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대학원 CEO 과정 특강
21세기의 지도자상
김수환 추기경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지배자의 형태를 세 종류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대통령이나 학급 반장 등과 같이 법률이나 규칙을 통해 제정된 질서의 합리성에 근거한 합리적 지배자이고, 둘째는 국왕이나 가장 등과 같이 예전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권위와 일상적인 믿음에 근거한 전통적 지배자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개인의 신성함이나 비범한 능력에 근거한 카리스마적 지배자가 있습니다. 이 유형에는 주로 종교 지도자들이 속하는데, 여기서 카리스마란 피지배자의 자발적인 인정과 신뢰와 숭배를 통해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버는 사회가 합리화되면 될 수록 카리스마적 지배자의 출현이 줄어든다고 설명합니다. 세계 역사는 곧 초월적이고 마법적인 힘으로부터의 해방 과정, 즉 합리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베버의 관점에서 볼 때 신성한 후광을 지닌 카리스마적 지배자의 출현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세계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가치보다는 수평적이고 다원적인 가치가 인정을 받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날의 지도자들은 조직을 통솔하기 위해 더 이상 카리스마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 )라는 저명한 미래학자는 카리스마가 모두를 불행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한 리더십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더 나아가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아무 상관 관계가 없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원래 카리스마가 발현되는 고유 영역이었던 종교계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즈음의 신자들은 가까이 하기 어렵고 권위적인 성직자 대신에 친절하고 격식이 없는 성직자를 좋아합니다. 저희 교회의 경우 일선 본당 사목에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신자들을 휘어잡는 사제보다는 합리적이고 관리 능력이 있는 CEO(최고경영자)형 사제가 선호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도자가 일반 사회의 지도자와는 무언가 달라야함은 물론입니다. 그는 높은 덕성과 깊은 영성을 가지고 신자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하고 자신도 구원받아야 합니다. 만일 안이한  관리자로만 남으려 하고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는 예언자적 삶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는 이미 사제의 삶을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계 지도자들에게는 여전히 카리스마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종교계의 리더십은 점차 세속화되고 합리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의 흐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리스마의 정확한 의미부터 다시 한번 해석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것은 "신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보내주신 선물인 카리스마의 최종 종착점이 바로 봉사(디아코니아)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직자에게 은총으로 주어진 카리스마는 그가 이 세상과 인류를 위해 봉사할 때 본래의 의미가 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왕직과 사제직과 예언직을 위임 받았습니다. 이 가운데 왕직이란 그리스도의 왕권을 물려받아 세상을 다스리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카리스마라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을 가지고 이 세상에 봉사하라는 데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하여 겸손하지 못한 일부 사제들은 카리스마를 봉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입고 있는 사제복에서 찾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이는 마치 부처님 불상을 이고 가는 당나귀가 사람들의 절을 받고 우쭐해져서 부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의 권위는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봉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진리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도자는 리더십의 기본으로 꼽히는 신뢰를 줄 수 있고 구성원들은 그를 믿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예수님과 부처님 모두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뇌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두 분은 사랑 혹은 자비심으로 인류에게 봉사하며 영원히 살아있는 스승이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세속적 욕심에 시달렸듯이,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사촌동생으로서 함께 수행했지만 끊임없이 세속의 명리와 권력을 탐했던 조달에게 시달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조달이 꿈꾸었던 세속적 권력은 일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 볼 때에는 찰나에 지나가는 하룻밤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는 세속적 기준에서는 한없이 어리석고 힘도 없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는 앞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는 종교계의 리더십이 갈수록 합리화되어 가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카리스마의 정신과 의미를 이해한다면 종교적 리더십과 사회적 리더십이 반드시 구분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새로운 정치의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도자의 리더십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과거의 정치와 새로운 정치의 차이는 무엇이 될 것인가?

저는 과거 정권의 말로가 대체로 불행했던 것은 그 정권의 리더십이 국민복리보다는 자신들의 영달이라는 욕망에서 출발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의 현대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들이었으나 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 사이에 증오와 불신을 심어 놓았습니다. 국민 모두를 감싸 안지 못했고, 듣기 싫은 말들은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내세우고 실제로 그런 신념에 도취되었을지는 모르나 내심으로는 "국민에 의한" 정치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국가 지도자가 나름대로의 영웅주의적 이상에 불타 국민을 몰고 가려는 것이 바로 독재의 시작입니다.

이제 새로운 정치의 지도자들은 독선과 배척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에 기반을 두고 국민들에게 봉사하여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진정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면서 거기에 미움과 편가르기가 수반된다면 그 민주주의와 정의는 거꾸로 우리를 억압하고 이 사회를 비인간화 시키는 기제가 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 눈에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형제로 보일 때 새날은 밝아온다"라는 어떤 성현의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고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동양의 성인인 공자께서도 나이 60이 돼서야 남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자기와는 생김새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성인이요 새 시대의 지도자들이 가장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있는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갈등도 이렇게 타인을 인정해 주는 문화가 자리잡아야 비로소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종교 지도자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진리를 추구하고 신봉하고 자신의 진리와 믿음만이 유일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데서 자칫하면 근본주의적 독선에 사로잡히고 다른 소리에 귀를 닫아버린다면 그 진리와 믿음은 이미 인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맙니다. 가뜩이나 찢어지고 분열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종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소중히 간직하는 가운데 계층과 이념과 세대를 초월해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그들을 위해 봉사할 때 "인간존중"이라는 참다운 민주주의 정신이 더욱 빨리 자리 잡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상은 4월 28일에 있었던 강론에서 발췌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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