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 마음의 항복이 해탈 이법산 스님/ 선학과 교수
세상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려면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마음을 항복 받는다면 모든 일에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와 행복을 갈망하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줄은 알지 못한다. 하는 일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세상을 답답하게 생각하고 남을 원망하지만, 짐짓 답답하고 어리석은 것은 자기 자신임을 깨닫지 못 한다. 마음이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은 누구와도 시비가 끊어지고 어떤 일이든 싫어하거나 무엇이든 미워할 것이 없다.
부처님의 마음에 행복을 주는 자비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은 마음에 일체 번뇌가 끊어져 열반을 증득했다는 것이다.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은 중생이 자기 마음을 항복 받아 마음의 모든 갈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마음이 자비라면 중생의 마음에도 자비가 있다.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중생의 마음에는 미움과 사랑이 있어 미움을 싫어하고 사랑하는 자에게만 자비를 베풀지만, 부처님의 마음에는 미움이 없어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는 아름다운 마음만 있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이에게 자비를 충만하게 하여 행복과 자유를 찾아가게 한다. 중생도 그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되고 그 마음에는 자비의 마음이 충만하여 자유롭고 행복해진다.
부처님의 마음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오직 자비로 충만하여 자유와 행복을 느끼며 베풀 수 있지만 중생의 마음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만과 불평으로 성내고 어리석어 고통스러운 속박과 불행에 시달리고 있다.
결국 자기의 마음을 자신이 항복 받아야 한다. 깨달음이란 자기 마음의 항복이다. 모든 불행과 고통은 마음대로 되지 않음에서 온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고 싶거든 자기 마음을 항복 받으면 즉시 자유롭고 행복해 진다.
『금강경(金剛經)』에서의 수행법은 「항복기심(降伏其心)」, 즉 그 마음을 항복 받는 것이다. 그 마음을 항복 받는 방법으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마음이 차별상에 묶여 대상의 노름에 놀아나면 해탈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며 불행의 고통은 영원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은 나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탐욕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대상의 변화에 끌려 집착하고 마음대로 안 된다고 성내고 불평하므로 마음은 자연히 고통스럽게 될 뿐이다. 『법화경(法華經)』에는 「절복기심(折伏其心)」 즉 그 마음을 절복해야 한다고 하였고, 『화엄경(華嚴經)』에는 「조복기심(調伏其心)」, 즉 그 마음을 조복받아야 한다고 한 경전의 말씀이 모두 같은 의미다.
그 마음을 항복 받기 위한 수행으로 가장 좋은 것은 보시다.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자기가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원한과 미움은 성냄과 어리석음만 증폭시킬 뿐 아무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항복 받는데는 인욕행이 절대적이다. 마음에 인욕행이 없으면 화나는 대로 성질부리고 이 분노로 인하여 마음은 더욱 어리석어 탐욕의 산은 더욱 높아질 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즉 나무 아래서 마군을 항복 받았다는 것은 곧 그 마음의 모든 번뇌를 항복 받은 것이다. 마군은 마음에 침투되어 있는 번뇌망상이다. 마음에 입력되어 있는 망상을 항복 받지 못하면 유혹의 대상이 나타날 때는 즉각 끌려가기 마련이다. 대상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모든 탐욕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 마음을 항복 받지 못하면 어떤 대상에 접촉되면 즉각 탐욕심이 일어나게 되고, 그 탐욕심이 마음대로 안 되면 즉각 화를 내고 화를 내면 곧 어리석어 진다. 지혜의 빛을 잃은 마음의 무명이 어찌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겠는가.
불상(佛像)을 점안(點眼)할 때 붉은 팥을 던지며 「항마진언(降魔眞言);옴 소마니 소마니 훔 하리한나 하리한나 훔 하리한나 바나야 훔 아나야혹 바아밤 바아라 훔 바탁」 하고 다라니를 외운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기 직전 일체 마군을 항복 받았으므로 불상의 위력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군을 항복 받아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다. 우리의 마음에 저것이 부처님이라는 확신이 성립되어야 그 불상에 귀의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며, 경전을 독송하고, 명호를 부르고, 찬탄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염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에 불신(不信)의 망상이 일어나면 나 자신의 마음이 불안해지고 괴로워진다. 따라서 나의 마음은 자유로울 수 없다.
『능엄경(楞嚴經)』에는 항마장이 있고 50가지의 마음을 항복 받는 조목이 있다. 눈으로 형색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피부로 촉감을 느낌으로 일어나는 유혹을 항복 받는 것이다. 대상에 따라 즉각 움직이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수행의 가장 큰 과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 자유롭지 못한 곳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다가오는 대상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 마음이라고 하는 이 마음은 참으로 내 마음인가 가만히 생각해보자. 대상에 끌려다니며 자유롭지 못한 이 마음, 불안하고 초조하여 불평하고 성질부리는 이 마음이 진짜 내 마음인가 생각해보자.
달마(達磨)는 혜가(慧可)에게 ‘불안한 너의 마음을 가져오라’ 하였고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갖다 드리려고 했지만 드릴 수 있는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그 상태에서 혜가는 마음의 불안은 본래 없었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된다. 마음의 항복 이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참으로 어렵지만 자유롭고 행복을 갈망한다면 반드시 해야 한다. 보시와 인욕으로 자비를 실천하자. 본래 없던 번뇌인데 꼭두각시놀음에 놀아나며 괴로워할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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