 뜻입다. 그래서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 추이에 따라 신속하게
변천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마치 우리 인간들 생로병사를 거치듯이,
우주의 모든 존재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겨서(生)
머물다가 변하고(異) 사라지는(滅)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보다 큰 문제는 실지로 모든 것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음에도 구하고 질문한 것처럼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전혀 변하지 않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하여 찰라생멸(刹那生滅)을
설명해야겠네요.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은 언뜻 보기에는 언제나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패순간 마다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입증하고 있이, 물질을 이루는 분자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다시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또한
양성자도 무수한 소립자로 되어 있는데
이 수립들이 매순간 마다 생성과 소멸과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소립자들
전형적인 생명의 기간(10-23초)을 부처님께서는
'찰나' 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 사물을 관찰할
때 긴 시간을 두고 관찰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관찰하며 전체적으보지 않고 부분만을
보고 판단해 버리기 때문에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뿐입니다. 그러나 십
년 전에 혹은 십 년 후에 학교 건물이나
책상을 본다고 한다 분명히 변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살이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열흘밖에 살지
못하는 곤충이 춘하추동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다시 말하면 무상하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으로 변화 발전시킬
수 있고, 또한 시각 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한 순간도 소홀하게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이란 낱말의 불교적인 해석은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비관적으로 자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실체를
똑바로 인식하고 현실을 보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유한의 생명에서 무한의 가치를 찾아내자는
데에 더 큰 목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생활
속의 불교어/ 대장부(大丈夫) 이봉춘
/ 불교문화대학 교수
사나이답고
씩씩한 남자,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서
기개가 높은 사람을 흔히 대장부라고 한다.
헌헌장부(軒軒丈夫)라는 말도 쓰인다.
풍채와 의기가 당당할 뿐만 아니라 인품
또한 너그러워 인색하지않은 남자가 곧
헌헌장부이다. 본래는 외모가 준수하고
키가 1丈이 되는 사람을 장부 혹은 대장부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 자의(字意)에서 드러나듯이,
대장부의 조건은 물론 너그러운 인품을
갖추어야하지만, 일단 외모와 풍채가 중요한
조건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대장부위이미지보다는 터프가이(tough
gay)를 더욱 선망하는 듯하다 터프가이는
우선 억세고 완강한 이미지를 풍긴다.
그래서 불요불굴(不搖不掘)한 사람, 불사신(不死身)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역시 사나이답고
씩씩한 남자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대장부가 지니는 인물.인격의
의미는 많이 약화되어 있음을 느낀다.
젊은 세대들이 인품. 인격과 같은 내면의
덕목은 생략하고, 우선 눈에 띠는 외모와
강인하고 야성적인 행동에 쉽게 사로잡히는
경향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런
대장부 또는 터프가이와는 또 다른 의미로
쓰이는 불교어로서의 대장부가 있다. 바로
보살과 붇다를일컴는 말이다. 구사론(俱舍굻侖)에는
「삼십이 대장부의 상(相)」 이라는 말이
보이고, 화엄경에는 「만약보살이 이 법에
머물면 곧 대장부의 명호를 얻으리라」고
설해져 있다
삼십이상이란
보살이나 붓다에게 갖추어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32종의 뛰어난 신체상의 특징을말한다.
그런 모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만한 생각 그만한 행을 실천함으로써
갖추어지게 된 덕상(念相)이다. 붇더나
보살의 특상은 그만큼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내용이 뒷받침된 훌륭하고 거룩한 모습이다.
이와 같이 거룩한 모습을 지닌 위대한
사람, 또 진리에 머물러 사는 사는사람이
곧 대장부인 것이다. 또 붓다의 특징을
드러낸 열 가지 명호 가운데에도 조어장부(邑同御夫)라는
이름이 있다. 자기를 잘 조절하고 제어하는
인격, 자기를 이긴 사람을 뜻하는 이름이다.
진정한
대장부란, 그냥 씩씩하고 기개가 높은
사나이나 근육질과 야성을 뽐내는 람보
형 터프가이가 아니다. 위대한 덕성을
갖추고 진리에 머무는 사람, 또 자기를
잘 조어하는 사람,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런 사람을 불교에서는 대장부라 한다.
