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봉황이 다시 우는 날
권기완(문광 스님)/ 불교학부 1학년
“봉황이 오지 않고 황하에서 괘상이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다 됐나 보다!(鳳鳥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이 말은 공자가 천하에 도를 펼 수 없게 되었음을 스스로 탄식한 말로서 노년 공자의 뼈아픈 회한을 담고 있다. 봉황은 새로운 문명의 상서로움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우는 새라고 한다. 공자가 그토록 존경하고 그와 같이 되고자 했던 문왕(文王) 시대에는 중국 섬서성 기산이라는 곳에서 봉황이 정말 울어 주었다. 모든 백성은 그의 덕에 감화되어 은 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평화적으로 주 나라를 건설했다. 그래서 그는 인문(人文)의 힘으로 새로운 문명(文明)을 이루었기 때문에 역사상 최초로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아 문왕(文王)이라 불리게 되었다.
『장자』(莊子)에 보면 봉황이 등장하는 재미난 일화가 나온다.
혜시(惠施)는 제자 백가 가운데 궤변론자의 성격을 띤 논리학파인 명가(名家)의 수장격에 해당하는 사상가였다. 하루는 장자가 물속의 물고기를 보고서 ‘물고기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말했다. 논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혜시가 그 순간을 놓칠세라 말꼬리를 잡았다. 당신이 어떻게 물고기가 자유로워하는지 알 수 있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장자가 맞받았다. 혜시, 당신이 내가 물고기가 자유로워하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말이다. 혜시는 논리만 알았지 마음법을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마다 당했던 혜시는 자연스레 장자에 대해 라이벌 의식과 열등 의식을 함께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시는 여러 제후국 가운데 한 나라에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장자가 아무런 사심 없이 축하해 주려고 그 나라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혜시는 그 정승 자리를 장자가 혹시 빼앗을 목적으로 오는 것은 아닌지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장자가 와서 보니 엉뚱하게도 혜시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장자는 다음의 비유를 들어 혜시를 크게 깨우쳐 주게 된다.
‘새들 가운데에는 봉황이라는 새가 있는데 이 새는 평소에는 동쪽의 군자 나라 동이에서 떠올라서 사해의 너른 들을 휘돌아 저녁이 되면 곤륜산에서 천하의 안녕을 지켜 본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한번 날았다 하면, 북극에서 적도까지 논스톱으로 비행을 하며, 만약 중도에 쉬게 된다면 오직 오동나무에서만 잠시 머물고, 먹어야 할 일이 있다면 맑디맑은 약수물과 함께 60년에 단 한 번 맺는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이러한 봉황이 어느 날 하늘을 날고 있는데 때마침 뱁새가 어디선가 썩은 쥐를 한 마리를 구해서 막 먹으려 하고 있었다. 뱁새는 봉황의 커다란 날개를 보고는 놀란 마음에 얼른 그 썩은 쥐를 허겁지겁 숨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본 봉황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봉황이 그 썩은 쥐에 시선이나 한번 주었겠는가? 그 때의 봉황 마음이 바로 지금의 내 심경이요, 그 썩은 쥐가 바로 정승자리요 그 뱁새가 바로 너 혜시이다!’
참으로 통렬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태평 성세가 올 것을 미리 알려 주는 영조(靈鳥) 봉황. 그 기품과 위의, 역시 성군(聖君)의 대덕(大德)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여러모로 봉황과 인연이 깊었다. 돌아가신 선친의 이름에 ‘봉(鳳)’자가 들어 있었고, 내가 출가한 사찰도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비봉산(飛鳳山)에 자리 잡고 있다. 비봉산은 가야산 해인사가 마주 보고 있는 산이다. 그 산세의 오묘함으로 인해 가야산의 한 자락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이름을 천년 이상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다.
비봉산 자락에 위치한 나의 영원한 고향이 바로 ‘원당암(願堂庵)’이다. 원당암은 해인사의 1번지격인 고찰이다. 신라 애장왕의 왕비가 등창이 나서 백 약을 써도 낫지 않자 수소문한 끝에 지금의 원당암 자리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백일 기도가 끝나자 놀랍게도 왕비의 병이 나았고 그 기쁨에 왕은 기도를 안내해 준 순응, 이정 두 큰스님의 뜻을 받들어 오늘날의 해인사를 창건하게 된다. 애장왕은 원당암에서 친히 해인사 창건 불사를 감독하였고 불사를 마치자 놀랍게도 봉황이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해인사에는 천왕문(天王門)이 없고 대신에 그 자리에 봉황문이 있다. 원당암의 이름도 그 당시에는 봉황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의 ‘봉서사(鳳棲寺)’였다고 한다. 봉황이 깃든 자리이기 때문인지 해인사에는 유독 큰스님들께서 많이 주석하셨다. 그 중에서도 조계종 제10대 종정으로서 열반하실 때까지 원당암 미소굴에서 주석하셨던 혜암 큰스님께서는 입버릇처럼 봉황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21세기가 되면 새로운 세상이 오기로 되어 있다. 그 때가 되면 이 봉황새가 크게 한번 울어줄 것이니까, 여러분들은 아무 걱정일랑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시요!”
『천자문』(千字文)을 보면 ‘명봉재수’(鳴鳳在樹)라는 말이 있다. ‘울음 우는 봉황이 나무에 있다.’는 뜻이다.
내 어릴 적에 나무를 보면서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들 중에서 도대체 어떤 새가 봉황이냐고 어지간히 물어보았던 것 같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한결같이 그 새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새가 아니라 상상 속 전설에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옳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봉황은 입정의 형태에 들어가서 깊은 삼매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현실적 존재로서 전설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고기눈알[肉眼]만 가지고 있어서 그 실체를 못 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 나라에는 유독 봉황의 이름을 지닌 사찰과 지명이 많다. 문경 봉암사(鳳巖寺), 안동 봉정사(鳳停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얼핏 생각해도 여러 지명이 스치고 지나갈 만큼 우리 민족은 봉황을 매우 사랑하는 민족이며, 봉황을 고대하고 있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정말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가? 봉황이 힘차게 날개짓하며 우렁찬 울음 우는 그 날이 오면 운주사의 미륵 와불이 우리 땅 동국(東國)을 박차고 일어나 한바탕 덩실덩실 태평(太平)의 춤을 추게 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