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 깨달음과 수행 김재성/ 선학과
강사, 경전연구소 소장
초기불교에서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깨달음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는 보디(菩提, bodhi)이다.
보디라는 말은 ‘알다’(budh)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이 깨달음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성문(聲聞)의 깨달음,
독각(獨覺)의 깨달음, 그리고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최상의 바른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한다. 여기서 공통되는 깨달음에 대해
경전을 통해 살펴보고, 그 과정에 이르는
수행을 정리해본다.
깨달음은
바로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
먼저
깨달음에 대한 초기경전의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본다.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 나에게
아주 분명하지 않았더라면, 비구들이여,
나는 천신, 마라(魔), 범천(梵天), 사문과
바라문, 인간, 천인(天人)의 세계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無上正等覺]을 깨달았다고
공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이 나에게 아주 분명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천신,
마라(魔), 범천(梵天), 사문과 바라문,
인간, 천인(天人)의 세계에서, 위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나는 공언했다.”
(『여래의 말씀』 SN V 422-3)
“비구들이여,
청정한 범행(梵行)의 목적은 재물, 명예,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며, 계(戒), 정(定),
지견(知見)을 얻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자유[不動의 心解脫;
akuppa cetovimutti]가 청정한 범행의
목적이며, 핵심이며, 궁극의 도달점이다.”
[『핵심의 비유라는 큰 경』(心材喩大經)
MN I 197]
“과거의
어떠한 아라한,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者]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세존들이 자신의 제자인
비구 상가에게 가르친 (수행의) 목적이
있다. 바로 그와 같은 (수행의) 목적을
지금 내가 나의 비구 상가에게 가르친다.
미래의 어떠한 아라한, 정등각자라 하더라도
그러한 세존들이 자신의 제자인 비구 상가에게
가르칠 (수행의) 목적도 이와 같다.”
(『칸다라카경』 MN I 339)
이
외에도 깨달음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가
바로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며, 제자들에게
지도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의
관심사는 괴로움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 해결에 있었고, 스스로 이룬
그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어 제자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초기불교에서 사성제가
지니는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 팔정도
깨달음의
포괄적인 내용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라면,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 즉 수행법은 사성제의
네 번 째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일
수밖에 없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팔정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고귀한 여덟 갈래의 길(八支聖道=八正道)이
여래(如來)가 발견한, 보는 눈을 주고,
앎을 주는 중도, 평온에 이르게 하고,
뛰어난 앎을 얻게 하며, 깨달음을 이루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중도이다.” (『轉法輪經』
SN V, 42)
“이
길은 괴로움이 없고, 피해를 받지 않고,
번거로움이 없고, 실의에 빠지지 않는,
올바른 길이다.” (『無諍分別經』 MN
III, 231)
“이것이야말로
길이다. 지견(知見)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다른 길은 없다. 그대들은 이 길을 따르라.
이 길이야말로 악마를 어지럽힐 것이다.
그대들이 이 길을 가면 괴로움의 화살을
빼게 되리라. 나는 괴로움의 화살을 뺄
줄 알고, 그대들에게 이 길을 설한 것이다.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하라. 여래들은
길을 설해주는 사람일 뿐, 마음을 집중해서
길을 가는 사람(jhayino)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法句經』 274-276게)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가능한가
깨달음은
수행의 조건이 충족될 때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그리고 수행자들은 언제 그 순간이 경험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살피라고 한다. 실제로
깨달음의 내용이 탐진치라는 근본적인
번뇌의 소멸이라면, 수행이란 바로 이러한
탐진치를 덜어내는 작업일 뿐이다. 실제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팔정도는
계정혜(戒定慧)라는 세 가지 수행(三學)으로
분류되며, 이 수행은 다름 아닌 몸과 입과
마음(身口意)에서 피어나는 탐진치라는
번뇌를 제거하는 일일 뿐이다. 이렇게
깨달음과 수행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으로 끊임없이 탐진치를
제거하는 계정혜 삼학의 수행을 언제나
실천하는 길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몸과 입으로 하는 행위를 조심하고(正語,
正業, 正命), 내 마음에서 생겨나는 탐진치의
번뇌를 끊고, 좋은 법은 갖추려고 노력하며(正精進),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마음챙겨 알아차리며(正念), 마음을 집중(正定)하는
것이 바로 이 번뇌들을 끊어내고 좋은
법을 닦는 것이다. 정확하게 집중해서
알아차려진 번뇌는 지혜(正見)의 칼에
의해 잘려지고, 좋은 법은 더욱 향상된다.
이것이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이렇게
이 길을 따라간다면, 부처님이 보증한
괴로움의 소멸, 번뇌의 소멸, 흔들림 없는
해탈이라는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행도 지금 여기 깨어있는 마음으로
하는 일이며, 그 결과인 깨달음도 바로
이 삶에서 체험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akaliko)
체험되는 법(dhamma)이다.
[이
글은 불교신문 2041호/ 6월 22일자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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