불자탐방/ 김병식
교수님 편집부
새봄을
맞아 교정의 색은 나날이 싱그러워지고
있으며 우리들의 모습도 답답한 겨울의
모양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생기넘쳐보인다.
모든 것이 역동 하는 봄인 것이다. 학교의
임직원들도 새학기에 맞추어 보직이 일부분
바뀌었다. 이번에 정각도량에서는 지난
삼월 새로 과학관장이 되신 화공과 김병식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교수님은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시었다- 어제 출장에서 늦게 돌아오셨다고
하는데도 피로한 기색이 전혀 없이 맑은
얼굴로 71자를 대해 주셨다. 학교의 과학
기자재들을 총괄하게 된 김병식 교수님은
학교와 사회에 봉사하라는 뜻으로 여기고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보직을 맡게 된
소감을 전하셨다. 교수님은 50의 인생에서,
이제는 사회에 회향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소임을 보고 있으니 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셨다.자상하게 우려주시는 따뜻한 직설의
향기가 교수님의 따뜻한 정과 함께 더없이
향기로웠다.
교수님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시절 할아버지
방에 걸려 있던 반야심경을 보고는 그
뜻을 묻곤 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불교에
인연이 맺어졌다. 교수님은 그 후 79년도부터
동국대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는데,
바쁜 와중에 종교에 대하여 잊고 지내다가
82년도에 문득 초발심이 일어나셨다. 교수님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 삶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고 하신다
교수님에게 있어 불교는 매순간을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며 또한, 전공 분야의
연구와 강의에도 많은 도움을 주는 좋은
스승이다. 교수님의 전공인 화학공학의
열역학이라는 과목에서는 불교를 통하여
에너지에 대한 대답을 보다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교수님은 불교를
이해하면서부터 우주 에너지의 흐름이
양방향이라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고 나아가 환경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교수님은 통도사
개산대재에서 환경문제를 강의한 적도
있으신데, 절약이 환경을 보호하는데 최선이라는
게 교수님의 견해이시다. 이번 우리 학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절약운동도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부터 절약의
필요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구된다고
덧붙이셨다.
교수님은
아침 일찍 불교방송에서 시작하는 예불을
같이 하고 경이나 염불 등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하신다. 번뇌와 망상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수님을 찾지만 그럴 때마다
순간적으로 생각을 바꾸어(교수님의 독창적인
용어로 'switching' 이라고 한다) 곧 평정한
마음을 되찾곤 하신다. 교수님은 늘 수행자적인
마음으로 항상 의식을 집중하여 느끼려는
자세를 갖고 계시다고 하셨다. 곧 모든
것을 내부로 향하게 하여 마음을 단전
밑으로 모으는것이다. 처음에는 명상비법이라는
책중에'소리속으로 들어가라'는 방법을
따라서 했는데 좋은 결과를 보셨으며,
전동차 속에서 하는 연습도 그 효과가
좋다고 자랑을 하셨다. 교수님은 언젠가
수덕사에서 신임교수 수련회에서 참선을
하던 중 큰 기쁨을 맛보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매년 참석하고 싶다고 하셨다.
태고종 봉원사에 들어가 살짝살짝 도둑예불을
보기도 하시는 교수님이시지만 이른 아침
정각원에서의 좌선이 교수님께는 제일로중요한
일과요, 기쁨이라고 하셨다.
김병식
교수님의 좌우명은 ''생사문제를해결하라''이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실천하는데 있어 항상
화두처럼, 과학자가 풀어야 할 숙제처럼,
언제나 이 문제를 가장 우선시 한다고
하셨다. 세 아들의 자랑스러운 아버지로서
교수님이 갖고 계신 가훈은 '맑고 큰 세계를
깨달아라'이다- 맑고 큰 세계란 무엇일까?
