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말씀
금강경
김선근/ 인도철학과 교수

 

혼돈의 시대, 갈등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행복과 불국토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금강경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길이다. 금강경은 중생 의식의 환상세계를 깨부수고 부처님 지혜의 실상 세계로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우리 범부들은 지혜로써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즉 생각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금강경은 중생의 의식을 지혜로 깨부수어 태양광명과 같은 밝은 지혜로 이치에도, 일에도 막힘이 없는 삶을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다(第十四離相寂滅分).

슝가 왕조(183-71B.C.) 멸망 후 꾸샤나 왕조(A.D.48-220)중심으로 한 북인도와 안다라왕조(B.C.60-A.D.290?)를 중심으로 한 남인도로 양분되었다. 이 시기에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시대적 사상적 혼돈을 지양하고 회통하기 위하여 그들의 이상을 담은 방대한 수량의 경전을 산출하였는데 이 중 초기 대승경전으로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일체제법이 고정적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관(觀)하는 공(空) 사상을 나타낸 것으로서 서기 150년 전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강경은 『바가와드기따』와 같이 중생의 의식을 대변하는 수보리가 항상 중생의 입장에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해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로 답하는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공(sunya)이라는 술어를 쓰지 않으면서 ‘즉비(卽非)의 논리’로 공 사상을 설명하면서 금강경 전체의 대의(大義)를 제시하는 대승정종분의 가르침을 알아보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라. 있는 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卵生), 어미 태 안에서 태어난 것(胎生), 습기로 태어난 것(濕生), 자체가 없으며 의탁한 데 없이 홀연히 생겨난 것(化生), 욕계와 색계에 사는 형상이 있는 것(有色), 순 정신적 존재인 세계의 형상이 없는 것(無色), 생각이 있는 것(有想),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非有想非無想), 이것들을 내가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제도하리라.①

이와 같이 한량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였으나 실로 멸도(滅度)를 얻는 중생이 없느니라.②

어떤 까닭인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③

 

이와 같이 대승의 이상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보살의 개념이다.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새로운 시대에 혁신 불교로서 나타난 대승불교운동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보살을 제시하고, 부파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아라한을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폄하하였다. 부파불교에서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였고 범부중생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경지였다. 하지만 대승불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보편화하여 누구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깨달음(bodhi)을 얻고자 하는 사람(sattva)’이란 뜻으로 ‘보살(bodhisattva)’이라고 칭했다. 금강경에서는 보살을 단순히 보살이라고만 하지 않고 ‘보살마하살’이라 하여 구별하였다. 금강경에서는 보살,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자리의 완성을 향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것은 성문이나 연각도 가능하므로 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타에 대한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위의 예문①에서와 같이 ‘보살마하살’로 표현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은 일체의 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하는 자비의 원력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금강경의 보살마하살은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 즉 구류중생(九類衆生)들을 제도한다고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실천주의적 불교를 제창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회향시킨다는 의미다. 그러나 일체제법의 공관에서 보면 제도하는 자와 제도받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위의 인용문②에서 설하고 있다. 또, 위의 예문③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즉 사상(四相)의 부정이 보살이라는 대승의 종지를 규정하고 있다. 금강경은 사상을 부정하는 ‘무상(無相)’을 설함으로써 초기불교의 무아관을 새롭게 해석하였다(第十七 究竟無我分).

다시 말해 ‘무상’의 실천은 초기불교의 무아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승불교 운동은 ‘석존의 불교’라는 원래의 관점으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무상의 실천은 반야의 지혜를 현현시키므로 위의 예문②에서 ‘멸도(滅度)의 행위를 부정하는’ 인식론적 근거가 된다. 이 사상의 부정은 당대의 인도 모든 사상, 즉 정통파나 비정통파의 모든 사견(邪見)을 타파하여 회통한 새로운 보살승(菩薩乘) 운동의 진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대승정신은 보살정신이요,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이며, 반야사상은 바로 사상(四相)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경은 이러한 ‘반야바라밀’을 인식한 보살은 보시와 인욕의 정신을 가지고 보살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혼돈의 와중에 살아가는 우리는 금강경을 수지, 독송, 서사, 해설하는 것이 행복한 삶과 불국토 실현의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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