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의 창
선(善), 그 육중하지만 경쾌한 이름
박인성/ 불교학과 교수

 

정신과 영혼은 근대 이전에 우리에게 있었던 말이 아니다.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양의 용어들이다. 우리에게는 마음과 몸이라는 토박이 말이 있다. 이 말은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용어로 해석될 수 없다. 서양의 영혼은 순결한 영혼이고 육체는 타락한 육체이다. 육체는 늘 타락해 있고, 영혼은 늘 순결하다. 그러나 마음과 몸은 그렇지 않다. 마음과 몸을 영혼과 육체로 자주 해석해서 사용하니까 이 용어들을 빌어 마음과 몸을 해석해 본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타락한 육체에 타락한 영혼, 순결한 육체에 순결한 영혼. 쓰고 보니까 육체, 영혼, 타락, 순결 같은 말들은 몸과 마음을 해석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우리는 몸과 마음 같은 우리 토박이 말보다는 육체, 영혼 같은 서양에서 수입된 말들에 더 친숙하니까, 다시 이를 써서 바꿔보면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겠다. 마음은 영혼처럼 순결하다. 그러나 육체처럼 타락한 것이기도 하다. 몸은 육체처럼 타락한 것이다. 그러나 영혼처럼 순결한 것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을 이렇게 이해하려면 우리가 참 자주 사용하는 선(善)이라는 말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 특히 불교계에서 이 선(善)은 불선(不善) 또는 악(惡)과 맞짝 개념으로 많이 사용한다. 불교계의 많은 사람들이 선과 악도 영혼과 육체처럼 이분법적 개념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이분법? 선은 항상 선이고, 악은 항상 악이다. 조금 전에 말했듯 영혼은 항상 순결한 영혼이고 육체는 항상 타락한 육체이다. 항상 자기가 선(善)하다고 외치는 사람, 그리고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 남은 항상 악(惡)하다 외치는 사람을 떠올려보라. 미국의 대통령 부시! 아니면 대통령 부시를 뒤에서 밀어주는 무리들. 부시는 외친다. “미국의 대통령인 나 부시와 미국은 항상 선하다. 악의 축인 나라들이 있다. 그들은 항상 악하다.” 이런 부시를 추종하는 세력은 미국에만 있지 않다. 이 서러운 한반도 땅에도 있다. 삼일절이나 광복절이 되면 반미정권, 친북정권 하며 시청 앞 광장에서 할복할 듯 외쳐대는 무리들, 부시를 위해 기도하는 무리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내 마음 속의 이분법적 선과 악이 바깥으로 드러나 제도화된 것일 뿐이니까. 그들을 비난하는 나 또한 얼마나 나를 추켜세우고 얼마나 남을 깔보았던가?)

불교의 선(善)과 악(惡)은 서양의 이분적인 선과 악 개념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선(善)은 ‘착할 선(善)’이 아니다. 선은 단순히 선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이 ‘착할 선’이라면 이른바 착한 사람은 악한 구석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악한 구석이 없을 수 없다. 선(善)은 ‘착할 선(善)’으로 이해되어서 안 된다. ‘좋을 선’, ‘능할 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선(善)은 산스끄리뜨 ‘kusala’의 한역이고 불선(不善) 또는 악(惡)은 ‘akusala’의 한역이다. 몸과 마음에 좋다, 적절하다, 몸과 마음의 해탈에 좋다, 적절하다는 의미이다. ‘kusala’에서 파생된 ‘kausalya’란 말이 있다. ‘선교(善巧)’라고 한역되는데 ‘능하다’, ‘능숙하다’는 말이다. 몸과 마음에 좋은 것은 내가 능숙하게 이 좋은 것을 다스려야 좋은 것이다. 가령 나한테 맞는 음식이 있고 맞지 않는 음식이 있다. 그러한 음식이 좋고 좋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한테 맞는 음식을 먹고 지나치지 않게 먹을 때 좋은 것이다. 다시 말해 나한테 맞는 음식에 능해야, 능숙해야 좋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한테 맞는 음식에 능숙하지 않다는 것은 나한테 맞지 않는 음식을 먹거나, 설사 나한테 맞더라도 지나치게 먹는다는 데서 알 수 있다. 능숙함은 훈련, 단련을 필요로 한다. 마치 소리하는 사람이 그 각양각색의 소리를 다스려 얻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하듯이. 마치 피리부는 사람이 그 피리의 다양한 음색을 있는 그대로 얻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듯이.

그래서 득음(得音)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듯 우리에게도 득도(得道)란 말이 있다. 마음을 닦아가는 길은 좋음과 능함을 얻어가는 길이다. 좋음과 능함을 얻었을 때 우리는 선하다고 한다. 좋음과 능함을 얻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불선(不善)하다고, 악(惡)하다고 한다. 좋음과 능함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데서 나오고 그러한 들여다봄 자체가 좋음과 능함이다. 얼마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가 어려우면 들여다봄을 좋음과 능함이라 했을까?

음란물을 보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혼나기에, 벌을 받기에 좋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 몸에 좋지 않기에 좋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좋지 않은가? 음란물을 보면 또 음란물을 찾게 된다. 음란물에 집착하게 되어 내 마음의 음란한 생각에 끌려 행동하게 된다. 내 마음에 일어나는 음란한 생각을 보고, 다른 생각들을 보아야 하는데 음란물을 집착하게 되어 음란한 생각과 다른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 그래서 선하지 않다고 한다. 음란물을 보면서 몸의 기운이 헝클어지게 되어 기운을 다스릴 수 없다. 이렇게 기운을 헛되이 발산하기 때문에 사랑의 행위에 공허한 환상을 품을 수 있다. 그래서 선하지 않다고 한다.

술을 찾는다. 술맛을 알았기에 술을 찾는다. 찾고 또 찾는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일어날 텐데 다른 좋은 생각들이 일어날 틈이 있겠는가? 술과 담배는 그래도 음란물보다 나을 지도 모른다. 술과 담배는 해보고 나서야 비로소 찾는데 음란물은 그렇지 않다. 남자가 여자를 찾고 여자가 남자를 찾는 한 우리는 음란물을 찾을 것이다. 태어날 때 받는 성적 욕구, 나의 유전자를 내가 죽더라도 영원히 남기고 싶다는 욕구, 그 욕구가 음란물을 찾게 한다. 음란물이 없었을 때도 이미 음란물은 있었다. 음란물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음란물을 찾고자 하는 성적 욕구를 이미 태어날 때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육체를 다스리자. 육체를 사랑하자. 이 영혼한테 버림받는 육체를 몸이라는 이름으로 회복하자. 애초에 청정하지도 않고 청정하지 않지도 않은 이 몸이 장구한 세월 청정하지 않은 몸이 되었다. 이 청정하지 않은 몸을, 장구한 세월 부처님들의 도움을 받아 청정하게 된 몸에 의지해 본래의 청정한 몸으로 되돌리자. 본래의 청정한 몸은 이미 우리 속에 간직되어 있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부처님들이 우리를 늘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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