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의 창
이 여름날 나는 광덕산을 오른다
박인성/ 불교대학 교수
나는 주말이면 천안과 온양의 산 광덕산을 오른다. 이 여름날 나는 광덕산을 오르면서 지난 광덕산들을 끌어내 본다. 이렇게 지난 광덕산들을 내 마음 속에서 끌어내 보고자 하는 것은 우거진 숲이 시야를 꽉 막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늦가을의 광덕산. 마른 나뭇잎들이 떨어지면서 나무와 나무 사이가 트이고 벌거벗고 있는 나무들이 산비탈에 빽빽히 들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붙어 있는 나뭇잎들마저 다 떨어지면 나무와 나무 사이가 훤히 트이면서 건너편 산이 보일 것이다. 겨울날의 광덕산. 시야가 활짝 열려 있다. 벌거벗은 나무들 사이로 나무들이 보이고 산들이 보인다. 눈이 내리면 나무들 사이 빈틈없이 쌓인 눈이 내 마른 눈을 적셔줄 것이다. 이른 봄날의 광덕산. 잿빛 나무들에서 연두색의 잎이 돋아난다. 얼마 안 있어 이들은 점점 나의 시야를 막아가면서 녹음을 이룰 것이다. 이렇게 내 마음 속에 한번 일어난 광덕산들은 이제 기억하고자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진다. 이 멋진 내 마음 속의 광경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가령 일어났다 사라지는 여러 광덕산들 중에서 지금 내가 잡아내고 있는 지난 여름날의 광덕산은 어디서 온 것일까? 지난 여름날 나는 광덕산을 오르며 많은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 여름날 이렇게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을 보면. 산비둘기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얼굴 앞에서 윙윙거리는 벌들을 보았을 것이다. 쏟아진 빗물에 계곡물이 넘쳐흐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빰에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느꼈을 것이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치는 검은 구름을 보았을 것이다. 아주 작은 풀꽃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잘해야 보았다거나 들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 보았을 때 보이던 것, 들었을 때 들리던 것 이런 것들은 기억해낼 수 없다. 이렇게 지금 경험하는 여름날의 숲도 사라져간다. 다음해 여름날 이 여름날의 광덕산을 기억할 때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생생하게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며, 또 간혹 기억에 담으려고 주의를 집중하기에 다음해에 되돌아볼 때 “바로 이것이었지” 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보고 들은 대로 담아둘 수 없다. 아마도 내 기억에 남는 것은 다시 내 기억일 것이다.
이 여름날의 광덕산은 지난 여름날의 광덕산이 될 것이다. 이렇게 나는 이 여름에 간직하고자 했던 광덕산의 많은 것들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보고 들으면서 느낄 때 그 좋은 느낌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 느낌이 좋아 다시 광덕산을 찾고 그 느낌을 한껏 누려보아도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다. 이 여름날의 광덕산은 지난 여름날의 광덕산이 되고 지난 여름날의 광덕산은 지지난 여름날의 광덕산이 되고. 그러면서 언젠가는 광덕산을 완전히 망각할 것이다.
망각의 파괴력! 나의 의지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걸 보면, 기억의 생산력! 상실했던 이 광덕산의 모든 것들이 그래도 낯설지 않고 친숙한 걸 보면, 그렇다면 내가 이 산길을 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나란 내가 기억하는 나가 아니던가? 기억하는 나는 무엇이며 기억되는 나는 무엇인가? 모든 것을 상실하게 하는 저 망각의 힘 앞에 기억하는 나와 기억되는 나란 참 초라한 것이다. 참 덧없는 것이다. 언젠가 다 상실해 버릴 나. 나의 역사란 그저 나의 기억의 역사에 불과하지 않던가? 그러나 이런 기억의 영역에 있지 않은 미세한 나들이 또 다른 낮고 두터운 기억을 만들어가면서 나의 기억의 역사를 꾸려가고 있다. 보고 들으면서 느끼고 그러면서 친숙하고.
울울한 숲속을 걷는다. 사방이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막혀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간혹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가 뚫려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따름이다. 바람한테는 이 나뭇가지와 저 나뭇가지가 아니고 이 나뭇잎과 저 나뭇잎이 아니다. 녹음 속에서 바깥을 보려 하는 나는 이미 안에 갇혀 있는 나이다. 바람은 나의 안과 바깥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내 빰을 스쳐지나가며 속삭인다. 바람은 잎을 스쳐가듯 나무를 스쳐가듯 그저 빰을 훑고 지나갈 뿐이다. 때로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싶은 것은 바람은 내 빰을 그저 빰으로 알 뿐 내 빰으로 알지 않기 때문이다. 나뭇가지로 알고 나뭇잎으로 알 뿐이다. 그렇듯 나도 이제 내 빰을 스치는 바람을 바람으로 알지 않는다. 나는 잎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된다.
바람이 스쳐가듯 간혹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스며든다. 울울한 숲의 어둠 속에서 맞이하는 햇빛. 빛을 맞이한 눈은 내 몸을 빛이 되게 한다. 홀로 있는 오랜 세월 한번 찾아온 손님처럼. 아, 나는 어둠에 갇혀 홀로 있었구나. 용수(龍樹)는 바람이 되어 나를 이끈다.
이미 간 곳을 가지 않네. 아직 가지 않은 곳을 가지 않네.
이미 간 곳과 아직 가지 않은 곳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곳을 가지 않네.
(『중론』「관거래품」게송 1)
장마철. 하늘이 비를 뿌렸다 걷었다 한다. 안개 낀 광덕산. 몇 걸음 앞이 안 보이는 광덕산을 오르며 나는 웬지모를 행복감에 휩싸인다. 보이는 것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안개의 흐름에 흐릿하게 나타나는가 하면 살짝살짝 모습을 보여주다가 다시 감추곤 한다. 설사 안개가 걷혀 보이는 것들이 뚜렷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이미 안개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보고 있다는 자각이 보이는 것을 분명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 있다는 자각이 명료하다고 해서 보이는 것들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들은 명료한 자각 속에 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보고 있다는 자각마저 명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기억 속에 있고 기억 속으로 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고자 해서 기억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기억하지 않고자 해서 기억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용수(龍樹)는 안개가 되어 또 이렇게 노래한다.
가는 사람은 가지 않네. 가지 않는 사람은 가지 않네.
가는 사람과 가지 않는 사람 이외의 어떤 제3자가 가겠는가?
(『중론』「관거래품」게송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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