깨달음과 세상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교수님의 모습을 뵙는 순간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 진리를 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수행자로서의 마음이 곧 보살의 마음이며
맑고 큰 세계를 깨달은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학교와 학생들에 대한 몇 가지
바람들을 말씀해 주셨다.첫째, 우리 동국대학교가
좀더 다양화된 가치관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수용력과
포용력을 갖고 있어야 진정한 종합대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특히 서양의 가치관에
대한 개방이 필요하다, 불교대학이라는
한계선을 넘어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사회에
비추어질 때, 오히려 불교의 이념이 더
자연스럽게 전달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와 연결된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사회교육원의 확대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있다.
둘째로
산업사회에서의 자리매김을 위하여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강화 해야한다. 우리 학교의
취약점은 과학이다. 이과와 공과쪽을 강화시켜야
전체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렇게
이루어진 학문적 조화는 이 땅의 불교가
산업사회에 잘 조화될 수 있도록 지원해줄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종합대학으로서의
우리 동국대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인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의 우수한 연구논문,학문적
결과물들이 결국 동국 대학교와 불교의
역할을 확대해 나가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투자와 노력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돈독한
신심과 학문적 열정 속에서 환희를 찾으시는
김병식 교수님과의 대화에서 기자는 동국대학의
미래상을 볼 수 있었고, 불교와 학문의
미래까지 엿볼 수 있었다. 화창한 봄날
오후, 교수님과 인사를 하고 나오는 건물
밖의 교정이 더욱 더 활기차게 느껴지는
건 괜한 생각일까? 성불하십시요.
가람의
향기/ 만덕산 백련사 편집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는다는 남도땅에서
일조량이 제일 많기로 알려진 강진은 북쪽에는
월출산, 남쪽에는 구강포와 바다가 펼쳐져
남도 특유의 온화하고 아기자기한 자연
풍광이 넘실대는 곳이다.
백련사는
전남 강진에서 남서쪽으로 약 7km지점.
해남을 향해 18번 국도를 달리다 학명리에서
왼쪽으로 병 향을 틀어 조금 더 가면,
바다 물결이 출렁이는 해창마을에 서부터는
만덕리의 백련사 입구를 지나고 다산초당을
지나는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백련사는
아담한 만여산의 우거진 수림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종이배 같은 어선들이 너울처럼
떠도는 강진만을 굽어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오롯하게 자리하고 있다. 산사(山寺)이자
해사(海寺)인 백련사에서는 만덕 산과
강진만 바다가 빚어 내는 정취를 모두
맛볼 수 있고, 나아가 다산(茶山) 정약용의
유배처로 알려진 다산초당을 답사한 다음
만덕선 허리춤을 가로질러 백련사에 이르는
길을 잡았다. 다산초당이 가까이 있어
다산의 올곧은 숨결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답사의 순서는 다산초당(사적 제107호)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순조18년)에 이르는
18년의 유배생활 가운데 10년을 지내면서〈목민심서〉.〈흠흠심서〉.〈경세유표〉를
비롯한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와 사상을
이루어 낸 곳으로 그의 학문이 결실을
맺게 되어 다산학의 산실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초당 앞에는 천일각이라는 작은
정자가 바다를 향해 세워져 있다. 정약용
유배시에는 천일각 건물은 없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며 바다를
바라보던 자리에 후대 인들이 새로 세운
정자다.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만덕선 허리춤을
세 굽이 가로질러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은
40여 분이면 다다른다. 이길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시절 인간적.사상적 영향을 적지않이
서로 주고 받았던 백련사 혜장스님과 서로
왕래하며 유(懦)와 불(佛)의 경계를 허물고
교유하던 길이라 한다. 산허리를 돌아오르면
강진만이 아스라히 바라보여 산책길로도
그만이다.
백련사는
839년(신라 문성왕 1년)선종의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보령의 성주산문을 개칭한
무염선사(無染禪師)가 창건하였는데 초기
절 이름은 만덕사였다. 이후 고려 후기인
1211년(회종 7년)에 원묘극사(圓妙國師)
요세가 천태종 백련결사의 터전으로 크게
중창하여 수도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자
이때부터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조계종의
정혜결사(송광사)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의
결사운동에서 양대 갈래를 이루었던 것이다.
