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이 가을의 반성

이임수/ 인문과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삶이란 끝없는 회의의 연속인가? 머리가 희끗한 쉰 고개에 이르렀으면 ‘이제 사는 게 무엇인가?’ 하나쯤은 깨쳤어야 함에도 아직 자신이 없다. 부처님의 깨달음에도 이르기가 어렵고, 공자님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으니 이렇게 회의하다 가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교수불자회에서 은해사를 다녀왔다. 꽤나 인연이 깊은 곳인데 오랜만에 보니 온통 새로운 건물들로 가득하여 무상함을 실감한다. 70년대 초반 대학시절 문학공부를 한다는 것에도 회의가 들어 현실적 방편으로 행정시험이나 볼까 싶어 은해사의 백흥암과 맨 꼭대기 중암(돌구무절)에 몇 달 기거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중암의 노스님께서는 나를 불러 놓고 “학생은 상을 보니 종교에 귀의하면 크게 되겠다고 하시며 꼭 스님이 아니라도 성직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종교학·철학·심리학 등을 좋아하면서도 그쪽에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인연 따라 이곳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부임하고는 80년대 중반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한다고 겨울방학 동안 본사에 머물러 신세를 졌었다.

수년전에 백흥암을 찾았더니 수리 중이기도 하고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라 하여 둘러볼 수가 없었다. 백흥암이 원래 본사였다고 하는데, 허물어져가는 돌담과 절문을 들어서는 풍광은 정말로 일품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누각 아래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절 마당에는 자욱히 이슬비가 내리고 법당 앞 양쪽엔 수국이 화안이 피어 반기던 고요한 뜰은, 우산을 들고 들어서던 젊은 날의 나에게 천국과 같은 희열로 다가왔다. 중암의 노스님이나 본사에서 노망기가 있어 아침 공양시간에 공부하는 학생의 머리를 숟가락으로 때려 피를 흘리게 하던 노스님도 다 편안히 열반하셨는지? 본사에서 일하시던 처사(그 때 김처사는 한해 일을 하여 토굴에서 수행할 양식을 준비한다고 불목한을 하고 계셨음)는 한 소식을 얻으셨는지?

세월이 덧없이 빠르니 ‘옛사람이 밤에 촛불을 잡고 논다(古人秉燭夜遊)’는 말이 이제 이해가 간다. 10년 전 연구년을 얻어 인도와 히말라야를 40일간 헤매다 돌아와도 아직 ‘이것이다’라고 확신을 갖고 매진할 만한 것을 내놓을 수 없다. ‘이렇게 살다가 마는 것이 인생인가?’, ‘이것이 삶의 끝인가?’ 이러한 회의를 아직도 놓지 못했으니, 번뇌를 떨친 부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방황하던 시절이 무용했던 것은 아니다. 영원한 문제를 빼고는 지금 살아가는 모든 선택에 크게 망설이지 않고 결정할 수 있음도 많은 방황과 회의 때문에 얻은 자신감일 수 있다. 문학도 예술도 종교도 회의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는가?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요즘 학생들에게 수업하기가 힘들다. 학생들과의 세대나 연령,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학생들의 인내심이 부족한 것이 더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인내나 고통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는데, 요즘 학생들은 텔레비전, 컴퓨터, 오락 등에 빠져 가만히 인내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명상이나 좌선 등 혼자 사색하는 훈련이 긴요하다.

학생들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사물이나 현상을 사실 자체로 보지 않고, 내편이면 무조건 옳고 내편이 아니면 무조건 그르다고 한다. 한쪽은 무조건 미워하고 욕하고 한쪽은 무조건 추종하고 옹호하는 사회, 이는 극복되어야 할 사회현상이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음이 깨달음이요 부처님의 뜻이고, 유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이기도 하다.

세상을 한쪽만 보면 안 된다. 대학가 주변이 술집과 놀이로 시끌벅적하더라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보고 학문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놀기만 하거나 공부만 하는 것도 좋은 것이 못 된다. 사회생활 또한 자신만을 위해서도 아니 되고 남만을 위해서도 안 된다. 남을 위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함이 되도록 잘 조화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생각도 삶이나 즐거움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죽음과 슬픔을 인식하고 그들을 극복해야만 고통을 이기고 인생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늘 주인일 수만도 없고 그가 항상 객(客)인 것도 아니다. 인생이 꿈이기도 하고 가끔 꿈같은 인생이 펼쳐지기도 한다.

꿈같이 무상(無常)한 게 인생이라 한다. 한바탕 마음대로 멋진 꿈을 꿀 뿐, 깨어나고 죽고는 생각하지 말자. 열심히 꿈꾸었으면 그것이 극락이고 또한 깨어나서도 행복하리라. 한해가 저무는 때, 꿈 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 있음만으로도 기쁨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자. 저무는 한 해나 세모(歲暮)의 황혼이 마음먹기에 따라 더욱 아름다울 수도 있으리니. 하하! 이 가을 끝에 어디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으랴. 떨어진 낙엽이나 죽은 애인에의 기억조차 말이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