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불교
러시아의 불교 국가, 칼미크 공화국
김성철/ 불교대학 강사

 

러시아의 서남부 카스피해 북서쪽에,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30여만 명의 인구를 가진 칼미크 공화국이란 나라가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칼미크인이며, 러시아인, 체천인 그리고 고려인이 공존하고 있는 나라다. 이름도 낮선 이 작은 나라가, 2002년 9월 17일부터 19일에 걸친 티벳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방문 이후, 유럽 유일의 불교국가로 주목을 받았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1993년에 자치정부를 수립한 신생국인 칼미크 공화국이 어떻게 유럽 유일의 불교 국가를 자임하게 되었을까.

원래 몽고 유목민이었던 칼미크와 그들의 조상인 오이라트는 몽고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인 15세기 전반에 독립 국가를 형성함으로써 역사에 등장하였다. 16세기 후반기에 오이라트 중 대부분은 중국의 침락을 피해, 현재 중국의 신장지역에 해당하는 중가리아를 떠나 러시아로 향한다. 그들은 16세기가 막을 내릴 무렵 마침내 코카서스 산맥 북쪽 볼가 강과 돈강 유역의 스텝 지역에 정착하여 칼미크 왕국을 건설한다.

17세기 초부터 러시아와 칼미크 왕국의 관계가 밀접해지고, 17세기 중반에는 마침내 러시아와 동맹을 맺는다. 이는 러시아와 칼미크가 함께 서쪽 유럽 국가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백년 간은 칼미크에게는 자유롭고 자치권이 보장된 시기였다. 그러나 1771년 러시아 차르의 학정이 심해지자 칼미크 주민들은 중가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칼미크 주민이 중가리야를 향한 긴 여행에 나서고, 일부만 현재의 칼미크 지역에 남았다. 그리하여 중가리아로 떠난 칼미크 주민이 돌아오는 19세기 초까지 칼미크는 국가로서 형태를 갖추기 못하고 있었고, 이 후 볼쉐비키 혁명의 와중에 소비에트 연방의 하나로 편입되고 만다.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 후, 1920년대에 칼미크의 자치권이 형성되고 35년에는 자치공화국을 수립한다. 이 시기에 칼미크는 느리지만 꾸준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1943년에 스탈린에 의해 나치와 연합하려 한다는 이유로 다시금 시베리아로 강제 추방되는 시련을 겪는다. 칼미크 주민은 13년간 계속된 추방이 끝나고 1957년에야 비로소 시베리아로부터 돌아와 새롭게 자치공화국을 건설하게 된다. 198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적 정치적 위기 이후 1990년대에 들어와 현재의 칼미크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복잡한 정치 경제적 상황 속에서 난국을 돌파할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게 되자 칼미크 공화국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1993년 일룸지노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칼미크 공화국의 불교는 원래 그들이 몽고 유목민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티벳불교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여있었다. 칼미크의 조상들이 중가리야를 떠나기 전, 티벳불교가 몽고에서 바이칼호 근처의 부리야트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퍼졌다. 칼미크의 선조들이 중가리아를 떠나 카스피해 북쪽 볼가강과 돈강 유역에 정착할 때, 그들은 이 티벳불교 전통도 함께 가져갔다. 오리야트의 자이 판디타인 남카 갼초는 몽고 문자에 기반한 칼미크-오이라트 문자를 만들어 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러시아 차르의 지배 하에 놓인 후 칼미크의 불교 지도자는 러시아 차르에 의해 지명되었고 칼미크의 라마로 불렸다. 부리야트의 반디도 캄보 라마처럼, 칼미트의 라마는 아스라칸에 머물면서 몽고로부터는 완전히 독립한 반면, 티벳불교와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칼미크가 받아들인 티벳불교는 겔룩파의 전통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지만, 사캬파와 카규파 전통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칼미크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유목민 특유의 샤머니즘과 불교를 융합한 것이다. 현재는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샤머니즘적인 치병 행위는 아직도 칼미크 불교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에도 티벳불교의 영향력은 강력하여 수도 엘리스타에는 티벳 불교의 상징인 기와지붕 사원이 여러 곳에 있고, 대부분 티벳에서 온 스님들은 티벳어를 사용하여 독경을 한다. 정부 차원에서도 티벳 망명 정부와의 교류가 활발하다. 매년 20여명의 유학생을 정부예산을 받아 티벳에 파견하여 젊은 승려를 양성하고, 티벳 망명 정부 법왕청의 린포체가 가 파견되어 종교 고문역을 맡고 있다. 2002년 달라이 라마의 방문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불교 문화와 건축의 재건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칼미크에는 150여 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다고 하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사찰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93년 일룸지노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2003년 현재 100여 개가 신축되었다.

칼미크 공화국의 국기의 변화와 지금의 국기를 살펴보면 칼미크 공화국이 겪었던 현대사의 수난과 불교에 대한 그들의 신심이 한 눈에 드러난다.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었던 1917년-1942년 사이 사용된 국기, 그리고 1958년-1992년 사이에 사용된 국기,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1992년과 1993년 사이에 사용된 국기, 망명 시기인 1932년에 제정되었던 국기,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던 1943년에서 1957년까지 사용되었던 국기 등 근대 100년간 여섯 차례 이상 다른 국기가 제정되고 사용된 것이다.

1993년에 제정되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칼미크 공화국의 국기는 유럽 유일의 불교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국기의 바탕을 이루는 황금색은 티벳 불교 게룩파의 황모파 전통에서 유래한다. 가운데 원은 몽고 어린이가 학습에 사용한 전통적인 도구를 상징한다. 원 안의 흰 연꽃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중앙아시아로, 그 후 다시 유럽으로 대이동한 후, 그에 그치지 않고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정착하는 과정은, 그들이 본래 유목민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지난한 인고의 세월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인고의 과정 동안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고, 그들의 피로와 고통을 감싸안고 위로한 것이 불교였다면, 새롭게 부활하는 칼미크 불교의 저력은 그들이 유럽 유일의 불교 국가임을 자임하도록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