불교가
숭상되던 고려시대, 교학적 지해만을 주장하는
화엄종이나 실천만을 강조하는 선종을
조화롭게 통합하려 한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1101년(고려 숙종 6년)에 천태종(天台宗)이
개립되자, 그 천태종의 정신을 계승한
원묘국사는 '신라의 옛 절집 만덕사를
보수하여 이 절을 천태종의 도량으로 경영하였다.
그는 몽골의 침입을 피해서 찾아온 유생
몇 명을 입문시켜 묘법연화경을 가르친
후 '보현도향(普賢道場)'을 열어 수행의
체계를 세웠다. 그가 대중들에게 죄를
참회하고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수행참회
행을 설하자, 이에 발심을 일으킨 대중이
1,000여 명에 이르고 운동에 참여한 토반이
300여 명에 달하니, 그것이 바로 백련결사이다.
그 후 120여 년 동업 백련사는 8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등 결사의 중심으로 번창하였다
한다.
하지만
고려'말 강진 지방에 왜구가 세 차례나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을 때 백련사는
폐허화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조선시대에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행호선사가 왜구의
침입에 맞서 토성을 쌓고 복구를 하는
등 여러 차례의 중수를 하였는데 그때
쌓은 토성이 행호토성이다.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8명의 대사를 배출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그 가운데 여덟번째가 바로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던 혜장선사 아암으로
그는 현재 대둔사 쪽에서 12대 강사로
꼽힌다. 바다가 가까운 백련사는 침입한
왜구들에게 큰 피해를 입기도 하고,화재로
인해 건물이 불타 버리기도 하며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다. 현재 백련사는 대웅보전,만경루,응진전,나한전
.시왕쥔 .칠성각,요사체 등으로 매우 단촐하게
이루어져 있다. 절맨 앞에 만경루가 있고
그뒤로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몇채의
당우들이 나란히 이웃하고서 언덕에 줄지어
서 있어, 옛날 80여 간에 이르렀다던 대가람은
그 자취만이 아련하다.
정면
3간 측면 3간의 팔작지붕 다포집인 대웅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36호)은 영조때 화재를
입어 다시 세워진 건물이다. 지붕의 네
귀를 활주가 받치고 있는데 현판은 조선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구불구불하고
우물우물한 듯한 그의 필체는 서예를 모르는
사람도 쉽게 눈늘 돌리지 못하게 하는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만경루는
백련사에서 꼭 들어가 보아야 하는 곳이다.
누마루 안 창문 위에는 만경루와 백련
결사라고 씌어진 헌액 두 점이 시선을
끄는데 만경루라 씌어진 굵고 힘찬글씨는
원교 이광자의 동국진체풍 글씨다. 누마루에
앉아 절 아래로 트인 강진만 바다를 내려다보노라면
백련사에 오르는 동안의 모든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짐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절 마당을
벗어나 명부전 쪽으로 가면 이 절의 깊은
역사와 내력을 전해 주는 백련사사적비가
서 있다. 백련사사적비는 1681년 (숙종7년)에
만들어졌으나 아래 위의 돌거북과 머릿돌은
고려시대의 것이라한다. 백련사의 자랑은
무엇보다도 천연기념물(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인데,백련사 만경루를 빙돌아
앞마당으로 내려오면 3,000여평에 달하는
숲 안에는 조선시대의 부도 네 기가 숨바꼭질하듯
흩어져 있다.
비유와
설화/ 목건련의 효성 조용길
/ 불교대학 교수
옛날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부처님의 제자인 목건련은 신통력이
제일 가는 제자였고 부모에게 극진한 효자였다.
목건련은
돌아가신 부모를 천도하여 깊은 은혜를
갚으려고 천안으로 자세히 살펴본즉 그의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죄를 많이 지은
탓으로 아귀 지옥에 가 나서 음식 구경을
하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목건련은 가슴이 터지는 듯 슬퍼하면서
절에 돌아와 발우에 한 그릇의 발을 담아다
올렸더니 어머니는 밥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누가 빼 앞아 먹을까 두려워하면서 왼손으로는
밥그릇을 가로막고 오른손으로는 밥을
집어 먹었다. 그러나 밥알이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불덩이로 변하여온 몸이 이글이글
타기만 하고 밥은 한 알맹이도 먹지 못했다.
