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인도의 가네쉬 축제와 믿음


각성 스님/ 경주 정각원 법사


간빠띠 받빠 모르야, 푿 차 와르쉬 루와르 야!

(오! 나의 아버지 간빠띠 신이시여, 다음 해에 빨리 다시 오소서)

우기 동안의 삼 개월 안거가 끝나 갈 무렵, 해마다 인도의 힌두인들이 가네쉬(ganesh)신을 위한 열흘 동안의 축제를 마치고, 강가에서 그를 보내는 것이 아쉬워 부르짖는 염원의 소리이다.

지혜와 부를 상징하는 가네쉬 신에 대한 인도인의 신앙은 어느 가정에서나 그 神像을 볼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생활과 함께 하고 있다. 특히, 가네쉬 신의 4대 성지가 있는 마하라쉬뜨라 주에서 행해지는 음력 8월 보름쯤의 축제는 가네쉬 신에 대한 주민들의 신앙이 얼마나 각별한지를 잘 보여 준다. 축제가 우리 추석 명절과 같은 시기였던 까닭에 인도 유학 동안에 받은 그 인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

신들 중에 가장 강한 힘을 지녔다고 하는 가네쉬 신은 코끼리 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그가 동물의 두상을 가지게 된 신화가 다양하게 전해 오는데 그 중 하나를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신들과 악마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시바신은 오랫동안 이 전쟁에 나아가 집을 비우게 되었다. 부인 빠르와띠 여신은 남편 없이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신통력으로 가네쉬를 만들어 그녀의 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그에게 집을 지키는 책임을 맡게 했다. 전쟁 후, 시바신과 그의 군대들은 승리의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빠르와띠는 목욕중이였고, 그의 아들 가네쉬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가네쉬는 어머니로부터 어느 누구도 집에 들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시바신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낯선 사내아이가 자신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무척 화가 난 시바신은 가네쉬의 목을 베어 버렸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빠르와띠 여신은 남편에 의해 목이 잘려버린 아들을 목격하고 크게 슬퍼했다.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시바신은 그의 군대에게 어서 나가서 처음 만나는 생명체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그의 군대는 코끼리 머리를 베어서 돌아왔다. 시바신은 코끼리의 머리를 그의 아들의 몸에 붙여 생명 줄을 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신의 힘을 부여하고, 앞으로 누구든지 가네쉬의 이름과 그의 은총 없이는 어떠한 행위도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이러한 신화에 대한 믿음 때문이지 힌두인들은 ‘가네쉬 신은 모든 장애를 없애주고, 일을 성공하도록 이끌어주는 신’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모든 행위에 앞서 가네쉬 신상에 예를 드리고, 행위의 결과를 그의 보호와 은총 때문이라고 믿는다.

가네쉬 축제는 바드라빠드 달의(양력 9월 중순) 4번째 날부터 열흘 동안 계속된다. 각 가정에 새로운 가네쉬 신상을 모시고 정성을 다해 예를 올린 후, 열흘이 지난 마지막 날 강이나 바다에 띄워 보내기 위해 제사장들은 기도를 바치고, 신자들은 신상들을 줄지어 화려한 시내행렬을 벌인다. 거리는 오늘의 은총에 감사하고 내일의 행복을 염원하며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는 사람들로 물결을 이룬다. 그들의 염원은 가네쉬 신이 다시 돌아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원만히 이루게 해달라는 것이다.

대다수 신에 대한 믿음이 그렇지만, 힌두인들의 가네쉬 신에 대한 이러한 신앙생활은 신화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믿음은 불교에 있어서도 중요시 여겨진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믿음(saddha)의 의미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확신’의 의미에 가깝다.

‘삳다’라는 용어는 “세존께서 법을 설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여래에 믿음을 가진다”는 문맥에 자주 등장한다. 농부 바라드와자에게 주는 가르침에는 “믿음은 [열반의 결실을 낳는] 씨앗”(Sn p. 13)이라고 비유적으로 언급된다. 또한 위맘사까경에서 부처님은 “믿음은 이치에 맞고, 이해(見)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M p.320)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실 초기 불교에 있어서 믿음은 의심스러운 것에 대한 의혹(vicikiccha)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對置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까말라경에서 부처님은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 소문이나 전통, 경전의 권위 등에 의해서 이끌리지 말고... 어떤 것이 선하고 옳은 것임을 스스로 깨닫고 체득하여 받아들여야 한다”(A I, p. 190)고 가르친다.

부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자기가 믿는 것만이 진실한 것이며, 그밖에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사고’에 대한 경책이다. 오늘날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기 견해만이 옳다는 극단적인 주장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를 극복하는 일은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가능하며, 또한 사회가 원인과 조건관계로 서로 연결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맹목적인 믿음은 일종에 알 수 없는 어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무의식적인 위안이며 자기최면이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막연한 믿음은 끝없이 변화하는 현실에 직면할 때 새로운 불안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해에 바탕을 둔 믿음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에 따라 내적 편안함(pasada)과 확신(adhimokkha)을 낳으며, 그러한 “믿음에 의해 윤회의 폭류를 건널 수 있다”(S I, p. 214)고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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