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나의 기준을 찾아서
강춘호/ 전자공학과 4학년

사람이 살면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뚜렷한 목적 의식 없이 세상의 흐름에 묻혀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대학 졸업이라는 관문을 눈앞에 두고서 보니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단지, '돈을 많이 벌겠다.', '내 사업을 하겠어.'가 아니라,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또 그것을 위해서 찾아가는 내 과정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대학 3년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우선은 대학원을 진학하겠다.'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를 위해서 많은 것을 준비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는 '내가 정말 대학원을 가려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대학원을 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대학원을 가면 내가 전공으로 정해야 하는 분야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대안으로서 취업을 하는 것은 정당한가라는 물음에도 저 자신은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인들의 가치관, 삶의 네 가지 목적, 아슈라마, 즉 삶의 네 단계는 저에게 다른 시각을 주었습니다.

아슈라마는 인생의 단계를 '범지기와 장자기'+'임행기와 유행기'로 나누고 있으며, '범지기와 장자기'는 세상 속에서 잘 살기 위한 노력의 시기이고, '임행기와 유행기'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시기라 합니다.

여기서 저는 지금 학생기에서 가주기로 가기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며, 그 단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주기는 경제활동과 자손번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삶의 네 단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며, 인간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지니고 나오는 세 가지 빚(첫째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준 신들에 대한 빚이며, 둘째는 한가족의 구성원이 되계 해준 부모와 조상에 대한 빚이고, 셋째는 지식과 학문을 보존하고 가르침으로써 문화와 정신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게 해준 스승들과 성자들에 대한 빚)을 동시에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주기 동안에 가장 중요한 의무는 '부단한 노력으로 참나[眞我]를 찾기 위한 준비를 하는 단계', 즉, 해탈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뒤에, 저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해보았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해탈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제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몰랐었으니……. 그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을 때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럼 내가 나이를 먹었을 때 어떤 모습이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는 '지금처럼 금전적으로 힘들어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에 사랑하는 사람들(가족, 친지, 친구들 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라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목표가 돈을 많이 버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냐?'라는 질문을 자문해 봤을 때, 고대 인도인들이 말하는 '아르타(artha : 부, 권력, 명예, 사회적 인정, 영향력 등, 사회적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가 돈을 많이 벌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이고 중간 과정일 따름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가지고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말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마음의 안정, 평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고대 인도인들이 그토록 원하던 해탈의 경지가 '마음의 안정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세속적인 것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함 마음…….

'아슈라마'에 대해서 다시 읽으면서, 각 단계에서 추구하는 일종의 목표 같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목표에 도달했을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도인들의 삶에는 단계가 있으며, 그 단계마다의 의무와 목적이 있고, 그것이 삶의 지침이 되며,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나갔을 때,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해탈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저에게는 단기적이고 즉흥적인 기준은 있을지언정, 내 삶의 방향타가 되어 줄 진정한 기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평정'이라는 추상적이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저의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저만의 실천적 내지는 실제적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지금 가장 크게 고민하는 '대학원'과 '취업'의 문제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스스로의 기준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제 삶의 방향을 정할 기준을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시간이 무한히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이제 곧 사회로 나갈 저에게 어쩌면 시간은 더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마저도 없이 사회에 나갔을 때를 생각하니 더 두렵고 암담합니다. 지금이라도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볼 수 있는 시각이 생겨서 스스로 다행이라고 여기며, 이 글을 쓰면서 얻게 된 귀중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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