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 도량

잊을 수 없는 보증인

최법혜 스님/ 경주 정각원장

 


아무리 출가인이라 하더라도 사회와 연관하여 생활을 하게 되면 보증인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있고 그리고 보증인이 되어 줄 때도 있다.

불사(佛事)를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계약을 할 때에 재정보증인이 필요하였고 그리고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할 때에도 입원비를 지불할 재정보증인과 생명을 책임질 보증인이 필요한 적도 있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인가 가까운 스님들과 신도님들에게 보증인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기는 하였지만 반대로 내 자신이 남의 보증을 해준 적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실은 남의 보증을 선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증제도는 당사자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공동책임을 의무로 하기 때문에 서로가 깊은 관계가 아니면 보증을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때문에 보증인이 되어주신 것에 대해서는 항상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하여 왔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보증인들 가운데에는 잘 잊혀지지 않는 분들이 있다.

필자는 1985년 3월 일본 대정대학(大正大學)에 유학하여 1988년 3월에 귀국하였다. 선배스님의 도움으로 동경에 있는 재일거류민단의 부단장이신 장거사님을 보증인으로 하여 3년 간의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이 장거사님께서는 동경 아라가와(荒川)구에서 민단을 위하여 많은 활동을 하고 계셨으며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분이셨다.

그런데 이 장거사님과 필자의 인연은 좀 기구한 것 같았다. 처음 일본에 들어가려고 비자신청을 할 때 시일이 급한 보증인의 서류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동경에서의 연락은 교통사고로 장거사님의 생사가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소식에 어떻든 거사님의 생명만을 구해달라는 기도만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필요한 서류가 도착하였다. 너무 놀라 동경에 있는 후배 스님에게 서류작성의 경위를 물었다. 그 스님의 대답은 필자를 몸둘 바 모르게 하였다. 그러니까 그 스님은 직접 병원을 찾아가서 장거사님의 아드님께 서류가 너무 시급하니 장거사님 대신으로 서류에 서명날인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그것도 아직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환자 앞에서 말이다. 스님들의 이러한 무정한 요구에 그 아들은 너무 섭섭하다고 하면서도 요구에 응해주었다고 하였다. 후배스님 덕분에 비자수속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스님으로서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무엇인가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이 마음이 무거웠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만학도의 유학생활이 차츰 익숙해질 무렵 다행이 장거사님의 건강도 많이 회복되어 사찰 법회에도 참석을 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필자더러 함께 동경에 포교당을 개설하자고 하였다. 목적은 재일교포를 위한 참신한 조계종 사찰의 개설인데 모든 것은 장거사님과 신도단체에서 설립 운영을 맡고 저에게는 다만 주지의 승낙과 유학할 제자들을 보내주면 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필자가 잠시 머무르고 있었던 사찰은 스님들과 신도님들 사이에 재산관리상의 문제로 복잡한 일들이 엉키어 만일 신도회장으로 계시는 장거사님과 필자가 별도로 사찰을 개설할 경우 또 다른 잡음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러고 그 후 장거사님께서는 또 한 차례 부탁을 하셨지만 그 말씀을 따를 수가 없었다.

만 3년 간의 동경 생활을 마치고 1988년 3월에 귀국하여 동국대학교(경주캠) 불교학과에 전임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경에 계신 장거사님께서 필자가 귀국을 한 1개월 후에 별세를 하였다고 연락이 왔다. 너무 슬픈 소식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점잖으시고 자상하시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너무 무상하였다. 히카시닛뽀리(東日暮里)에 있는 자택을 찾아 영단 앞에서 염불을 하였다. 보살펴주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언젠가는 장거사님의 내외분을 한국에 초청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 인연이 되지 못함이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장거사님의 부인 보살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우리 거사님께서는 만일 스님이 유학을 오시지 않았으면 그때 교통사고로 바로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님을 돌보시기 위하여 3년을 더 사시다가 스님께서 학업을 무사히 마치시고 귀국하시고 나서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이러한 인연을 맺어주신 스님에게 오히려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하셨다.

필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보살님의 말씀은 부처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이 아니면 도저히 하실 수 없는 말씀이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마치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말씀이었다.

귀국 후 15년이 지난 2003년 3월 15일 필자는 대정대학에서 박사학위(불교학)를 취득하였다. 그동안 지나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만일 그때 장거사님께서 포교당을 개설하자고 하실 때 그렇게 하였다면 장거사님께서는 더 살아 계시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말씀을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하였다. 비록 이국에서 만난 분들이지만 부처님과의 인연이 아니면 금생에 만날 수 없었던 분들이었다.

삼가 장거사님의 영전에 왕생극락을 기원 드리며 장거사님의 보살님과 그 아드님을 비롯 모든 가족분들께서 부처님의 가호로 항상 복과 지혜가 구족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