이
정경을 본 목건련은 큰 소리를 내어 울면서
부처님에게로 뛰어와서 이런 사연을 아뢰고
세존께 구제해 주시기를 청했다. 이때
세존께서는 그를 가엾이 여기시고 말씀하셨다.
''목건련아,
너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에 간담하고
살생하고 삼보를 비방하여 죄를 많이 지었으므로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시방에 있는 대중 스님을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그의 도력을 빌려야 너의
어머니가구 무서운 죄보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내가 너의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을
일러줄 터이니 그렇게 하여라.''
목건련이
울먹이면서 그 구제 방법을 묻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목건련아.
7월 15일에 여러 가지 공양 거리와 과실이며
진수 성찬을 자배기에다 담아 시방의 대중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면 그 스님들이 결제 때에
공부한 도력을 베풀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부모와 이미 사망한 7대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육친(六親) 권속들을 천도하여 삼계(三界)의
고통 바다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렇게 공양을 올리더라도
이 세상에 있는 부모는 백세 장수하여
복락이 구족하고 7대 선망 부모는 천상에
가 나서 한량없는 복락을 받을 것이다.''
불심의
창/ 나의 불연(佛綠) 이권학
/ 사범대학 교학과
4월,
산에는 개나리, 진달래, 벚꽃으로 수를
놓아 완연한 봄을 느낀다, 따스한 봄볕과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겨워 가둬두었던
마음의 병이 고개를 든다.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중학교 시절 아침부터 이어지는
수업, 도시락은 이미 2교시 후 위장의
채근에 끝장을 보았고 나른한 졸음이 오후에
쏟아진다. 제어하기 힘든 졸음 속에서
맑고 푸른 하늘에 솜사탕 같은 기기묘묘한
구름이 창밖으로부터 포착된다 불현듯
떠오르는 상념들. 저 하늘 끝은 어디일까,
거기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저 공간은
끝이라는 게있을까, 우주의 크기는 얼마나
될 것인가.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 존재에
대한 왜소함,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마저도 허무하게 느쪄진다. 당시'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가는가'와
같은 생각들에 곧잘 빠지던 나는 너무
가볍다는 극도의 상실감으로 전율하던
때가 생각난다. 예민한 성격에 완전주의자였던
나는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대체 다른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계기가 되었다. 진실로 내가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이러한 갈증 때문이었다.
생활
속에서 불교를 자연스럽게 접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다. 그 보다 어릴 적 평생 염주를
가까이 하며 살았던 할머니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있지만 어머니의 맹목적인 믿음에서
감응을 많이받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던 어머니 덕분에 아직까지 집에서
싱싱한 고기는 상위에 오른 일이 한 번도
없다.한번은 할아버지와 분가해 살던 중
할아버지가 집에 오셨을 때의 일이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어머니에게는
가장 어려운 분이 오는 것이어서 궁리
끝에 살아있는 닭을 한 마리 시장에서
사오셨다. 닭을 잡기 위하여 아버지가
시도하였지만 끝내 실패하였고 그 닭은
네 개로 넘겨졌다. 눈감고 해버리지 하고
덤볐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끝내
실패하였다. 한바탕 소동 끝에 옆집아저씨에게
부탁하여 결국 성공하였지만 어머니는
그 일로 며칠 마음 상해하였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살생을 하게 하였으니계를 지키지는 못
하였지만 그 때의 인상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순천에서
자란 나는 주변에 송광사,쌍계사, 선암사
등 큰절이 있어서 당시 불교에 귀의 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놀러 가게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귀동냥으로 조금 익히게 되었다.
