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 도량
불자가 급증한 이유
이도업 스님/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2004년 말 “한국 갤럽”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전 국민의 53.5%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 인구를 약 5000만 명으로 본다면 2675만 명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셈이며, 100명이 모이면 약 54명이 종교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를 종교별로 보면, 불교인이 24.4%인 1220만 명, 개신교인이 21.4%인 1070만 명, 천주교인이 6.7%인 335만 명이 된다. 84년도의 같은 조사와 비교해 보면 불교인은 5.6%, 개신교인은 4.2%, 천주교인은 1.0% 증가했다고 한다.

이 조사에 의하면,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의 종교인구는 개신교나 천주교에 비해 불교인이 크게 증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불자의 수가 이렇게 급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 정리해 보려고 한다.

첫째, 종교의 사회적 현상이다.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때 사람들은 종교를 찾게 된다고 한다. 60년대 초에서 80년대 말까지 우리 사회는 극심한 불안과 혼란에빠져 있었다. 60년대 초 5·16군사 혁명기를 지나 70년대 초 유신헌법 반대 투쟁으로 사회가 심히 혼란했고, 급기야 80년대 초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는 광주 학살 사건이 터졌다. 군사 독재 정권에 항거하던 사람들은 명동 성당에 자리를 틀었고, 광주에서는 기독교와 천주교계 인사들이 그들을 감싸 안았다고 한다. 현재 기독교계 인구가 서울과 광주지역에 압도적으로 많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일련의 사회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불교종단은 종권 싸움으로 밤을 새웠고, 총무원장 직은 일년을 채우지 못하고 바뀌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다 90년대 초에 군사 독재정치가 끝나면서 개신교의 성장세는 주춤해졌고 천주교인의 수도 소폭이기는 하지만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고 한다.

필자는 2003년도에 1년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가 있을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많은 교회(성공회 성당)와 종교인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선진 유럽의 대형 교회에는 지금 신자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나는 같이 지내던 피터 신부님께 물어보았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지난 30여 년 동안 급성장해서 지금은 일요일이면 수많은 신도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고, 70만 명이 넘는 대형 교회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아! 놀라운 일이군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인다니.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좋은 현상이 아니에요. 한국 사회가 그만큼 안정이 안 되어 있다는 증거니까요.”라고 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선진 유럽 국가에 오늘날 기독교인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교리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그 사회가 그 만큼 안정되어 있다는 반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개신교세가 주춤하고 천주교 인구가 소폭 감소했다는 것은, 또 90년대 군사 독재 정권이 끝나면서 불교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은 이런 사회 현상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리적인 내용이다. 한국인이 종교를 갖게 된 이유는 (1)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가 67.9% (2)복을 받기 위해서가 15.6% (3)죽은 다음의 영생을 얻기 위해서가 7.8% (4)삶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가 2.3%로 나타나 있다. 이 통계에서 보면 한국의 종교인들은 돈이나 명예나 이성간의 만남 등으로 불리는 소위 5욕락(五慾樂)을 구하기 위해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90년대 이후 불교인의 수를 크게 증가시킨 이유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종교는 크게 신의 종교(神本主義)와 마음의 종교(人本主義)로 나눌 수 있다. 불교는 물론 마음의 종교다. 예산 수덕사에 계셨던 어느 큰스님의 법문은 짧아서 유명(?)했다고 한다. 그 큰스님은 법상에 오르시면 한 5분 동안 말없이 앉아 계시다가 “불법(佛法)이란...” 한마디 하시고, 약 5분 동안 말없이 앉아 계시다 “심법(心法)인디” 하시고, 또 한 5분 후에 “심법이란...”하시고 말없이 앉아계셨다고 한다. 그곳에 모인 수많은 대중들이 숨을 죽인 채 무슨 말씀이 이어질까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큰스님은 “용심법(用心法)이여! 그러니 마음들 잘 쓰시오.” 하시고는 법상에서 내려오셨다고 한다. 불법이란 심법이고, 심법이란 용심법이라고 하는 단 네 마디에 지나지 않는 20분간의 법문이었지만 그 곳에 모인 대중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일화가 있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요가나 명상들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평화를 갈구하던 한국인의 종교성과 무관하지 않았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강조하는 불교의 가르침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셋째는 환경적인 요인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를 사막의 종교, 구원을 갈구하는 종교라 한다면 불교는 숲의 종교, 명상의 종교, 깨침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소득 1만불 시대로 접어들면서 공해 문제, 교통 문제, 노사 문제 등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사회 각 주최들이 더 많이, 더 좋게, 더 빨리 라고 하는 ‘더’자 병에 걸리게 되었다. 만족 할 줄 모르는 무한 욕구에서 생긴 ‘더’자 병에서 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또 주 5일제 근무에서 얻어진 시간적 여유를 활용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도심을 벗어나 자연환경을 찾게 되었다. 자연 속에 있는 사찰 환경은 무언의 전법사(전도사)가 되어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불교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불법을 전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불자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회적 현상과 교리적인 내용과 자연적인 사찰환경을 조화롭게 활용해서 사람들의 심성을 순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사람들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포교의 방향을 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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