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대도무문
현해 큰스님/ 동국대학교 이사장
중국 송나라 때 스님이셨던 무문혜개(無門慧開)스님이 말씀하시길 대도(大道)는 문이 없으며, 문이 없을 때 비로소 어떤 길도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대도무문 천차유로 투득차관 건곤독보
대도는 문이 없으나 천차(千差)의 길이 있으니,
이 관(關)을 투득하면 건곤독보하리라.
같은 시대의 습암진훈(習菴陳塤)스님은 혜개스님의 말씀을 평창하시길
說道無門 盡大地人得入 說道有門 無阿師分
설도무문 진대지인득입 설도유문 무아사분
불도에 들어가는데 있어 문이 없으면, 지구의 누구든지 자유롭게 출입하며, 문이 있다고 하면 선지식의 가르침도 특별히 필요 없는 것이리라.
고 하였습니다. 문이라고 한다면 사바세계를 해탈하는 문이 있습니다. 『법화경』의 「비유품」에는 ‘화택(火宅)’ 즉 사바세계를 곧 불난 집에 비유하고 있는데, 구원받을 수 있는 문은 ‘유일협소문(唯一狹小門)’이라하였습니다.
선종의 대도무문(大道無門)과 『법화경』의 ‘유일협소문(唯一狹小門)’이 있는데, 이 문은 아무나 쉽게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방편품」에서는 진실문과 방편문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정하신 진실문은 여러 가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판문(板門)과 죽문(竹門)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부처님과 보살의 문은 진실문으로서 판문이며, 성문과 연각의 문은 방편으로서 죽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들로 하여금 차츰차츰 단계를 밟아서 깨닫게 하지만, 중국에서의 선종은 깨침을 중요시하므로 경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중생들의 근기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문이 모두 중요합니다.
『대지도론』에서는 섭문과 절문을 두었는데, 섭문은 역동적인 보현보살이며, 절문은 지혜의 문수보살로 대변되고 있습니다. 또한 극락세계에서는 현재도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고 계시는데, 그 가르침을 위해 섭문의 대표자로 관세음보살이, 절문의 대표자로서 대세지보살이 있습니다. 대세지보살은 절문으로서 체(體)이며 지혜이므로 오른쪽에 계시고, 관세음보살은 섭문으로서 자비행이며 왼쪽에 위치합니다.
사람에 있어 왼쪽은 근본으로서 체(體)이며, 오른쪽은 곧 용(用)으로 대변됩니다. 이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통해 먼저 섭수되어 본문에 들게 되면 대세지보살께서 모든 번뇌를 자르고 깨달음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과 체가 이루어지고 극락세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로 표현한 것 가운데
계곡의 물소리를 문득 들으니, 그것은 부처님 법문 소리요,
하물며 산색(山色)이 어찌 부처님의 진신 아니겠는가.
밤에 들려오는 팔만사천의 법문이 들려오니
다른 날 어찌 감히 이것저것이 다시 부처님 말씀이라 할 것인가.
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소리는 과연 어디에 근거할까요. 나무와 산천초목 모두 부처님 모습이요, 바람 부는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모두 부처님의 말씀입니다만, 선종의 이야기라기보다 극락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정토경전중의 하나인 『무량수경』에도 극락세계의 산천초목, 흐르는 물소리, 새소리 모두 부처님 말씀이라 하였습니다. 극락에는 모두가 부처님으로 보이기에 모두 성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법화경』에는 약왕보살이 일만이천의 대중 앞에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여기에 모인 모든 중생들의 업장이 커서, 이 중생들을 위하여 저의 몸을 태우겠습니다.
그러자 일만이천의 대중들이, 자신들 때문에 약왕보살이 불구자가 된 것을 보고 부처님께 열심히 참회하겠노라고 맹세하고 약왕보살의 불구를 고쳐줄 것을 애원하면서 진심으로 염불을 했던 것입니다.
몸을 태우는 것은 수계시의 연비와도 같습니다. 10가지의 참회를 위하여 모두 10군데를 떠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향으로 살짝 누르기만하는 약식으로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실천’한다고 하지만, 업이란 마음보다 몸으로 짓기에 몸을 태우는 것이며 이는 곧 업장소멸과 같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극락정토와 같이 새소리, 바람소리 등 모두가 부처님 말씀과 부처님으로 보일 때, 곧 내가 부처님인 것이며, 반대로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경쟁심리로 다른 이를 저주하거나 성을 내면 이는 곧 아수라인 것입니다.
임제스님은 산에 많은 소나무가 있음에도 소나무를 심었습니다. 첫째는 산문의 경치를 위해서이고 둘째는 후세를 위해서였습니다. 동국인 여러분들도 후세의 자손들을 위해 학교라는 도량을 키우고, 후일을 위해 이 곳을 발전시켜 나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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