송광사와 선암사 사이로 난 그리 험하지
않은 등산로를 따라 걸으며 삶에 대해서
진지한 고vl을 하기도 하였다. 대학에
진학하여 불교를 좀더 쉽게 접할 수 있게되었으며,
수련회를 통하여 1000 , 좌선, 법회, 명찰순례
등의 신행활동을 하게 되었다. 대학 시절
친구기절에 기거하고 있어서 자연히 발걸음을
자주 하게 되었고 몇 분의 스님들을 알게
되어 좀더 가까이서 사찰 생활을 익힐
수 있었다. 불교에 막 눈을 뜬 시절이라
불교는 무조건 절에 가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 닦는 것이라 하여 교만한
생각이 지배하였다. 사실 중국 선종의
제2조인 慧可의 구도자적 정열, 제 6조
慧能의 일화 등이 감성을 자극하던때였다.
또한 일상의 형식논리의 틀을 깨뜨리는
옛 禪師들의 활달무애한 破格은 적지 않은
파장으로 다가왔고 보살님들이 불공드리는
모습에서 기복 적이고 무지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무애자재한
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불교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한깊이 있는 분석을
하며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체계보다 정교한
사유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천이
수반되지않고서 이론이나 머리로만 받아들인다면
고매한 양성을 빙장 한 이기적 정신주의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불교인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까. 한때 불교를
다 아는 양교만한 마음 없지 않았으나
갈수록 斯去의 哲理가 거대한 산처럼 느껴진다.
번뇌.업.고.식.무상.무명.열반 등 좀처럼
알기 어려운 용어들을 지금까지 머리로만
이해하려 하였기에 난해하기 그지 없었다.이제는
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불교를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불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어떻게
더불어 사는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지금도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나
불편한 몸으로 구걸을 하는 이를 보노라면
세상의 불공평함에 편지 우울하다,그럴때면
잠재되어 있던 물음이 허무감에 사로잡힌다.
아마도 일상의 바쁜 생활 가운데 이러한
의문과 허무감은 계속 따라 다닐 것이다.
불교와
인연을 맺어 준 질문들은 부질없는 세속적
욕망과 교만함에 빠지지않도록 나를 잡아주고,
그 상태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위안과
편안함을 준다 대저 사람의 몸 받기 어렵고,
불법만 나기 어려운데 마치 龜木에 비유되는
불교와의 자중한 인연을 생각하며. 부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겠다고 맹세를 하지만
세속적 욕망의 이끌림에 여지없이 흐트러지는
내 자신을 돌아본다. 비록 지장보살의
서원에는 미치지 못할지나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것이 재가불교인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열림마당/ 삼국유사와
대학 이미지 제고 박장승 / 경주도서관
열람과 계장
몇주일
전에 포항 MBC로 부티 전화를 한 통화
받았다.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에서 선생님을 소개받고
전화를 드린다''고 하면서 ''삼국유사
원본을 꼭 좀 보아야겠는데 귀 도서관에
삼국유사 원본이 있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삼국유사
원본은 경주에서는 구경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 귀중한 책을 무엇
때문에 보려고 하는지''를 물어 보았다
''저희
방송국에서 특집 프로그램을 하나 제작하려고
하는데 삼국유사 원본 내용을 꼭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典籍 交化財 중의 하나인 삼국유사.
거무스름하게 퇴색된 탁종이(椿紙)에 먹흔이
뚜렷한 木板本으로 된 삼국유사 원본 내용을
카레라에 담으려는 PD의 욕심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불교를 건학이념으로
살고 있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 一然
스님(高麗, 1206-1289) 撰한 삼국유사쯤은
당연히 소장하고 있어야 되는 건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
도서관에는 원본은 없고 꼭 원본의 내용을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면 소장자와 수장처를
알려 주겠으니, 한번 찾아 가보라. 그렇지만
찾아가도 구경하기가 힘들 것''이라 하면서
''우리 도서관에 꼭 같은 원본을 影印한
삼국유사가 있으니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더니''그렇게라도
하겠다''하면서 ''언제 방문할 테니 좀도와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도서관에
근무를 하다 보면 외부에서 자료 열람을
요청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특히 TV방송국에서
카메라에 원본 자료를 담기 위해 자료
열람을 요청할 경우에는 동국대학교에
근무하는 직원의 한 사람으로서 담당 PD에게
''우리 대학도서관자료를 열람, 이용할
때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명패가 박혀
있는 교문과 도서관 건물을 한 컷 꼭 넣어
달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 지역사회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가
자연스럽게 소개되고 소개됨으로써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의 이미지를 제고하는데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소박한 욕심에서
말이다.
