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명상의 근본 개념 사띠(念)

사띠의 의미와 쓰임

임승택/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사띠와 삼빠자나

좌선을 처음 해보는 사람은 누구나 망상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언제 잡념이 떠올랐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거기에 사로 잡혀 방황을 한다. 따라서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수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띠(念, sati)와 삼빠자나(知, sampajanna)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묘사하고자 고안된 불교 고유의 술어이다.

사띠는 원래 ‘잊지 않음(不忘)’을 의미하였는데, 경전에서는 이를 ‘감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비유하곤 한다. 즉 특정한 관찰 대상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마음을 흩뜨리지 않고 단속하는 것이 바로 사띠이다. 한편 삼빠자나는 알아차림을 의미하는데, 주변의 사물과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혹은 대·소변 따위를 볼 때에도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위에서 언급한 좌선에 적용한다면, 잡념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삼빠자나이고, 그렇게 해서 마음을 되돌리는 것이 사띠이다. 더불어 되돌린 마음으로 일정한 집중 상태에 머무는 것이 사띠라면, 다시 그러한 상태에 대해 분명하게 깨어있는 것이 삼빠자나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행자는 습관적인 망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롯이 각성된 상태를 체험한다. 필자는 양자에 대해 ‘마음지킴(sati)’과 ‘알아차림(sampa-

janna)’으로 번역한 적이 있다.


사띠와 사념처

초기불교의 경전에 따르면, 사띠와 삼빠자나는 사념처(四念處)의 수행을 가능케 하는 요인으로 묘사된다. 즉 “열렬한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니고서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찰한다”는 내용이 도처에 등장한다. 따라서 사띠와 삼빠자나는 사념처의 기능적 요소라 할 수 있고, 사념처를 일컬어 사띠와 삼빠자나에 의한 수행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띠는 삼빠자나를 수반하지 않고 단독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실천법 자체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사념처(四念處, cattaro sati-patthana)의 ‘념(念, sati)’이 그러하고, 안반념(安般念, 安般守意, anapana-sati)의 ‘념’이 그러하다. 또한 일부 경전에서는 사띠에 대해 직접 사념처 전체의 내용을 대입하는 경우도 있다(SN. vol.5. p.142 등). 따라서 사띠는 수행을 이끄는 요소임과 동시에 실천법 자체를 가리킨다.

사념처는 초기불교 실천체계의 전형으로서, “중생을 정화하는 길, 슬픔과 근심을 초월하는 길,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는 길, 지혜를 증득하는 길, 열반을 실현하는 길”로 묘사된다. 또한 사념처는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自燈明法燈明 自歸依法歸依)”는 말씀의 실제 내용으로 해설되고, 나아가 이것을 실천하면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라는 부처님의 유훈도 있다(DN. vol.2. pp.100-101).


사념처와 위빠사나

이러한 사념처의 개요는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을 통해, 탐냄 따위의 5가지 장애(五蓋)를 극복하고, 그러한 연후에 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사성제(四聖諦) 등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띠와 삼빠자나를 통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주시함으로써 사성제 등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사념처 수행의 기본 골자이다.

이러한 사념처는 현재 남방불교에서 행해지는 위빠사나(觀, vipassana)의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 즉 미얀마·태국·스리랑카 등에서 활동하는 여러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사념처에 입각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펼친다. 그들은 세부적인 측면에서 일부 독자적인 색채를 지니는 경우도 있지만, 사념처라는 틀 자체는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는 초기불교 사념처의 현존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언급했듯이, 사띠라는 말은 사념처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사념처는 위빠사나와 동일한 의미로 통용된다. 결과적으로 사띠는 위빠사나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그 쓰임이 확대된다. 일부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의 학자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사띠의 의미와 쓰임을 이해한다.


사띠의 두 가지 측면

실제 수행에서 사띠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된다. 즉 초보 단계에서 행하는 의지적 측면과 숙달된 상태의 자발적 측면이 그것이다. 먼저 전자에 관련하여 다음의 경문이 있다. “비구들이여, 마치 옷에 불이 붙어 있고 머리에 불이 붙어 있어, 옷과 머리[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강렬한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으로 물러남이 없는 사띠와 삼빠자나를 행해야 한다”(AN. vol.5. pp.99-100).

따라서 사띠란 일단 적극적인 의지로써 행해 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경문에 나타난 내용은 사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미얀마의 위빠사나 스승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 1910~2003)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그는 “처음 수행을 해 나갈 때는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수행을 오래 하다가 보면 법이 저절로 드러나 이끌어 준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언급에 따르면, 초보 수행자는 자신의 의지로써 사띠를 행해야 한다. 그러나 수행이 무르익은 상태에서는 법이 저절로 드러나 이끌어 주듯이, 사띠 또한 저절로 진행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사띠는 의지적·인위적 측면으로부터 벗어난다. 즉 감정적 동요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단지 주시만 하는 사띠로서 거듭난다. ‘네 번째 선정(第四禪)’을 특징짓는 ‘평정을 통한 사띠의 청정(捨念淸淨)’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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