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현대 사회와 불교

정병조/ 문과대학 윤리문화학과 교수


불교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평소 생각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이 2500년 전에는 옳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불교는 단순한 주의·주장일 뿐이지 결코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 속에 불교를 적용시키려는 노력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의무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이 다변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뭔가 불교가 변모해 가는 주체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학의 분야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그리고 불교 실천의 문제가 어떻게 바뀌어 지면 좋겠는가 하는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불교학이라고 하는 장르에서 본다면 불교문헌이나 경전, 사상 쪽으로는 화엄·천태·선 이런 식으로 나누어서 공부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런 불교학의 분류와 범주는 유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형태의 것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늘의 우리 시대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속에서 그와 같은 학문의 분리 방법을 가지고는 오늘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불교가 학문적으로 도저히 대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학은 지금의 시대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인터넷을 통한 소위 포르노 사이트가 젊은이들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정도이지만, 미국에서는 사이버 섹스의 도덕성 문제가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정한 파트너와 가상으로 섹스를 하는 것일 뿐 현실적으로 법적으로는 문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결과가 엄청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에 온 세계를 공룡이 덮고 있었는데 지금은 공룡이 멸망했습니다. 사람들은 공룡이 워낙 덩치가 크다보니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초식공룡을 생각해 봤을 때는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현재까지에 이른 결론은, 포유류가 등장하면서 공룡과는 직접 상대가 되지 않으니 공룡의 알을 공격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구상에 돌아다니는 공룡들이 죽으면 끝나는 겁니다. 지금 사이버 섹스의 위험성을 과학자들은 거기까지 내다본 것입니다. 다들 결혼을 기피하고, 결혼을 한다 해도 자식을 낳을 필요성은 전혀 못 느끼고 있다보니 결국 지금 있는 인간들만 멸종하면 인간은 없어진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이버 상에서의 윤리성 문제도 이제는 불교가 다루어야 할 문제 중 하나로 등장했습니다. 이것이 왜 비도덕적이냐 하는 논리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 논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에 대한 제동장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불교는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현재 불교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태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불교의 교리를 실천하는 신행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를 실천하는 문제를 본질적인 입장에서 따지는 것은 불교인들을 괴롭히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사회봉사를 해야 한다, 남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불교인들의 자각이 미흡하기 때문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이것이 불교의 교리와 관련되어진다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현재 사회와 미래 사회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불교·개신교·카톨릭 이 세 종교가 선의의 각축을 벌여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 세 종교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국민들이 진리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이 선택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사회에 얼마만큼 유익한가 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내리는 불교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는 첫째, 불교인들은 의례중심적인 법회를 본다는 것입니다. 절에 갔을 때 알아듣지 못할 독경 소리와 법문이 주를 이루다 보니 부녀자 중심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둘째, 불교라 부르는 종교는 사회적인 활동에 있어서는 서양 종교에 비해 미흡하다는 것입니다. 미흡한지 안한지 통계와는 상관없이 일반인들이 그렇게 점수를 매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미래 불교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교가 미래의 한국 사회를 위해 보다 유용한 실천을 펼쳐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불교 신행의 태도를 지금 업그레이드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대에서는 불교의 현대화라고 하는 고민과 더불어서 이 현대를 어떻게 불교화 시키느냐 라는 두 가지의 고민을 안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어느 불교신문사에서 조사한 종교 의식에 설문 통계를 보니 개신교와 불교가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일·이 위를 다투고 있는데, 개신교가 불교를 재치고 일등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역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홈그라운드를 보니 부산·경남·대구·경북 지역 소위 영남지역인데 불교를 믿는 사람이 기독교를 믿는 사람의 세배가 넘습니다. 그런데 광주·전남·서울 지역은 기독교인들이 불교인의 세배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냉정하게 원인 분석을 하고, 포교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연령별 분석인데 기독교의 경우는 나이가 내려갈수록 신자가 많았습니다. 10대 20대는 압도적이고, 30대 40대부터 줄어들기 시작하는 삼각형의 형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는 10대 20대는 없고, 40대부터 조금 나오다가 50~70대가 압도적인 가분수 모양이었습니다. 이 통계를 보고 늙은이들이 돌아가시면 불교는 끝났구나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불교는 역시 나이를 좀 먹어야 이해할 수 있는 원대한 가르침인가보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경청하기 위해서 찾아오게 마련이구나 하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통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역적인 것은 극복을 해야 합니다. 광주·전남 지역에서 불교가 미약한 이유를 개인적으로는 광주민주화 사태에 대한 종교의 영향에서 불교가 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해 봅니다. 그 당시 카톨릭의 신부들이나, 개신교 목사들의 활약이라고 하는 것은 처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불교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광주 전남 지역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남긴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동서 갈등의 문제를 얘기할 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에는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기 마련인데 무조건 화합하라고 한다고 해서 화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가해자는 아니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참회를 해야 합니다.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참회를 하면 피해자의 용서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동서갈등을 풀어 나가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룩할 수 있는 힘이 바로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북경에서 돌아올 때 배웅 나온 스님께서 “이제 과거와 달리 중국에서도 불교가 일어나고 있으니 한국과 일본과 중국 이 세 나라는 미워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아야 하는 나라인데, 이 세 나라를 엮는 황금연대의 끈이 바로 불교입니다. 정치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으로 이 세 나라가 이해관계가 붙었을 경우에 싸우게 마련이지만, 불교를 통한 연대관계에는 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황금연대가 21세기를 열어가는 우리 불자들의 과제입니다” 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 말을 참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말도 다르고, 생긴 것도 다르고, 먹는 음식도 다르지만 큰 공감대를 느끼며, 어려움 속에서 불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중국의 선각자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우리 한국 불교인들도 조금 더 글로벌한 감각을 가지고 이 세계 속에 한국 불교를 위상 지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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