삼국육사
원본만 있다면 이 귀중한 자료를 열람시켜
주는 대가로 담당 PD에게 이러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료를 열람시켜 줄 수
없다고 강짜를 부릴 수도 있지만...
10여년
전 일로 기억된다.
경주
시내에서 고서 나까마(중개상)를 하는
사람이 도서관을 찾아와서 목록을 하나
내어 놓으며''이 책(고서)을 도서관에서
사지 않겠느냐?'' 하는것이었다. 얼른
보니 그 목록 속에서 삼국유사(삼국유사는
총 5권으로 되어 있고 9개의 篇目으로되어
있음) 1권과 함께 80여권 정도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록만 가지고 와서야
되겠느냐? 책을 갖고 와서 이야기를 하자''하고
돌려 보내고 초조하게 며칠을 기다렸다.
며칠 후 다시 그 중개상이 나타났을 때
그 목록 속에 삼국유사 1권은 두 줄로
지워져 있었다. 때는 늦어 버렸다 그때
그 중개상과 바로 시내로 나가서 책을
들고 왔어야 되는 건데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보물 1점이 동국대학교 경주도서관으로
들어오는 것을 놓쳐 버렸다.물론, 그때
기억으로는 그 당시 거래하던 고서값보다는
좀 비싸게 달라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여러
책 속에 있는 삼국유사의 가치를 그 중개상은
모르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후
몇 개월 지나서 이야기를 들으니 대구에
있는 한 愛書家가 그 책(삼국유사 1권)을
들고 가버렸다는 것과 그 삼국유사가 전체
5권 중 2권째紀異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이
흘러 3,4년 전에 그 삼국유사가 전적문화재의
가치를 한껏 자랑하면서 서울캠퍼스도서관에
나타났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문화재가
재화의 가치로서 비교할 수도 없고,또
비교해서도 안되지만 그러나 그 삼국유사가
재화로서의 가치가 너무나 비싸서 동국대학교로
돌아오는 데는 실패했는데, 학교 당국의
정책적 배려가 아쉬웠다는 생각이 든다.
1544년(명종
9년) 魚,謝釐이 편찬한 「故事攝要」慶)
冊板目螢栗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삼국유사
책 판이 경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틀림없이 그 책 판으로 경주에서 편찬한
책이리라 생각된 임진왜란 때 경추부에서
보관하던 많은 책 판들이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고사촬요를 보면 경주에서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많은 책 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책판이
있었다는 것은 그 책 판으로 펴낸 책도
있다는 것이다. 一然 스님이 말년에 禽죵贈寺에
기거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살국유사,
김부식의三國史冒已 성현의 '蕎齋吝話,
이 제현의 益齋僑院直, 宋構輝算法,..
이 귀중한 전적들이 경주에서 판각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불행하게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경주에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삼국사기는
옥산서원에 있음몌다,
지방화시대에
있어서 대학이 지역사회 문화발전의 중추기관으로서
전적문화재를 발굴 수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일 것이고, 이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때, 대학의 이미지는 자연히 제고될 것이다,
고사촬요 경주부 책판목록에 나오는 전적들은
모두다 문화재급들이다, 이런 전적문화재는
특히 문화유산의 해인 올해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크게
기여할 전적들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대학
당국의 정책적 배려 속에 지금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고사촬요 졈주부 책판목록에
나오는 전적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발굴
수집해서 지역사회에 소개, 전시하고 매스컴
화한다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의 이미지는
한층 더 높아질 것이다.
