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佛心

상당(上堂)의 노래

강석근/ 인문과학대학 국어국문학과 강사

 


爾家本離言      선종은 본래 말을 떠났는데

上堂欲何宣      법상에 올라 무슨 말하려는가

可速下座欲      속히 내려와 자리잡고 앉던지

不然上床眠      아니면 침상에 올라 잠이나 자라

                                                 <동국이상국집 전집 19권, 問上堂偈>


이 게송은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의 <문상당게>라는 작품이다. 상당이란 설법을 위해 법상에 오르는 것이다. 이 게송의 제목은 <법문의 효용에 대한 질문>이라 의역할 수 있는데, 스님이 법상에서 행하는 일상적인 법문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는 내용이다. 이 게송은 언어로는 불법을 전할 수 없다는 언어부정의 논리가 배경이며, 관행처럼 행해지는 따분한 설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그 내용이다.

설법은 승가의 일상이며, 중생들을 제도하는 기본적인 실천행이다. 그런데 법상에서 내려오라 강요하고, 침상으로 가 잠자라는 외침은 분명 파격이며 역설이다. 이는 언어는 물론 불교의 교학까지도 부정하고 오직 마음으로 법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논리를 표방한 선종적인 관점이다. 수보리의 물음에 침묵으로 답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불이법문(不二法門)’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 때문에 어떤 선사들은 설법을 위해 법상에 올랐다가 한 마디 말도 없이 내려왔고, 어떤 스님은 도가 담긴 한 마디 말을 찾아 일생을 고민했다.

불법을 전하는 일은 아주 일반적이며 동시에 아주 특수한 행위이다. 선종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불법은 어렵기 때문에 서로 주고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선사를 만나면 선사를 죽이는’ 자기 부정의 처절한 구도행을 실천해 보지 못한 인물이라면 궁극의 경지를 대중들에게 전하지 못할 것이며, 구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없는 청중이라면 부처님의 설법을 들어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시적 화자의 법문에 대한 깊은 회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백척간두에서 몸을 던지는 비장한 노력도 없이 건성으로 법을 주고받는 이들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뜨거운 비판만이 불교와 중생들을 거듭 태어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