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명상의 근본 개념 사띠(念)

사띠는 ‘수동적 주의집중’

조준호/ 불교대학 강사


사띠(sati)의 중요성은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에 놓여있다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용어이다. 그렇기에 이 말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바로 진리인식의 방법인 위빠사나의 성격을 가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띠는 기본적으로 ‘기억’을 의미하는 말이다. 경전에서 사띠는 선정 수행 시와 일상생활속에서 말하는 과거의 회상 차원의 기억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선정 수행 시 ‘기억’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 속에 ‘잊었던 것을 기억해내거나’ ‘향수에 젖어 과거를 회상하는 것’ 또는 ‘암기하였던 것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은 그러한 의미의 ‘기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한번 쯤 술을 많이 마신 나머지 ‘필름이 끊겨’ 그 동안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까지는 기억이 되는데 이후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꾸벅 꾸벅 조는 사람이 있다. 졸았다하면 완강하게 부인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꾸벅꾸벅 조는 것을 완강하게 부인하는 경우, 거짓으로 잡아떼거나 우길 수도 있지만 그러한 사실을 전혀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인 이유도 있다.  평상시의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는 있을 지라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경험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의식은 사이사이 끊김이 있는 가운데  진행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생각 생각(念念)의 이어짐(相續)이 순간순간 생멸(刹那生滅)하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순간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은 수면과 같은 어떤 장애에 의해 어느 순간에서 어느 순간까지가 생략되어버리고 기억할 수 있는 데까지 건너 뛰어 현재 순간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음 시 이를 우리는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명료하게 또는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 항상 깨어있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생활속에 이러한 의식의 흐름과 관련한 기본적인 기억의 속성은 선정 수행 시의 ‘기억’의 문제와 비슷하게 관련되어 있다.  기본적인 차이는 선정 수행 시 사띠의 언급은 좌선과 함께 문제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좌선을 통한 선정 수행으로 ‘뚜렷이 깨어있는 상태’가 되면 언제부터인가 존재의 모든 상황(身受心法)에 대한 찰라생멸하는 무상(無常)을 끊김없이 대면(對面)할 수 있다.  이러한 간단(間斷)없는 대면 상태를 바로 ‘사띠의 확립(四念處)’이라한다. 하지만 만약 간단없는 대면 상태가 일순간이라도 끊기면 그것은 바로 ‘실념(失念)’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확고한 확립 이후라야 일상생활로 확장 또는 확대되는 것이 가능하지 처음 시작부터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결론적으로 수행 상에 있어 사띠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없는 대면상태라는 결과적 측면을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대면 상태를『염처경』에서는 “자신에 있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보듯이, 누워서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보듯이”라고 비유된다. 마치 맑은 거울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과의 ‘뚜렷한 대면의 지속’을 말한다.

좌선 수행 시, 순간 꾸벅 조는 경우도 있지만 계속적으로 꾸벅꾸벅 조는 경우까지 있다.  염염상속이 찰라생멸하는 속성 상 ‘뚜렷한 대면의 지속’이 깨진 것이다. 사띠를 잃은 상태로 자신이 얼마나 졸았는지도 기억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경전에서 말하는 수행 상의 사띠는 바로 이러한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띠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깨어있는 선정상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는 잠들어 있는 상태까지도 잠들어 있는 자신과의 대면 상태로 나타날 정도이다. 그렇기에 경전에서 이러한 사띠는 분명 선정수행의 범위에 한정하여 정학에 설명된다. 그러면 왜 이러한 상태가 강조되고 있는가? 이러한 상태는 기본적으로 혼침 수면은 물론 다른 오개(五蓋)를 떠나 번뇌가 없는 상태의 유지이기도 하지만 보는데 듣는데 냄새 맡는데 맛보는데 접촉하는데 그리고 인식하는 데 있어 그 어떠한 것도 싣거나 개입·첨가하지 않고, 단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여실지견(如實知見)’의 ‘무분별(無分別)한 경지’이자, 그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무심한 주의집중’의 상태로 필자의 평이한 표현으로 ‘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대가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안다고 하자. 이때 보는데 있어 단지 바라 볼 뿐이며, 듣는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지각하는데 있어 단지 지각할 뿐이며, 아는데 있어 단지 알뿐이다… 이것이 바로 고(苦)가 다하는 길이다.”

“만약 색(色)을 봄에 있어 사띠를 잃으면 좋아하는 색상을 보고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좋아하는 대상에 탐욕을 느끼고, 그것에 집착하여 머물게 된다 … 만약 색을 보는데 사띠가 있어, 색을 보는데 있어 탐욕이 없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없고, 단지 느낄 뿐이어서 색에 대한 탐욕을 느끼지 않고 집착이 없다.”


다시 이러한 상태를 다른 경전에서는 목동이 추수 전 소 떼를 쫓아 채찍으로 ‘챙기고’ ‘지키는’ 능동적 관리가 아니라, 추수 후 똑 같은 상황이지만 나무 아래나 공터에 머물면서 단지 소 떼들을 향해 뚜렷이 거리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로 사띠는 설명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이렇게 사띠 수행이 추수 전이 아니라 추수 후라는 비유는 현재까지 사띠의 이해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 목차 |
 

| 월간정각도량 | 편집자에게 | 편집후기 |
Copyright 2001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