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의 창
존재의 이유
김호귀/ 불교대학 선학과 강사

 

『법구경』에는 피곤한 나그네에게는 길이 멀고 잠을 못 이루는 사람에게는 밤이 길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가 한 번 쯤은 들어보고 느껴 보았을 내용입니다. 특히 세상이 험악하고 자신이 인생에 자신감을 잃어버렸을 때의 무력감은 또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란 고작 이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실감하면서 느끼는 무력감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 그래도 무언가 자신을 포기할 수 없게끔 만드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난다면 그다지 실망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대자연의 추이를 살펴보면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음지식물은 자신보다 큰 식물을 의지하여 햇살을 피하고 양지식물은 보다 큰 잎과 높은 줄기를 갖으려고 노력을 기울입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각각 잘들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네 인간을 다시 되돌아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처럼 모든 것이 그 나름대로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관찰하노라면 무엇이 있어 이토록 쉼없이 작용을 하고 노력을 하며 자신을 추스리게 만드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누구나 무슨 인연의 힘에 끄달려 가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주체적으로 곧추서려는 것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경우일지라도 무언가를 향하고 부단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무엇(?)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가령 사과나무에서는 반드시 사과가 열리게 마련인데 그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왜 사과나무에서 복숭아가 열리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우문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게끔 하는 그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주체적으로 곧추서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믿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인정하여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보다 근본적인 자기의 고유한 자성을 찾아 그 대상을 의지하려는 상투적인 경향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있어 자기동일성이라는 것으로 작용하면서 참으로 의미있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세상이 공허하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대상을 추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신앙심일 수도 있고 책임감일 수도 있으며 무언가를 이루어내려는 성취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본래모습을 곳곳에서 느껴보고 남에게서 확인받고 인정받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서 무언가를 남기고들 싶어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래서 명예를 남기려고 또한 자손을 남기려고 무던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로 종자를 퍼뜨리기 위해서 참으로 오묘한 방법을 선택합니다. 생명을 갖춘 존재는 모두가 그렇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키는 방법이 스스로의 힘으로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다른 대상에 의지하여 그것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민들레는 홀씨를 바람에 흩날리기도 합니다. 달리 어떤 식물은 곤충이나 동물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진지하기도 하고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종자를 남기려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참으로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간은 이것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종족보존이라는 대명제 이외에도 그것을 진실하고 성실하며 아름답고 숭고한 차원에까지 이끌어 올리려 합니다. 나아가서 대자연의 그 자체가 진실하고 성실하며 아름답고 숭고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드러내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그토록 자신과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일까, 아니 모든 동식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무엇이 부족해서 그런가 하면 딱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세상 어디에나 넘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드러나 있어도 보지 못하고 보면서도 알지 못하고 알면서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하늘은 그저 하늘 그대로 완전합니다. 그런데도 날씨와 사람의 기분에 따라 하늘은 푸르다, 어둡다, 맑다, 을씨년스럽다 등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각기 보는 입장에 따라 그렇게 달라져 보이고 아예 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그저 그럴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의 고유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어느 생명체나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의 공통된 과정인 생노병사를 거쳐가는 것만으로 전부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인간은 인간이라는 자의식을 지니게 되면서부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만물의 최고라는 의식하에 모든 것을 지배 내지는 소유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자연의 자연성을, 심지어는 인간 자신에게조차도 인위적인 분류 내지는 차별의 기준을 규정하여 점수로, 숫자로, 등급으로 그에 맞추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자연의 본래면목이 인간의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더욱 인간으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뒤늦게나마 인간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있습니다.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명제와 불성의 자각 내지 더불어 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개발과 자연 그대로의 보존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식하에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생각한 것입니다. 인간이 내내 추구해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결국 진실하고 성실하며 아름답고 숭고한 자기본분으로서 그것이 인간사회 뿐만 아니라 자연에게까지 확대될 때 인간의 고유성은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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