우리나라
많은 대학들은 도서관을 중심으로 않은
전적문화재를 가지고 있고 또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더구나 대학 무한경쟁시대에
접어든요즘, 그들이 갖고 있는 전적문화재를
소개, 전시하고 매스컴화해서 대학의 이미지를
높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특히 학생들과 현업에서 직접
부딪히는 열람과에 근무하면서 학생들끼리
자조 섞인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재학생으로서의
긍지보다는 편입시험 공부라도 해서 타
대학으로 도망가려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사실 동국대학교에 종사하고
있는 한 구성원으로서 대학무한경쟁시대에
어떻게 하면 대학의 이미지가 재 -고됩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대학의 이미지를
한 단계 레벨 업 시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구성원 개개인이 창 의력을
갖고 학교 발전을 위해 열심히 고민을
하 면 틀림없이 결과가 좋아지리라. 학교가
일류가 되어야 거기에 종사하고 있는 구성원도
일류가 되지 않겠는가,
불교건강법/ 눈은
마음의 창 김장현 / 서울캠퍼스
보건소장
눈은
우리 몸에서 하늘의 해나 달과 같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듯이 눈에는 그 사람의 정신이
깃들여 있다. 또한 우리 눈에는 오장육부의
모든 정기와 혈관이모여 있다. 눈의 광채로
장부의 허와 실이 표현된다. 관상학에서도
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는데,
심신이 건강하고 정신력이 뛰어난 사람은
눈이 맑고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몸
속의 장부 가운데 눈을 주관하는 장기는
간이다. 따라서 간이 피곤하면 눈이 쉽게
어두워지고 간이 건강한 사람은 눈이 윤택하고
맑은 법이다.
사람의
동공은 정기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검고 윤택해야 한다, 눈동자는 신장의
기능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며 오행상 水의
기운에 해당된다.
물은
깊을수록 검은 법이다, 따라서 신장이
튼튼하여 수기가 왕성하면 눈동자가 검고
빛이 나며, 이런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지혜가 깊고 정신력이 강하다. 반면에
신장의 기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정수가
결핍되어 눈동자가 흐리고 연하며 기가
허하다.
눈의
검은자위는 간의 정기가 집약된 곳으로
오행 상 木의 기운에 해당된다. 나무는
물을 만나야 싱싱하게 자랄 수 있으므로,
간의 기능이 왕성하면 검은자위가 윤택하고
푸른 강물과 같이 깊고 맑다. 그러나 간의
기능이 좋지 않은 사람은 검은자위가 어둡고
탁하여 흐린 물과 같은 형상이 된다.
눈의
흰자위는 폐의 정기가 집중된 곳으로 金의
기운에 해당된다. 따라서 폐가 튼튼하면
흰자위가 희고 깨끗하다. 그러나
흰자위가 누렇게 변한 사람은 폐에 습한
기운이 차 있을 가능성이 높고,붉게된
사람은 폐에 열이 차 있기 때문이다.
눈의
양쪽 끝을 내자, 외자라고 하는데 심장의
정기가 모인 곳으로 오행 상 火의 기운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약간 붉은
기운을 띠고 있다. 내외 자에 눈곱이 많이
끼는 사람은 심장의 기능을 점검해 보는
것이 좋다,
안검은
비장과 위장의 정기가 집중된 곳으로 오행
상 土에 해당된다, 안 검은 단단하고 탄력이
있어 늘어지지 않아야 좋다. 아래위 안김에
다래끼가 잘 나는 사람은 비위장애 열이
있거나 기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대개
눈병의 원인은 火熱이 된다. 뜨거운 음식을
너무 즐긴다던가, 열기에 오래 노출되거나,
어두운 곳에서 눈을 너무 혹사시키거나,
장기 바둑을 오래 두면서 눈을 너무 집중
시켰을 때, 술과 성생활이 지나치는 등이
눈에 손상을 주는 원인이 된다.
눈을
튼튼하게 하려면 눈을 감고 상하좌우로
원을 그리듯이 돌려주는 운동으로 혈액의
순환을 촉진하고, 눈의 바깥 쪽 관자놀이
부분을 지압하여 자극하고, 눈을 감고
안김 위를 부드럽게 마사지해주며, 양손
바닥을 서로 비벼서 열을 낸 뒤 감은 눈
위에 가볍게 눌러 주는 방법을 쓴다. 아래
위 안검에 다래끼가 나려고 하면서 가려우면
양 내자 외자의 양쪽 바깥 부분을 눌러
문지르면서 자극을 주면 염증으로의 진행을
막으면서 치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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